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뜨겁게 사랑하고 단단하게 쓰는 삶 - 도서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삶은 곧 소설이다
글 입력 2023.04.0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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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중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학창시절 ‘제인 에어’를 처음 읽고 느꼈던 감동과 설렘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동안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제인 에어’였을 정도로, 부드럽지만 강인하고 순수하게 빛나는 소설 속 제인의 삶을 참 사랑했었다.


이 책 속에는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아그네스 그레이’ 등 여성의 글쓰기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적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킨 브론테 자매 샬럿, 에밀리, 앤의 삶이 담겨있다. 절친한 친우들과 주고 받았던 서신 속에서, 또 때론 주변인들의 서술 속에서 이들 자매는 생생하고 또 열렬하게 살아있다. 


어려운 시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브론테 자매들의 진솔한 삶을 느낄 수 있었다.




광활하고 고독한 황야의 풍경



광활하고 쓸쓸하며 때론 고독하고 외로운 황야의 풍경은 브론테가의 삶에 늘 배경으로 존재한다. 브론테 자매의 아버지이자 목사였던 패트릭 브론테는 메마르고 거친 요크셔의 황야가 펼쳐진 하워스에 자리를 잡았다. 마을의 꼭대기이자 황무지와의 경계 지점에 자리잡았던 목사관은 평생 브론테 자매들의 보금자리이자 쓸쓸하고 고립된 영혼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 되었다. 


황야는 어린시절부터 브론테가 아이들을 불러내는 놀이터였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며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했던 브론테가의 아이들은 고립된 목사관과 황야 속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상상하는 꼬마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황야에서의 고독과 자유를 즐겼다. 고독을 즐기는 성향과 무언가에 열중하는 기질은 그들이 훗날 글을 쓰고 작가의 꿈을 꿀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급속하고 격렬하게 부풀어오르는, 내가 아는 그 바람이 지금 이 순간 저 멀리 하위스의 황야에서 불고 있다. 바람이 우리 집을 휩쓸고 교회 묘지로 내려가 낡은 교회 건물을 휘감을 때, 브랜웰과 에밀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마도 나와 앤을 떠올리리라


- 샬럿의 편지 중

 


브론테가의 6명의 자녀 중 작가의 길을 걸었던 샬럿, 에밀리, 앤의 작품 속에서도 메마르고 황량한, 그러나 광활한 신비로움을 품고 있는 황야에 대한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장치나 배경이 아닌, 브론테 자녀들의 뿌리이자 삶의 근원 그 자체였던 것이다. 


 

산책하기 좋은 화창한 날에 즐겁게 황야를 거닐다 보면 간간이 황무지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계곡과 골짜기가 나타났어요. 울퉁불퉁한 기슭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반가운 보물이었죠. 에밀리와 앤, 브랜웰은 개울을 건너다녔고, 간혹 다른 두 사람을 위해 징검다리를 놓기도 했어요. 이런 장소에는 언제나 기쁨이 감돌았어요. 이들은 이끼 하나 꽃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모든 색깔과 형태에 주목하며 마음껏 즐겼죠. 특히 에밀리는 구석구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배우 기뻐했는데, 그럴 때면 평소의 조용한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답니다. 


- 샬롯의 친구 앨런이 처음으로 목사관에 방문한 후 받았던 인상

 



삶은 곧 소설이다



어떤 창작물이나 작품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언제나 작품 그 자체만을 보아야 할지, 작품을 집필한 작가의 의도나 삶, 그 시대의 배경을 고려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곤 한다. 내재적 관점이냐 외재적 관점이냐는 언제나 화두에 오른다. 그 무엇도 정해진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인생이나 창작물의 집필 배경을 알게 되면 작품이 더욱 흥미롭고 깊이있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배경 지식을 미리 공부했을 때 더욱 많은 것들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로서의 삶에서 시작해 개인적인 한 명의 사람으로서 끝나는 브론테 자매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동시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작품 속엔 창작자의 삶과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녹아들어 있다. 쓸쓸하고 황량하며 때론 고난과 역경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은 곧 브론테 자매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행복했고 괴로웠으며 절망했던 어떤 순간의 경험과 기억들은 이야기로 승화되고 또 활용되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목사로 재직했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의 적은 수입에 의존하며 목사관에서 살았던 6명의 형제자매는 늘 넉넉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 살아왔다. 10살 정도가 되자 브론테가의 딸들은 ‘궁핍한 교역자의 여식들’을 위한 –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 집에서 50마일가량 떨어진 코완브리지 기숙학교에 처음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겸허함과 기독교적 순종을 목표로 가혹하고 엄격한 교육을 행했던 이 곳은 식사와 위생환경, 난방마저 잘 되지 않는 끔찍한 환경이었다. 티푸스와 결핵이 학교 안에서 유행하기 시작되었을 때 이 곳에서 브론테가 자매들은 두 명의 언니들을 잃는 비극적인 경험을 한다. 


하지만 샬럿은 20여 년 후에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작품 ‘제인 에어’의 배경이 되는 로우드 학교를 탄생시켰다. 잔인했던 캐러스 윌슨 목사는 소설 속에서 신실한 척하는 브로클허스트라는 등장인물이 되었다. 괴롭고 비극적이었던 기숙 학교에서의 경험이 불후의 명작 ‘제인 에어’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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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교사로 일하며 보냈던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의 경험 또한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나이가 차고 더 이상 아버지인 패트릭 브론테의 적은 수입에만 의존할 수 없이 스스로 세상에서 살아 나갈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기가 이들에게도 찾아왔다. 이들이 선택했던 길은 가정교사였다. 


그러나 평생 남의 집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저임금에 시달리며 집을 그리워하는 것도 모자라, 정신적 자유까지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가정 교사의 일은 브론테가 자매들에게 맞지 않았다. 이들은 언제나 머물렀던 집에서 떠나 직업의 세계를 향해 절망적으로 돌진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가정 형편 탓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었으나, 그들의 욕구와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 길이었다. 힘들었던 이 시기의 경험 또한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제인 에어’ 속 주인공 제인의 직업 또한 가정교사이다.


샬럿에겐 또다른 절망의 시기가 찾아온다. 영국을 떠나 벨기에 브뤼셀 에제 기숙 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에제 부인의 남편이자 스승이었던 콩스탕탱 에제를 짝사랑하게 된 것이다. 보답받을 수 없던 사랑의 열병에 괴로워하던 샬럿의 경험 또한 ‘제인 에어’ 속 로체스터 씨라는 남자 주인공으로 형상화된다. 어떤 의미에서 브론테가 자매들의 작품은 매우 자서전적인 작품이자 그들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야기인 셈이다.


몸이 아프고 가족들 또한 아프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힘겨운 시기에 샬럿은 ‘제인 에어’를 집필했다. 아버지의 수술을 위해 보호자로 지내는 동안 숙소의 어두운 방에 조용히 앉아 작고 기울어진 글씨체로 3부작 소설을 빠른 속도로 써내려갔던 샬럿, 그 작품의 이름이 바로 영문학계의 불후의 명작이자 고전으로 손꼽히는 ‘제인 에어’였다. 


인생의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절망의 순간들을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무언가로 승화시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놀랍고 감동적이다. 마치 최고의 칼을 만들기 위해 몇천번이고 뜨거운 쇳물에 담그고 망치질을 하는 대장장이처럼, 지극한 삶의 고통은 때때로 우리 스스로를 뛰어넘어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곳으로 데려간다. 진솔하고 강인하며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제인 에어’ 속 제인의 외침이 그러하다. 


 

제가 가난하고, 보잘것없고, 평범하고, 몸집이 작다고 가슴도 영혼도 없는 줄 아세요? 잘못 아신 거예요! 저도 당신과 같은 영혼이 있고, 뜨거운 가슴이 있어요! 하나님이 제게 미모와 부를 주셨더라면 당신은 나를 쉽게 떠나지 못할 거예요. 내가 지금 당신에게 그러는 것처럼요. 나는 관습이나 인습, 인간의 육체를 통해 말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내 영혼이 당신의 영혼에게 부르짖고 있는 거예요. 우리 둘 다 무덤을 지나와 하나님의 발아래 서 있는 것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말이에요!


- 소설 '제인 에어' 중

 

 


햇살과 바람으로 엮은 그물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같은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가’ 였다. 


자신의 세상을 이해해주고 평생을 함께 할 동료가 있다는 것은 매우 축복받은 일이다. 브론테가 자녀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고립되고 안락한 그들만의 세상이자 집에 살면서 함께 상상의 세계를 만들었다. 상상의 세계를 ‘지어내는’ 일은 브론테 아이들에게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어려서부터 그들은 각 상상 속에서 각자의 왕국을 다스렸고 – 앵그리아 왕국과 같은 – 책이나 정기 간행물, 정치 소식, 그리고 그들의 생활 범위인 목사관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끌어와 상상의 세계 속 이야기로 만들었다. 그들에겐 일상생활만큼이나 현실적인 세상이었던 셈이다. 


몸이 약한 자매들이 일찍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샬럿과 에밀리, 앤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고 같은 작가라는 꿈을 이뤄나가는 끈끈하고 든든한 동료였다. 그들은 함께 비평하고 또 이야기하며 그들의 상상 속 세계를 확장시켜 나갔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샬럿은 살아생전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고백한 바 있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황무지를 뛰어놀던 어린시절부터, 힘들었던 기숙학교 시절과 고난의 연속이었던 가정교사 시절까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자 자매들이었던 동생들을 잃고 나서도 샬럿은 언제나 글을 썼다. 상상의 세계이자 글 속의 세상은 그녀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세상이었던 셈이다. 특히 동생들을 잃고 큰 슬픔에 빠져 글을 쓰던 한동안은 ‘글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했다. 


짧고 비극적이었지만, 순수하고 진솔한 생명력으로 빛나던 브론테가 자매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박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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