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시 쓰는 죄목 - 팜 파탈; 가려져 버린 [공연]

사회에 스민 혐오를 되짚어보는 시간
글 입력 2023.09.07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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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신화는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담긴 차별과 혐오의 서사를 그저 받아들이기 쉽다. 익숙하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오래된 신화의 이미지가 받아들여지고 재생산되기 때문에 그저 익숙해지기 쉬운 이야기를 공연 <팜 파탈; 가려져 버린>은 더는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진 않겠다고 선언한다.


 옛 고전을 재해석하는 2023 산울림 고전극장의 마지막 공연 <팜 파탈; 가려져 버린>이 새롭게 해석하는 오래된 신화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았다.

 

 

 

지금 현재 다시 쓰는 그녀들의 이야기



<팜 파탈; 가려져 버린>은 '히든 죄수'라는 비슷한 이름의 티비 프로그램을 떠올리게 하는 토크쇼 포맷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크쇼의 형식을 빌려 신화 속 여성들이 직접 등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그들에게 씌여진 죄목에 대해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연극 막바지 그들의 이야기와 변론을 모두 들은 후 유죄 여부를 다시 평가한다는 안내로 시작되는 연극은 수메르 신화의 잊혀진 여신 '인안나', 유대 신화의 인류 최초의 여성 '릴리트',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와 '펜테실레이아'의 이야기로 채워져있다.


각각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남편과 시누이를 살해한 죄'의 '인안나', '우리 인간의 원죄 유발죄' 릴리트, '무수한 살인죄' 메두사 그리고 '대량 학살죄'의 펜테실레이아.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 부여된 죄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마땅히 할 법한 행동이었으며 진짜 원인은 '나'에게 있지 않다며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남편과 시누이를 죽음으로써 벌한 인안나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태도에 대한 합당한 대응이었음을 강조하며 남편과 시누이를 살해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죄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남편의 불륜과 그것을 옹호하던 시누이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릴리트는 자신이 아담을 떠난 것이 아담이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인간의 원죄를 유발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아니라 아담이라고 주장한다.


무수한 살인죄의 '메두사'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메두사는 처음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타인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꺼리며 소극적이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자신과 눈을 마주치면 돌이 되는 저주를 받게 된 이유가 신성한 신전에서 강간을 '당했기' 때문인 것을 고백하며 메두사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죄목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님을 토해내매 억울함을 토로한다.


여전사 종족, 아마조네스를 이끌던 우두머리 '펜테실레이아'도 자신의 행동이 학살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아모조네스 종족만이 취했던 비윤리적인 행동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결정적으로 펜테실레이아는 트로이 전쟁에서 같은 전사였던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자신의 시신을 희롱당하고 강간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그리스 신화의 전설적인 전사로 기억되고 평가받는다는 사실은 관객에게 우리가 펜테실레이아가 여자이기 때문에 특히 더 가혹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냐고 반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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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막바지 잊혀진 수메르의 고대 여신 '남무'가 등장하여 히든 죄수들에게 무죄를 내리며 마무리 된다. 또한 그녀는 이제 비로소 자신이 깨어났으니 죄수로 기억되었던 4명의 여성들을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며 세상의 변화를 암시하는 말과 함께 극을 마친다.

 

<팜 파탈; 가려져버린>은 고대 신화 속 여성이라는 이유로 잊혀지거나 상징적인 이미지로만 이용되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현재의 시선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신화 속의 여성 혐오를 지적하며 고대부터 시작되어 온 혐오의 아득한 뿌리를 찾는다.

 

다만 이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진심으로 공감하는만큼 연출과 전달 방식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히든 죄수들의 이야기가 무겁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것과 밀접하게 닿아있는만큼 연극은 다소 무거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고대 여신 '남무'의 의상이나 각 인물을 소개할 때 나오는 자료 화면 그리고 예능 티비 토크쇼라는 형식을 빌려 그 무거움을 다소 환기해보려고 한 연출 시도들이 보였다.

 

다만 그 시도들이 오히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중함을 다소 해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죄가 아니다', '너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를 반복해서 외치는 메시지의 전달 방식은 지나칠 정도로 직접적인 것에 비해, 연출은 다소 우스꽝스럽고 소위 'B급'을 표방하고 있어 관객이 연극의 메시지에 설득당하기에는 여러 요소들이 과하다고 느낄 여지가 많았다.

 

연극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이미 공감하고 있는 관객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연극을 통해 설득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에 공감하는 한 명의 관객으로써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사회에 스며든 여성 혐오를 다시금 짚어볼 수 있었던 연극이었던 만큼 아쉬운 점이 보완된 극단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국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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