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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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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배우 한예슬이 연기한 ‘나상실’이라는 캐릭터를 아시나요?

 

유산을 상속받아 부유한 교포 ‘안나 조’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남을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다 뱉고 봐야 하는 거만한 성격의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자기 소유의 요트에서 발을 헛디뎌 바다에서 구조된 후로 기억을 상실하며, 돈이면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는 장철수를 만나 생기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아직 회자되는 이유는 상실이의 ‘짜장면 먹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꾸덕한 소스에 윤기 흐르는 면발을 건져서 체면 차리지 않고 입에 가득 밀어 넣는 모습은 화면 너머의 저까지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듭니다. 부족할 게 하나 없던 안나는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로 저렴한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던 미식가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기억을 잃고 자신의 배경이 사라졌을 땐 입가에 묻은 소스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행복하게 면발을 끌어당깁니다. 마치 짜장면에 행복 바이러스라도 탄 듯이 말이죠.

 

문득 그 장면을 본 뒤로 짜장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홀린 듯이 배달 앱을 열었습니다. 주문 기록을 쭉 살펴보니 꽤 주기적으로 짜장면을 시킨 흔적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때부터 한 음식을 규칙적으로 찾게 되는 이유를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짜장면을 찾던 시기는 어디 가서 말하기 창피할 정도의 사소한 것으로 화가 날 때, 혹은 마음이 답답해서 손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할 때였던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케이스의 공통점은 바로 ‘컨트롤하기 어려워서 회피하고 싶은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때의 짜장면은 매일 찾아오는 허기를 채우기 위한 열량 덩어리가 아니라 정신적 치료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몸 안에서 작용하며 나도 모르게 손을 털어 버리는 의약품이 아닌, 미각에서 시작한 오감의 집약체는 척추를 타고 내 감정과 추억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먹는 건 순간이지만 향수는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반복되니까요. 정의할 수 없는 멜랑콜리는 단순 무식한 감칠맛이 덮어주고, 팍팍한 현실에는 윤활유를 쳐주며 길을 냅니다. 마치 유년기로 돌아간 듯한 천진한 기대감에 잡생각이 떨쳐 나갑니다. 오히려 짬뽕을 고르며 매운 음식도 어른스럽게 먹을 수 있다 으스대던 어린 시절과는 반대로 원초적인 달콤함을 찾는 저 자신과 마주합니다. 더 이상 어른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거겠죠.

 

이런 회피적 성향이 나를 자꾸만 과거에 고이게 하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잠깐 지속되는 음식의 향에 기대어 기분이 좌우되는 사람이 앞을 볼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제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도 전속력으로 쉬지 않고 달릴 때보다 구간 구간 수분과 체력을 보충해 줬을 때 목적지까지 더 빠르고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인생 전반의 쉼터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요!

 

저에겐 많은 숨구멍 중 하나가 ‘소울 푸드’인 거죠. 저는 여러분에게도 ‘생뚱맞은 자신만의 소울 푸드’를 다채롭게 만들어 놓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날수록 먼 휴양지에 별장을 지어 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몰라요. 비 오는 날엔 파전과 막걸리, 눈 오는 날엔 마시멜로가 올라간 핫초코… 도 좋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의외의 음식이 끌린다면 나를 위로하는 창의적인 방법이 또 하나 늘어날 거예요. 한 사람의 우주를 넓히는 데는 새로운 맛을 경험하는 것보다 간단한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나만의 소울 푸드가 찾고 싶어졌다면 다음 세 가지에 유의해 보세요.

  

처음은 처음이라 중요하다 -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든 생각은 점점 새로운 게 없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처음 교복을 입었던 날, 처음 스스로 렌즈를 꼈던 날처럼 일상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점점 줄어드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먹어보지 못한 음식의 조합은 아직도 무궁무진합니다. 새롭게 도전해 보는 음식이 생긴다면 그 순간을 음미하고 포착해 보세요. 반짝이는 눈으로 순간을 즐기려는 사람은 처음을 흘려보내는 사람과 확연한 차이가 난답니다.

 

'괴식'이라 할지라도 - 혹시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하시나요? 사실 저는 다소 불호입니다. 식사에 따뜻하고 쥬이씨(juicy)한 과일이 올라가 있다는 게 내키지 않았거든요. 누군가는 즐겨 먹는 음식인 한편 다른 누군가에겐 일종의 괴이한 식습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피자에서 파인애플 빼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계없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를 바꿀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어떤 식재료도 누군가에겐 혐오스럽게 비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직접적인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 '괴식'을 멈추지 마세요.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답니다.

 

가장 친숙한 타임머신을 타고 - 우스갯소리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가고 싶냐고 질문을 하곤 합니다. 진지하게 한참을 고민하다가도 이내 그런 게 어딨냐며 웃어넘기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준하는 마법을 가진 음식들을 일상에서 매일 만납니다. 집밥 같은 음식을 먹으면 고향이 생각나고, 처음 맛보는 음식이 보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어 먹을 상상을 합니다. 과거부터 미래까지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곳으로 마음이 날아갑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장 친숙한 타임머신으로 매일 추억을 돌아보고 미래를 그려냅니다.

 

요리는 기원전부터 환대와 배려의 기초였습니다. 낯선 이에게 정성으로 가장 좋은 걸 내줄 수 있다는 데서부터 이타적인 것이었죠. 그렇다면 하물며 자신에게는 어떤가요. 내가 좋아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음식을 잘 알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온유한 태도 아닐까요. 제가 짜장면 주문기록을 보고 내면을 돌아봤듯이 여러분도 자기가 찾게 되는 음식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다시 기억이 돌아온 안나는 남편 빌리와 일류 셰프를 불러 좋아하는 짜장면을 다시 먹었지만 자기가 아는 그 맛이 아니라며 상을 물립니다. 실제로 즐겨 먹던 동네 중국집 짜장과 맛이 다르기도 했겠지만, 같이 먹는 사람이 장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겠죠. 안나에게 짜장면이란 단순한 기호 식품 이상으로 처음 맛본 온기와 다정이었을 것입니다. 모난 성격 탓에 주위에 사람을 두지 못했던 그녀가 그를 만나며 알게 된 사랑은 상대를 궁금해하고 참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투박하지만, 천천히 스며들도록 해준 매개체는 다름 아닌 짜장면이었죠. 어쩌면 그녀를 가시 돋게한 건 주변의 무관심한 환경과 편견이었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안나가 달콤한 짜장면 한 그릇을 맛보며 미소 지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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