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행복은 마치 커튼 뒤 일렁이는 햇살처럼 - 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

다시, 오월의 노래
글 입력 2023.03.1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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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의 미완 희곡인 보이체크를 재해석하여 한층 깊어지고 새로워진 시각으로 귀환한 뮤지컬 <보이 체크 인 더 다크>.


오래 지속되어 온 전쟁으로 혼란하고 피폐한 가상의 사회를 배경으로, 당시 가난한 민중의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고통과 절규를 아름답고 적나라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강가에 붉은 꽃이 피어나길 바라며 부른 그 시절의 가난하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우리가 아무리 두 눈을 떠 봐도 이 세상은 너무 어두울 뿐이야'


 

가난했던 주인공 보이체크는 전쟁 중에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는 이유로 군인이 된다. 하지만 천성이 선하고 마음 약했던 그에게, 전쟁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론 살육조차 서슴지 않아야 하는 군인이라는 직업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다는 이유로 늘 고된 훈련을 받으며 상관인 대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게 일상이다. 


이런 보이체크의 유일한 위안은 고된 하루 끝에 들으러 가는 마리의 노래 뿐.

 

캬바레의 가장 화려하고 높은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는 마리는 가게에서 가장 많은 경애와 흠모의 꽃을 받는 여가수였으나, 사실 그녀의 꿈은 자유롭게 멀리 날아가는 것이었다. 무대 위 그녀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치는 보이체크도 마리에겐 자신의 껍데기를 향해 박수를 치는 무의미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둘의 사이는 보이체크가 ‘꽃씨’를 심으며 급변한다. 마리에게 바칠 꽃 한송이조차 살 돈조차 없었던 보이체크가 강변에 심기 시작한 꽃씨. 강변을 자주 지나가는 마리가 보길 바라면서, 언젠가 활짝 피어난 꽃을 마리에게 바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열심히 강가에서 꽃을 가꾸는 이 특이한 군인은 곧 마리의 눈에도 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대화가 이어질수록, 이 이상하고 특이한 군인은 마리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는 이 차갑고 어두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눈을 뜬’ 사람이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진심 어린 따뜻한 위로를 건넬 줄 알며, 무엇보다 화려한 노래 속 마리의 슬픈 목소리를 알아차려 주었던 유일한 사람. 어두운 시대,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들 사이에서 특이한 별종 취급을 당했던 그는 사실 그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이었다.


마리는 알아차린다. 그가 따뜻한 사랑으로 꽃씨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돈의 가치로 환산되고 죽고 죽이기에만 바쁜 이 무자비한 세계에서 보이체크는 생명을 꽃피울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마리는 그에게서 생전 처음으로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과 같은 희망을 느낀다. 사랑을 느낀다.


보이체크가 심었던 꽃씨는 마리와의 사랑이라는 결실을 꽃피운다. 꽃피는 5월에 둘은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고 둘 사이에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아들 한젤도 태어난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앞길은 매일이 오늘과 같이 행복할 것만 같다.

 

과연 그 꽃씨는 행복의 시작이었을까,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영원은 영원할까? 아니, 영원도 결국 찰나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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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만 같았던 둘의 사랑은 아들인 한젤이 아프기 시작하며 산산조각나기 시작한다.

 

때론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지만, 당장 오늘을 살기 바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은 사치일 뿐이었다.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보이체크와 마리에게 아들인 한젤은 돈으로 환산조차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으나, 아픈 한젤을 치료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살리기 위해선 치료비가 필요했다. 어둡고 어두운 시대. 생명의 가치는 때론 너무 쉽게 돈으로 환산되곤 했다.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이 어린 두 부모는 백방으로 노력한다.

 

보이체크는 군 내의 비밀스러운 불법 실험에 자원하여 참가하게 되고, 마리는 다시 캬바레 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는 당장 오늘의 생존이라는 명제 앞에서 흐릿해진다. 삶을 예찬하며 죽음의 무거움을 깨우치고 있었던 보이체크에게도 수없이 많은 ‘눈을 감을 수 있는 순간들’의 유혹이 다가온다. 어두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잠깐만 눈을 감으면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한젤의 목숨을 살릴 치료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편해질 것이라는 유혹들. 한때 무한한 생명이 깃든 꽃씨를 심었던 보이체크는 이제 의무관이 건네준 ‘썩은 콩’이라 불리는 알약을 삼킨다.


돈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들, 사랑하는 것들은 종종 세상에서 돈이라는 가치로 환산되어 이해된다. 그들을 사랑하고 지키고자 함은 곧 돈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필사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던 보이체크와 마리에게 돈은 한젤의 치료비이자, 목숨이자, 한젤 그 자체였다. 사랑하는 이를 지극히 소중히 여김은 곧 돈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둘의 간절한 노력에도 결국 아들 한젤은 목숨을 잃고, 극은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행복은 마치 커튼 뒤 일렁이는 햇살처럼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어둡고 불행하고 슬픈 장면들이 등장한다.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군 내의 불법적인 약물 실험에 참가해 점차 미쳐가고 피폐해지는 보이체크와, 아픈 아들을 껴안고 울부짖는 마리.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세상.


그러나 그렇기에 마치 칠흑같은 어둠 속 한 두 방울 떨어져 빛을 밝히는 불빛처럼, 마음껏 사랑했고 마주 웃었던 극 초반 둘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계절인 5월의 봄에 보이체크와 마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두 손을 맞잡고 같이 춤을 추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그리고 보이체크는 마리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금과 똑같이 있는 그대로의 마리를 사랑하기를’


한젤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점차 피폐해지는 삶 속에서도 보이체크는 종종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완벽한 군인을 만들겠다는 일념 아래 군의관이 건넨 '감정을 거세한다'는 알약을 먹고 미쳐가는 와중에도 보이체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고 따스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반복되고 변주되어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중간중간 흘러나오는 넘버 ‘5월의 노래’는 그렇게 가장 감마로운 동시에 가장 아름답고 슬픈 곡이 된다.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고 난 뒤엔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어둠이 더 사무치게 다가오곤 하니까.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어서 빛이 이렇게 더 찬란하다는 걸 깨닫게 되곤 하니까.


인생이란, 행복이란. 결국 이렇게 커튼 뒤 일렁이는 햇살 같은 건 아닐까. 그렇게 닿을 듯 닿지 않는 어떤 아스라한 무언가를 쫓으며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인 것은 아닐까.

 

언젠간 커튼을 걷고 찬란한 햇살을 마주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그렇게 드문드문한 햇살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일지도.




다시, 오월의 노래


 

 

저 강물에 슬픔은 흘려보내고

너무나 빛나는 5월에

그저 이대로 눈을 맞추고 노래하면 돼요


- 넘버 '5월의 노래' 중

 


일제강점기 뜨거웠던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새드엔딩. 슬픈 끝맺음이지요. 새드엔딩은 언제나 오래 남는 법이니까요.’


한젤을 잃고 완전히 미쳐버린 보이체크는 끝내 마리도 잃는다. 그리고 영원한 자기만의 환상 속 꽃밭에서 마리를 위한 꽃을 가꾸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살게 된다.


진하고 비극적인 결말은 뮤지컬이 끝난 뒤에도 어쩐지 계속 이야기를 곱씹고 떠올리게 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결말이었으면 다 보고 나와 후련하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마치 오래된 상처처럼 보고 나와서도 어쩐지 마음속에 무언가가 남아있는 기분이다. 그건 극 중 인물에 대한 안타까움일수도, 아름다웠던 사랑 이야기에 대한 예찬일수도, 이야기에 대한 여운일수도, 그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


꼬마아이 카를의 독백으로 시작되었던 극은 마지막까지 카를의 독백으로 막을 내린다. 무대의 첫 장면에서 마리의 노래를 듣고 박수를 쳤던 젊은 보이체크의 모습이 똑같이 반복되며 극은 마무리된다.


이건 아주아주 오래 된 이야기, 하지만 언제까지나 반복되는 이야기.

 

관찰자이자 이야기 전달자였던 카를은 ‘영원 또한 찰나일 뿐’ 이라며 냉소했지만, 놀랍게도 영원한 건 존재했다. 가령 미쳐버린 보이체크를 끝내 끌어안았던 마리의 사랑과도 같은 것들. 5월의 봄날, 가장 사랑했던 둘의 추억 같은 것들.


영원 또한 찰나일 뿐이지만, 반대로 찰나 또한 영원이 될 수 있었다. 어떤 순간의 기억은 누군가에게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되었다. 보이체크와 마리, 어두웠던 이 시대의 사랑 이야기는 그 순간의 찰나였을 뿐이지만 둘의 비극적이고 아름다웠던 사랑은 이야기가 되어 계속 사람들에게 읽히고 또 읽힌다. 둘의 사랑이야기는 무한히 반복된다. 반복되는 사랑, 반복되는 비극, 반복되는 슬픔. 그렇게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다.


웃고 울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용서하며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의 삶은 누군가에게 또다른 이야기이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갈수록 마리는 보이체크에게 ‘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라며 후회했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와의 사랑이 자신의 공허했던 삶을 충만하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와 함께 울고 웃으며, 때론 서로를 망쳐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그와 함께하는 삶이었다는 걸, 그와 함께 꽃피운 씨앗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는 걸. 자신의 삶을 다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삶은 영원할 수 없기에 소중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영원할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영원한 것이었다.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불렀던 5월을 보이체크와 마리 둘 다 영원히 잊지 못했듯이.


언젠가 다시 피어날 5월의 봄날을 기다리고 견뎌가며 오늘도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

 

 

[박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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