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잊혀진 것들

Forgotten.
글 입력 2024.03.3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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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Get High!’

 

 

멀지 않은 미래의 런던, 53구역. 거리의 낡은 벽에는 형형색색의 그래피티들이 그려져 있었다. 허나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그래피티는 이것이었다. 겟 하이. 그래피티 뿐 아니라 크고작은 낙서들로 더러워진 벽은 길거리를 따라 끝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 앞에서는 기다란 코트를 입은 갈색 머리 여성이 그래피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피티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두툼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지갑을 열자 런던 경찰청의 신분증이 드러났다. 여자는 신분증을 제치고 수많은 카드와 현금, 종이 조각들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가까스로 찾아냈다. 그것은 종잇조각 하나와 사진 한 장이었다. 종잇조각에는 그래피티에 새겨진 것과 같은 ‘Get High’라는 문구가 휘갈겨 쓴 글씨로 적혀 있었다. 사진에는 한 여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사진 속 여인은 나이가 많아야 30대 정도로 보일 듯한, 젊은 여성이었다. 허나 그 누구도 그녀의 실제 나이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이나 기본적인 정보 역시 말이다. 금발 머리를 어깨로 늘어트린 그녀의 사진 한 장이야말로 그녀를 추적하는 이들이 가진 유일한 정보였다.

 

갈색 머리의 여성은 그녀를 뒤쫓는 조사관이었다. 그렇게 긴급하거나 규모가 큰 사건은 아니었으며, 몇몇 이들에게는 사실상 도시전설이나 이야깃거리로 취급받을 정도였기에 53구역의 집행인들은 이 사건에 큰 무게감을 두지 않았다. 경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 조사관인 갈색 머리는 거의 반강제적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이다.

 

그것은 사실, 런던 경찰 중 53구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53구역 출신인 갈색 머리에게 사건이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갈색 머리는 이를 그다지 감사하거나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53구역은 런던 전역에서 손꼽힐 정도로 경제 수준과 치안이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갈색 머리는 이곳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모종의 이유로 거의 잃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사진과 종이, 그리고 그래피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진 속 금발 여성에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마약을 제공한다는 혐의가 붙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을 하이(High)하게 만드는 어떠한 가루를 준다는 것이었다. 대마초? 코카인? Get High. 약에 취한 후 기분이 좋은 상태를 지칭하는 이 속어 어구는 거의 없어졌지만, 53구역에서만큼은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금발 여인과 마약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일 경우에나 말이다.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새겨진 지 굉장히 오래되어 보였다. 벽에 새겨진 크고 작은, 낡고 새로운 그래피티와 낙서들 사이에서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며, 여인에 대한 이야기나 경찰청의 지시가 없었더라면 그 누구도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갈색 머리는 사진과 종이를 다시 지갑에 넣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53구역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대규모 아파트지 중심의 시장에 가볼 예정이었다.

 

시간이 오후를 가로질러 저녁에 가까워졌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시장은 더욱 붐볐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차량의 소리, 물건을 사고팔고 만지는 소리들이 섞이고 어울려 이 거대한 공간에 울려 퍼졌다. 갈색 머리는 말없이 시장 가장자리를 계속해서 걸었으며,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시장 중심지나 위쪽의 건물 창가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은 창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시장을 외롭게 걸어가던 그녀는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녀는 고개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장과 건물들을 누비고 훑었다. 어느 순간인가, 그녀의 시야에 사진 속 금발 여성의 것인 듯한 얼굴이 들어온 것이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뚜렷하고 정확했다. 그런 만큼 그녀의 머릿속에 불화살이 박히듯, 그녀는 순식간에 그 얼굴을 다시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갈색 머리는 인파를 헤집고 시장의 중심지까지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금발 머리의 사람들을 몇 잡아 세웠지만, 그중 일부는 남성이었고 일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색을 계속했지만 사진 속 여성은 다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착각한 것일까, 긴장감이 다시 풀어진 갈색 머리는 시장 한가운데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곧 다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갔다. 분명히 시장에서 본 금발의 여성, 사진 속의 그녀를 찾아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갈색 머리의 머릿속에는 ‘Get High’라는 문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갈색 머리는 자신이 온 곳이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처럼, 53구역에서 뻥 뚫린 구멍과 같은 공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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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53구역에는 어둠이 내렸다. 밤이 되면 도둑들과 갱단이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죽음의 활동을 시작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로, 집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 53구역의 외곽,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언덕에는 한 집이 있었다. 한 여인이 황폐한 길을 따라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시장으로 나들이를 다녀온 그녀의 어깨 위로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는 오늘밤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녀는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고, 언덕 위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깨끗하고, 세련된 내부를 가지고 있었다. 허나 그런 디자인과는 별개로, 가구나 생활용품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사람이 사는 듯한 곳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집안에는 뜻밖의 물건들이 있었는데, 바로 어린이들의 놀잇감과도 같은 작은 미니어쳐 집과 마네킹 같은 작은 인형들, 그리고 그 인형들 옆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작은 옷가지들이었다.


집에 들어온 여인은 겉옷부터 벗어던졌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집이었기에 그녀는 속옷마저 차근차근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속옷 중 브래지어를 싫어했는데, 가슴을 압박하는 착용감이 답답했을 뿐 아니라 끈이 어깨를 스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브래지어의 끈을 풀고 벚어젖힌 그녀는 끈이 지나던 자신의 어깨 뒤쪽을 살살 어루만졌다. 이후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연두색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는 어깨 아래, 가슴부터 시작해 그녀의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옷을 다시 갖춰 입은 그녀는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환히 열어젖혔다. 그녀는 하늘 위에 높이 뜬 달을 잠시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의 등에서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그리고는 갑자기 작은 빛이 반짝이더니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손바닥 만한 크기로 작아진 그녀는 계속해서 작은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날개를 이용해서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빛을 발하며 나는 금발 머리와 연두색 드레스의 요정. 그녀의 이름은 팅커벨이었다.

 

오늘 그녀는 시장 나들이를 나갔다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십수 년 전 이곳에서 함께 모험을 떠났던 갈색 머리 소녀 웬디 달링. 그녀는 어느새 성숙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팅커벨은 순식간에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품 안에 숨겨진 경찰 배지,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스치자 돌변한 얼굴빛을 말이다. 그녀가 자신을 찾고 있음을, 왜 찾고 있음을 말이다. 순간 마지막 모험 이후 웬디의 기억을 지워야만 했던 아픈 과거가 떠오르자, 팅커벨은 감정을 억누르며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한때 동화 속 마을처럼 신비롭고 아득하던 런던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변해 갔다. 선한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의 수는 점점 줄었으며 자연스레 이곳에 깃든 꿈과 희망의 힘 역시 희미해져 갔다. 한때 모험을 떠났던, 영원한 어린 시절을 약속받았던 아이들도 서서히 팅커벨의 곁을 떠나 어른이 되었고, 머릿속에서 모험의 기억을 지워 나갔다. 영원한 젊음을 가진 팅커벨은 자신의 곁을 함께하던 이들이 나이를 먹고 동심을 잃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런던에 계속 머무르며 버려진 집을 구했다, 곧 마법으로 인간의 모습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고, 인형 옷과 인형 집을 가져와 요정일 때는 그것들을 입고 이용하며 살았다. 자신이 이곳에 머무른다면 과거의 것들, 잊혀진 것들을 다시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옷과 끈으로 날개를 짓누르던 팅커벨의 노력과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들과 런던을 사랑하는 팅커벨이었지만, 꿈과 사랑의 쇠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


팅커벨이 즐겨 찾던 이곳은 53구역으로 분리되었으며, 아이들이 하늘을 날게 해 주던 가루의 이야기는 왜곡되고 더럽혀져 곧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해 준다는, 마약 가루를 판다는 괴상한 소문으로 변질되어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그것은 곧 경찰청의 귀에 들어가, 팅커벨은 조사관들의 표적이 되고야 말았다. 물론 이것은 경찰청이 강하게 신경 쓰는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결국 웬디를 마주친 이날, 팅커벨은 임시적으로 런던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오직 그녀 혼자라도, 다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바다를 건너 네버랜드를 찾아보기로 말이다. 한때 네버랜드로 아이들을 안내하던 길잡이였던 팅커벨은, 난생처음 홀로 네버랜드로 떠나는 것에 대한 많은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고, 열린 창문 사이로 날아올라 달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외롭지만 한 줄기 희망을 쥔 채, 꿈과 동심, 희망과 사랑의 땅을 다시 찾기 위한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정에 성공한다면, 그 끝에서는 런던에도 다시 사랑과 꿈이 솟아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녀가 직접 답을 알아내야 할 질문이었다.


팅커벨은 희미해진 기억 속 길을 더듬으며, 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환상의 나라, 네버랜드로……

 

 

[하지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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