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이 있어서 서울로 왔다. 서울은 너무 멀어, 지방에서 서울까지의 네시간 남짓이 큰 나라에서 움직이는 열댓시간보다 더 견디기 힘든것만 같다. 서울에서 뭘 하려고 했더라,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몸이 느리고 지친 파도처럼 오르고 내리다가 끝내 솟구치지 못하고 뚝뚝 바닥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파도가 몸을 때린다. 철썩거림에 몸이 뒤로 내밀린다. 그래도 계단을 오른다. 얼굴들이 밀려왔다가 훌레훌레 파도에 쓸려가고 모래알갱이처럼 손가락 사이를 쉬- 빠져나간다. 손가락 사이에는 곱지 않은 차가운 모래 알갱이의 부재만이 선선히 남아있다.
대학을 지방에서 나온터라, 서울에서 만나는 친구들 중에도 비서울권 출신들이 꽤 많다. 출신지는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과테말라 등 다양한데 서울에 대한 생각은 비슷하다. 또는 나는 우리의 생각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서울은 우리 테이블의 떨어지지 않는 안주. 서울은 어딘가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데가 있다고, 혹은 서울은 내 정신의 코를 베어가는 큰 물결 같다고, 서울은 벽돌주택집과 원룸, 낡은 아파트가 우연히 묶인 팀처럼 하나 -번외로 벽돌주택집, 소품샵, 카페의 팀도 있다- 누군가의 확실한 세계를 이루고, 서울의 사람들은 계속 걷고. 손을 덜덜 떠며 걷는 할아버지도, 잘 차려입은 여자 두명들도, 짧은 피코트의 어깨가 구부정한 할머니들도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러다 우리 다같이 함께 살면 얼마나 좋을지로 이야기는 되돌아간다.
향기 좋은 서울의 곳은 다 비슷한 냄새가 난다, 순진한 도브 냄새 같은 것은 오히려 찾아보기가 어렵다. 모두의 순진함은 고도의 세련됨에 가려졌고 나는 그 세련된 냄새가 구리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지하철에서 종이 쪼가리 하나를 받았다. 워낙 많으니 그러려니, 그래도 눈에 넣어본다. 조금 읽다가 잠시 접어두고 지도 앱을 켜서 가는 방향이 맞는지 확인했다. 어려운 형편을 호소하는 내용의 종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계좌번호고 아무것도 없어서 ‘아저씨, 계좌번호를 넣으세요’ 말해드릴까 잠깐 생각하다가 핸드폰으로 계속 지도앱을 보는데 아저씨가 별안간 와서는 내것을 비롯한 모두의 종이를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는 칸의 문으로 가더니 벽에 기대 팔에 얼굴을 묻고 울먹이시며 읊조린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못사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흐느낌에 울분이 느껴져서 서울에 대한 조립되지 않는 생각들이 못내 불편해졌고 종일 마음에 걸리는 턱이 하나 생겼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죽을 지경인데 꿈쩍도 안하고…’
‘사람’ ‘돈’, ‘죽을지경’, ‘꿈쩍’, ‘사람’, ‘돈’, ‘죽’, ‘지’, ‘꿈’, ‘쩍’, ‘사’, ‘람’...
똑같은 내용을 서울사람은 아니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 다들 비슷한 반응, 마음 한켠의 불신과 그래도 불편한. 친구 I 는 난방비 이야기를 하며 난방비를 더 내고도 단열이 잘 되지 않아 추움이 가시지 않는다는 쪽방촌 이야기를 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해? 난 참고로 '주먹은 뭘 치라고 있는거지?' 생각했어. 서울 사람들은 뭘 보고 살아요? 이렇게 매끈거리는 것과 거칠거리는 것이 공존하는데 대체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사는건지, 아득한 간극에 어떻게 발이 빠지지 않는 것이며, 합치될 수 없는 이미지들을 보며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건지. 그래서 그다지도 걷는건지.
다음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날밤 술자리에서 얘기했던 지하철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러 사진을 캡쳐해서 보내줬는데 정황이 한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아저씨는 지하철을 배경으로 연기를 하는 배우. 종이 쪼가리의 내용,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식의 행동 묘사까지 똑같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급기야 소위 말하는 ‘앵벌이’들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 금시계를 차고 나온다는 내용의 블로그 등등. 서울 사람들의 경계심과 세련됨이 단박에 이해가 됐다. 그래, 그들도 처음에는 순박했겠지, 내가 지금 보이는 것은 뉴비의 같잖은 정의로움과 동정심.
그래도 한켠으로는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왜 있잖아, 우울증에 걸리면 몸을 아예 못 움직일정도로 무력해지는 것처럼.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생산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돈을 벌지 않고 구걸하는 꼴을 못 본다. 괜히 일하는 사람들의 돈이 거기로 간다고, 그래서 의심없이 당연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만, 사람은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가타부타 말하기 어렵다’고 나는 우선 적어 본다. 이야기를 듣고나서 말은 더 어려워지겠지만. ‘아이 속았네’, ‘개새끼, 선량한 시민을 등쳐먹으려고’ 따위를 말함으로서 얻는 감정의 해소따위는 없다. 그 사람의 미지의 이야기, 그리고 개인보다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인생, 하나하나 들여다보자면 단일한 주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서 얻는 해소감 내지는 ‘잘 정리됐음, 문제해결’ 따위의 감정이 우리네 감정의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려나.
사는게 그냥 사는거지 뭐, 뭐그렇게 말이 많아. 잘났다 그래, 그래서 넌 지금 앉아서 뭘 하는지? 그래도 말해야지, 잊어버리지 않고 무뎌지지 않기 위해서. 너에게는 고통을 멀리서 관조하며 함께하고 있다는 착각이 스미고 있다, 너의 안일한 동정에 대한 수치심을 합리화 하는건 아니야? 한번 서울의 아침을 겪어보시지 그래, 사람을 안 싫어하고 배기는지, 이렇게까지 들여다볼것을 회사원들에게 요구할 수 있어? 퇴근하고 오면 자유시간은 몇시간 남짓, 피로에 무언가를 더 얹어볼 수 있냐는 말이다, 숨통을 좀 튀워주라고. 그냥 유쾌하게 사는거지 뭐.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판타지인 이유는 자아와 초자아 사이, 본능과 도덕 사이에서 인간간의 관계에 관한한 항상 초자아를 택하기 때문이다. 배신과 수모를 당하고서도.
Saul Leiter, "T", 1950
중남미권에서 살다온 친구 S는 서울에 정착한지 1년이 지났다. 친구는 최근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도 완등을 응원하는 클라이밍의 문화가 좋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런걸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며, 그 문화가 클라이밍장의 좁은 문을 나가 우리 사회의 주류 문화로 정착 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탄식했다. 나는 친구의 말에 동감했다. 누군가 클라이밍에는 자리뺏기가 없지만 현실에서 인간들은 같은 자리를 놓고 싸우지 않냐며 반문할수도 있겠다만 글쎄, 안해보면 모르는거 아니야? 경쟁-타인을 적으로 놓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상정하고 살아가는 삶의 행복감과 그러한 현실의 한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완등을 응원하는 삶의 행복감 중 어떤게 더 현실적으로 행복한지, 안해봐서 모른다고.
카페에서 사람들은 가끔 가다 보이는 아기를 다같이 관찰하며 웃어보였고, 내 친구는 길거리에 강아지만 봐도 울컥한다고했다. 요즘 사람들은 동물을 무지하게 좋아해. 사람들은 순진하게 애정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것처럼 보인다.
오늘은 모두가 다 가련했다. 서울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먼지 알레르기가 도진다. 엣취, 저기요, 저기는 들어가자마자 세련된 냄새가 풍길 것이고, 저기, 저기는 등이 구부정한 사람이 살 것이고, 저기, 저 대리석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그래도 떠벌 떠벌 이야기하는 날것이 좋아. 서울에게도, 서울 사람에게도 여러 냄새가 난다. 어떻게 조립할지 모를 서울이라는 조각들을 손에 쥐고, 나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