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거창하지 않아서 서늘한 전쟁 이야기, 국립극단의 '몬순'

글 입력 2023.04.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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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의식하지 않지만

내 몸과 모두의 몸, 사이 사이를 휘몰아치는 바람.”

 

 

[국립극단]몬순_포스터.jpg

 

 

인류라는 종목으로 묶여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우리 인간들이 공유하는 지구의 대지는 너무나도 광활하다. 그래서 물리적 공유지가 존재하지 않는 지구 반대편의 세계는 나의 일상과 쉽게 유리된다. 그리고 이 장벽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라면 지금 현재도 누군가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세계 유일의 휴전국민으로서 우리 또한 전쟁의 영향력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국립극단의 창작 초연 <몬순>은 이러한 전쟁이라는 모티프를 극사실적인 픽션으로 풀어낸다. 빛바랜 과거 혹은 모호한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닥친 상황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현실처럼 서술된다. 극중에는 오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상의 국가 타트 출신의 세 인물 ‘네이지’와 ‘코우쉬코지’, 그리고 ‘문’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각기 다른 국가에서 홈스테이 유학생으로, 교환학생으로, 무용수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만의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타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셋의 이야기는 연결 지점을 갖는다. 그 중심에는 그들의 정체성이라는 명분이 있다. 전쟁 피해국의 난민, 가난한 국가에서 온 외지인이라는 꼬리표는 객관적 정보에 가까운 진실 그 자체지만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씻어낼 수 없는 편견처럼 작용한다.


무대 또한 세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듯 경계가 명확치 않은 하나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가정집 실내처럼 연출된 1층 곳곳의 계단으로 2층 가장자리의 난간으로 올라갈 수 있는 형태다. 이 공간 위로 세 인물들의 이야기가 각자 펼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동일한 시점에 중첩되기도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네이지의 이야기다.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5.jpg

 

 

A국가에서 살고 있는 네이지는 ‘차미’의 집에서 홈스테이 중인 유학생이다. 차미는 무기 제조 기업인 ‘몬순’ 소속의 엘리트 연구원으로, 남편과 사별한 뒤 홈스테이를 받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함께 살게 된 네이지는 차미의 아들인 ‘굴’을 돌보면서 시터 노릇을 한다. 굴이 좋아하는 수학 문제를 질릴 만큼 내주고, 굴에게 아빠는 유리 괴물을 물리치러 갔다는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고, 드론 '붕붕이'를 가지고 노는 굴을 가족에게 영상통화로 소개시켜줄 정도로 네이지와 굴은 가까운 사이다. 차미 또한 네이지가 집안일을 도우려고 할 때마다 너는 가정부가 아니라며 말릴 정도로 그녀를 아낀다.

 

그러나 네이지는 차미, 굴과 피크닉을 즐기던 중 고향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로부터 충격적인 전화를 받게 된다. 어머니는 동생이 식당을 찾아온 군인에게 지금은 영업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다 폭행을 당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당시 군인이 들고 있었던 우산에 ‘몬순’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 네이지는 얼어붙는다. 붕붕이가 망가져 우울해했던 굴에게 차미는 새 드론을 선물하는데, 그 쇼핑백에 새겨진 글자 역시 몬순의 로고다. 그 순간 네이지는 이들을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4.jpg

 

 

전쟁의 후유증을 피부로 느끼는 네이지와는 달리 B국의 ‘새벽’은 미디어아트를 전공 중인 대학원생으로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인물이다. 그렇지만 졸업 작품의 소재로 동시대 사회 현상인 전쟁을 선택해 관람객이 미사일이 되어 볼 수 있는 체험형 영상 작품을 계획한다. 그녀의 친구인 사진작가 ‘이삭’ 또한 전쟁사진을 찍기 위해 D국에 머무르고 있다. 두 인물은 전쟁의 아픔을 사유하고자 예술이라는 매체로 전쟁에 접근하려 하지만, 전쟁의 피해 당사자가 아닌 응시자로서 알게 모르게 전쟁이라는 주제를 얄팍하게 소비한다.


반면 새벽과 같은 수업을 듣는 코우쉬코지는 타트 출신으로 학부 교환학생으로 B국에 체류 중이다. 코우쉬코지는 대학원 수업을 도강하고 있지만 그 사실에 관심조차 없는 지도교수는 그가 타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새벽에게 그를 인터뷰해 보라고 제안한다. 그에게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다. 코우쉬코지는 기삿거리를 위해 무례하게 질문하는 학보사 기자에게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느냐고, 그럼 넌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새벽 또한 곁에서 그를 지켜보며 고민을 거듭한 끝에, 졸업작품의 당위성을 명료하게 규정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다.

 

 

[국립극단]몬순(2023)_홍보사진03.jpg

 

 

C국에 살고 있는 문 역시 코우쉬코지와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다.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동성의 연인 ‘리오’와 함께 퀴어페스티벌에 올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리오는 페스티벌의 활기찬 분위기에 걸맞게 문과의 운명적인 첫만남을 재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최근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혐오범죄 피해를 입은 문은 그때 당시의 사건을 다루길 원한다. 둘은 이 문제를 두고 작은 다툼을 이어간다.


문은 자신의 상처를 무대에서 들춰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왜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숙고한 끝에 가해자의 폭력에 정당한 이유를 대려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고, 이건 마치 나라는 존재의 타당성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 것만 같다고 말한다. 결국 문의 도전은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불편한 사건을 애써 수면 위로 끄집어내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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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이야기에는 공통적으로 ‘비’라는 소재가 등장한다. 네이지와 차미 모자의 평화롭던 관계는 동생의 소식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며 깨어진다. 새벽의 졸업전시는 갑작스러운 폭우로 차질이 생기며, 문이 가해자와 공원에서 다시 마주하는 순간에도 비가 내린다. 이는 단적으로는 전쟁이라는 물살이 개개인의 삶에 드리우는 그늘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극의 제목 ‘몬순’은 비를 동반한 바람에 가깝다. 전쟁의 특성은 이곳저곳을 휩쓸며 빗방울을 흩뿌리는 이 몬순에 비유된다. 몬순이 몰고 오는 빗방울은 특정한 누군가의 머리 위에만 쏟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직접적인 피해자 바깥의 범주까지도 전쟁은 크고 작은 영향력을 전파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극중의 타트 출신들 또한 타지에서 살아가며 전쟁의 직접적인 위해로부터는 몸을 피한 상태지만 그럼에도 전쟁의 여파를 쉽게 떨쳐낼 수 없다.


그들의 주변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이 없는, 즉 빗방울을 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장소에서도 전쟁의 존재감은 늘 도사린다. 이들은 전쟁을 경험한 친구를 위로하고, 전쟁을 소재 삼아 작품활동을 하며, 전쟁으로 이득을 취하는 기업에서 일하면서 딜레마를 겪는다. 이렇듯 전쟁은 모두의 삶에 다양한 층위로 맞닿아 있다. 이로써 전쟁은 국지적일 수 없으며 그로 인한 피해자는 쉽게 특정되고 타자화될 수 없음이 드러난다.


이 메시지는 서사의 결합 방식으로 극대화되어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아홉 명의 인물들은 세 가닥의 이야기로 나뉘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절대적인 주인공 역시 명확하지 않은 데다 모든 인물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얼핏 집약적이지 못하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구성이다. 하지만 새벽이 결론 지었듯 전쟁이야말로 하나의 형용사로 정립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구성이야말로 극이 우리에게 강력하게 물음표를 던질 수 있는 방식이다.


그 가운데서도 분절된 세 이야기가 연결되는 아주 찰나의 순간들이 눈에 띈다. 네이지가 굴에게 들려주는 유리 괴물 이야기는 리오의 말소리로 이어지고, 새벽은 이삭을 통해 차미를 소개받아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다. 이때 차미가 타트 출신의 어머니와 연을 끊은 뒤 몬순에 헌신하게 된 계기가 밝혀지고, 이는 다시 네이지와의 대화와 겹쳐진다. 또 타트의 대표적인 음식인 ‘버터스튜’가 세 이야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등장하는 것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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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의 ‘몬순’은 하나의 서사만을 육중히 쌓아올리지 않아서 더욱 신선하다. 대신 전쟁이 파생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느슨하게, 때로는 치밀하게 배치한다. 그래서 전쟁이 낳는 서늘함이 더욱 시렵게 와닿는다. 2023년의 우리가 둘러보아야 할 현실을 가장 적절하면서 가장 빠른 시기에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로써 무심하고 안일하게 굳어졌던 우리의 사고회로를 차갑게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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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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