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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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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편의성을 위해 로봇을 개발했지만, 그 범위는 어디까지나 유해한, 힘든 직종에 대체되거나 잡일을 도맡아 하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각종 SF영화나 소설을 보면 결국 로봇에게 인간이 지배당하거나 로봇이 감정을 갖고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는 등의 소재가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한 스푼의 시간』은 감정을 갖게 된 로봇과 인간이 서로 이해하는 내용이란 점에서 위의 기조를 가지는 듯 했지만, 감정을 갖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세세하게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다.

 

주인공 '은결'은 로봇이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에게 은결은 명정의 죽은 아들의 유품으로 배달되어 온다. 낯선 고철 덩어리에게 명정은 둘째가 태어난다면 붙여주려 했던 이름 '은결'을 그에게 준다. 입력된 시스템 체계로 움직이는 은결은 명정을 도와 세탁소 일을 한다. 뻣뻣하게 직선형이던 체계는 '시호'와 '준교'를 만나며 조금씩 유연하게 바뀐다.

 

아이들의 예측 불가능한 성질은 은결에게 차곡차곡 입력되어 여러 공식을 도출해 내고 사람의 감정과 '한다', '해야한다', '해본다', '하자' 등의 동사의 미묘한 표현방식을 익히기에 이른다. 시호와 준교가 대학생으로 성장할 때까지 은결은 늘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사고방식은 흐른 시간만큼이나 성숙해진다. 처음에 '덥다'는 표현도 이해하기 힘들었던 은결은 '(가슴이) 무너진다'는 표현도 깨닫기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우리도 은결이었던 순간이 있다


 

이런 은결을 보면서 은결의 모습은 곧 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자마자 감정의 모든 종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은결처럼 애매모호한 감정들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체득된 것이 바탕이 되어 발화 사건이 생겼을 때 펑 하고 터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5살의 어린아이가 '(마음을) 비운다'는 표현을 이해하긴 힘들지만, 단계를 밟아나가다 보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듯이.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도 마찬가지다 어른이어도 인간관계가 서툰 사람이 많듯 관계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A는 B이다'는 단순한 공식만으로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다. 은결이 특정 상황에서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지만, 참는 행동은 우리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다. 로봇이라서 대답이 투박하다지만 그런 표현 자체를 잘 못하는 무뚝뚝한 사람도 있기에 은결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곧잘 들었다.

 

은결을 로봇이라 딱 규정하기 않았기에 시호도 본인이 숨기고 싶던 속얘기를 꺼내지 않았을까. 뻔한 위로의 말밖에 할 수 없는 그이에게, 충고나 타박을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았던 시호가 세탁물을 돌리며 자신의 마음도 깨끗하게 빨 수 있던 것은 항상 그 자리에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은결이 있기 때문이었다.

 

은결이 "말은 계속 학습되니까요. 말의 활용범위가 늘어나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시호의 이야기에 무슨 말을 해줄지 고민하던 은결이 습득해 왔던 언어체계를 동원해 예시를 드는 장면이었다. 은결이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고 행동을 표현한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학습된 말 때문일 것이다. 옹알이만 하던 우리가 커서 다양한 어휘와 표현방식을 구사하는 것처럼 우리의 활용범위라는 그릇은 넓어지고 단단해진다.

 

 

 

로봇이 아닌 '은결' 자체로의 정체성


 

은결은 '로봇'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닌 '은결' 자체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회로 안에 새겨진 정보들은 그를 만들어낸 인간일지 모르지만, 체득해서 학습된 언어, 추억, 감정, 표현방식은 은결이 이루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은결'로 기억하는 것만 봐도 그는 이미 한 인격체였다.

 

아직도 은결이 명정의 남긴 유서를 찢어버리고 이불 빨래를 하는 장면이 선연하다. 이불이 세탁기에 들어가지 않자 TV를 통해 봤던 대야에 이불을 넣고 발로 눌러 빨던 장면을 생각해 내고 똑같이 해보려는 씬이었다. 로봇이 물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기꺼이 물에 발을 담그며 망가지던 모습은 가족의 부재가 강한 슬픔이 되어 밀려왔던 한 사람의 절규 같았다.

 

본인은 슬픔이라 인지하지 못하지만 누가 봐도 그것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자의 포효였다. 정신을 반쯤 놓은 상태로 의미 없단 초점 잃은 눈을 한 사람이 보였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


 

은결은 항상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모른다. 특이한 상황이 생기면 회로에 계속 집어넣었고, 주인인 명정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다. 피해를 어쩔 수 없이 주었다면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했다.

 

로봇이기 때문에, 까먹지 않고 그때의 기억을 되살렸기 때문에 두 번의 실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걸음씩 느리지만 항상 전진했던 은결을 보면서 그 한 걸음조차 힘들다고 내딛지 않던 우리가 보였다. 이해하기 힘들다 포기하고, 내 것을 빼기는 것 같아 불안해하고, 철저히 감추며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적어도 은결은 본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다.


설탕 한 스푼을 물에 넣으면 달다. 세제 한 스푼을 물에 넣으면 깨끗하게 빨래할 수 있다. 한 스푼의 밥이 그 어떤 것보다 간절한 사람들이 있다. 딱 덜도 말고 더도 말고 한 스푼의 노력만 해준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우리의 세상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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