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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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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1. 비틀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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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도대체 몇 번을 뒤뚱거렸는지 모르겠다. 정말 많이도 비틀거렸다. (삐끗) 새로 오신 후임자 분과 회의실을 오갈 때도, 잠시 산책하듯 나무 사이를 둘러볼 때도, 보도를 걸을 때도, 복도를 지날 때도, 인수인계 자료를 손에 쥐고 설명할 때도 그랬다.


땅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높은 굽 슬리퍼를 신었더니, 무게중심이 조금만 어긋나도 금방 한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이 공간에 먼저 익숙해진 사람으로서 능숙하게 안내했어야 했는데, 자꾸만 기우뚱하고 발을 삐끗이는 모습이라니. (어이쿠!)


혼자 있을 때는 늘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옆 사람 눈에는 그 ‘살짝’이 종이 한 장 팔랑거리듯 옆으로 기울고 앞으로 쏠리는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운동 부족) 그럼에도 이 신발은 포기하지 못하는 걸 보면, 나도 참 고집스럽다.


회사 3층 출입구를 지나 나오면 차와 사람이 함께 지나는 길이 하나 있다. 우리는 나무가 심어진 안전한 쪽을 따라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차 한 대가 다가왔다. 그 순간 후임자께서 내 등 뒤에 살며시 손을 얹고 안쪽으로 부드럽게 이끌어주셨다. 갑자기 닿아온 다정한 배려에, 순식간에 당황했다.


내가 더 챙겨드려야 하는데, 도리어 챙김을 받고 있다니. 이건 내 계획에 없던 일 아닌가. 내가 더 잘 안내해드려야 하는데~~~ (안돼~~)


바로 전날, 월요일엔 무엇을 했더라? 또래 선생님들과 퇴사 파티를 했다. 비바람을 ‘꺄악’거리며 뚫고 가서 맛있는 회덮밥도 먹고, 뜨끈한 튀김과 막걸리로 2차까지 이어갔다. 얼마나 추운 날이던지, 세 사람 다 밖에서 몸을 바들바들 떨다 결국 서로 팔짱을 끼고 삼총사처럼 체온을 나눴다. 아, 따뜻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언제인가? 10월 15일 수요일, 새벽 12시 41분. 평소 같았으면 이미 기절했을 시각이지만, 오늘 아니면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아 기모 후드티를 걸친 채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집에 가면 바로 잠들 걸 알기에 퇴근하자마자 카페에서 끝내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급한 일만 처리했고 이 글은 첫 줄에 적어둔 ‘오늘’조차 이어 쓰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는 분명한데,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7월부터 정기적으로 글을 쓰며 ‘결국엔 끝내긴 한다’는 걸 알지만, 그 시작에 도달하기까지의 나는 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빨리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미루는, 참 어린아이 같다.


결국 할 거라면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는 없었나. 그런 부질없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은 지연이 꽤 짧게 끝난 셈이다. 글을 쓰려고 야식을 든든히 먹었는데, 그 에너지를 잠에 퍼붓지 않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아, 장한데?)

 

 


2. 나의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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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 글을 쓰고자 했을까. 아마도 오늘에만 쓸 수 있는 글을 붙잡기 위해서겠지. 내일은 여러모로 ‘안녕’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고, 끝나고 나면 릴리와 매콤칼칼한 파티를 하기로 했으니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잠이 눈 위에 살짝—사실은 거의 전면에—덮인 이 순간이야말로 가장 적기다.


10월 달력을 봐 보시라. 15일은 딱 정중앙에 있다. 나도 거기 있고, 아마 당신도 그날을 오늘로 보냈을 것이다. 10월은 이상하게도 눈에 확 걸리면서, 늘 유독 바빴다. 내 나이테 기준으로는 이 계절 한가운데엔 언제나 시험 기간이 있었다. 그 시절이 아직도 길게 남아 있다.


특히 이 달엔 내 생일이 있는데, 유독 그날은 시험이 있거나 시험 기간 한복판에 끼어 있었다. 그래도 놀겠다고, 당일 새벽 동네 친구들을 잠깐 만나고 돌아와서 미친 듯이 교양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한 번의 기억이 유독 강렬하다.)


나의 10월을 정리하면 늘 같았다. 학생일 때는 시험에 치여 정신이 없었고, 졸업 후에는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느라 바빴다. 작년엔 뭐 했더라. 사진첩을 뒤져보니 친구와 처음 대림동을 가 보고, 부모님과 밥도 먹고, 혼자 산책도 몇 번 했다. 경조사도 다니고, 지금보다 훨씬 소소하게 클래식을 좋아하고 있었다—훨씬!


그렇다면 올해는 어떤가. 여태 보낸 가을 중 가장 생소한 일이 많은 10월임은 분명하다. 이번 주만 해도 일정이 연달아 이어진다. 이게 되나 싶지만, 9월엔 이보다 더한 일정을 보냈으니 이젠 낯설지도 않다. 보통 ‘퇴사’라는 큰일 뒤에는 여유와 쉼이 찾아오는 게 순서일 텐데, 왜 더 바빠지고 있는가. (퇴사를 잘 마치고 온 15일 오후에도 온종일 인사를 나눈 뒤, 지금 카페에 앉아 이 글을 토닥이고 있다.)


이렇게나 ‘글’과 ‘글’과 글 사이에서 열심히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다. 다음 글을 쓰려면 반드시 오늘 몫의 글을 남겨야 한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참으로 생소하다. 이전의 나라면 당장 써야 할 글이 타인에게 보여줄 ‘소개서’나 ‘이력서’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 도대체 뭘 쓰고 있는가. (뭐긴, 바로 오늘이지.)


모든 걸 다 챙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은 가장 중점적인 화두 외에는 잘 안고 가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챙겨갈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일전에 친구가 말하기를, 너는 세상을 왕따시키면서 노는 것 같다고. 나도 생각해보면 약간 그런 면이 없진 않다.


그런데도, 한동안 바라오던 일이라 멈출 수는 없다. 오늘 컬처리스트 지원서를 쓰며 하나를 깨달았다.


아, 이미 꿈을 이뤘구나? 내 꿈은 생각보다 거창하지도, 별것도 아니었다. ‘늘 아름다운 것들과 함께 있고 싶다.’ 그게 내 오랜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 봐라. 시간만 되면 형용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예쁜 것들과 오래 놀고 있지 않은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연 시점이 대충 5~6월이었고,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게 7월, 멈출 수 없게 된 게 8월과 9월, 그리고 지금이다. 대체 어디서 이만큼의 원동력이 생겼나 했더니, 아마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꿈을 이룬 셈이다. 뭐지?


그 흐름 속에서 내가 택한 챕터 하나가 종결됐다.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마음이 어렴풋이 있었다. 큰 꿈이라기보다, 그냥 스트레스 덜 받고 가족, 친구들과 잘 지내는 삶 정도를 바랐다.


약간의 내적 긴장감은 있었지만 압박감은 없었다. 어차피 결국은 어딘가엔 자리 잡게 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이대로 쭉 이 직업과 관련된 라인을 타고 정착하겠구나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내내 꿈꿨던 직무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뜻밖의 관심사가 생기면서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원래 계획에 없던 재미난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아, 도대체 어디로 향하려는 걸까?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늘 단선을 택해왔는데, 생각 없이 벌인 일들이 길의 방향성을 제멋대로 넓혀놓았다. 이제는 나조차 어디로 흐를지 예상할 수 없다. 사실, 예상해보려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

 

 

 

3. 포항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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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만 봐도 그렇다. 15일이 된 새벽, 나는 퇴사 다음 날인 16일에 포항에 있을 예정이다. 갑자기 웬 포항인가? 최애가 포항에서 협연을 하는데, 하필이면 내가 클래식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게 만든 바로 그 곡,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한단다. (이걸 어떻게 안 가겠나.)


포항에서 공연이 열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협연곡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포항행을 정해둔 내가 신기했다. (예감했었나 봐.)


얼마 전엔 함안도 다녀오지 않았나. 그 여파도 분명히 있다. 편도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곳도 다녀왔는데, 두 시간 반? 그 정도면 옆동네 아닌가. (아니다)


게다가 사람에겐 직감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포항에서 협연이 열린다는 것만 알았을 뿐, 어떤 레퍼토리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 공연을 놓치면 크게 후회할 것이다’라는 예감이 강하게 있었다. 그러니 KTX를 끊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결과를 보시라.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아트인사이트에 버킷리스트 글을 올리고 사흘쯤 지났을까, 멘델스존이 내 앞에 두둥—하고 나타났다. 내가 이걸 언제, 어떻게 예상이나 했겠는가. 감히?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모르다가도 더 모를 일이다. 일정이 끝나면 집에만 가고, 카페도 굳이 들르지 않고, 정적인 삶을 살던 내가 클래식 때문에 여행을 간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떠날 확실한 목적이 생기니, 갈 수만 있다면 향함을 결정하는 데 이렇게까지 서슴없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서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이참에 ‘떠나본다’는 즐거움도 있다. 누가 가자고 붙들지 않으면 평생 가지 않았을 장소일 텐데. 진짜 실감이 안 난다. 또 여행이라니!


이번 공연은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뿐 아니라, 하차투리안의 〈가면무도회 모음곡〉 중 왈츠, 이지수의 〈아리랑 랩소디〉, 그리고 멘델스존 교향곡 4번 ‘이탈리안’까지 이어진다. 협주곡을 제외하면 모두 처음 듣는 곡들이다. 기차 안에서 예습을 부지런히 할 수 있기를.


(엇, 이 글을 쓰는 지금은 15일 마지막 출근길 지하철 안. 15일, 오전 8시 12분. 평소보다 늦게 탔는데, 앞사람이 예상치 못한 역에서 일찍 내리셨다. 지하철도 선물을 주네.)


레퍼토리를 훑어보니, 포항과 서초의 자매결연을 축하하기엔 딱인 가을 레퍼토리다. 이 알다가도 모를 계절을 낙엽빛으로 무르익게 할 곡들이 가득하다. 이국적인 풍경과 설레는 낯섦이 그날 저녁 7시 30분에 잔뜩 펼쳐질 것이다.


나는 참 운이 좋다. 곡 선택이 워낙 탁월한데, 이런 공연 좌석—3열, 으하하—을 선점하다니. 진짜 운이 좋다니까. 궁금하다. 16일의 멘델스존은 어떤 형상일까? 어디, 한번 가볍게 상상이나 해볼까?


 

거닐까, 다정하려나. 의외로 시니컬할지도. 재빠를까, 단숨일까, 긴 호흡일까. 회오리는 얼마나 클까. 속도는 어떨까. 어디에 마음을 담게 될까. 어디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려나. 

 

나 울었니. 어떤 풍경일까. 무슨 색일까. 빛은 어떻게 맺힐까. 머물러 있다면, 어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띌까. 익숙한 소리로 시작을 느낄까. 


내가 알던 것보다 더 내려앉은 소리일까. 7월 11일의 느낌일까, 9월 25일의 마음일까. 분절일까, 이어짐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미소가 가득할까. 차가운 서정성이 전면을 채우려나. 무지개가 있어도 좋겠다. 

 

웃어주려나, 달려가려나. 깊게 울릴까, 넓게 파동칠까. 오케스트라는 어떤 이미지로 협연자와 소통할까. 카덴차는 어땠어. 그는 얼마나 신나 있을까. 행복할까.


치정과 낭만을 어떻게 섞어냈을까. 내가 섞어낼 물방울들은 무엇일까. 지휘자와 임동민, 그리고 서초교향악단은 어떤 멘델스존을 그려낼까. 에잇, 그냥 맡겨버리자!

 

 

공연은 잠시 뒤로 남겨두고, 지나온 1년 남짓의 시간을 떠올려보자. 짧은 3일 동안 참 많은 마음의 선물들이 쏟아져 당황스럽지 않았던가.

 

연휴가 막 끝나 다들 집에 가기도 바쁜 피곤한 날이었는데도 함께 저녁을 나눠준 사람들. 굳이 한 번씩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준 분들. 이제는 만날 사람들과 다음을 기약하게까지 되었으니.


나는 나를 아끼면서도 타인의 인정을 크게 바라진 않는다. 그럼에도 다정한 목소리 하나에는 마음이 흔들린다. 하물며 소리라면, 또 얼마나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길까. 뭐 하나 쉽게 포기하지 못하니 걱정이다. 그래도 보고 싶은 것만큼은 집념을 가지고 두 눈에 담아내니, 예전보다는 덜 걱정된다.


그래도 너무 감정적이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잘 귀담아 듣기를. 보고 싶은 장면을 마음껏 음미하기를. 충만히 기뻐하기를. 순간을 즐기기를. 부르르 행복해하기를.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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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시점, 오전 9시! 7층에서 내가 좋아하는 조그마한 무지개를 만났다. 날씨 좋은 날이면 햇살과 유리가 힘을 합쳐 흰 벽에 긴 무지개를 몇 개씩 그려놓곤 했다. 

 

이번 주엔 내내 날이 흐려 못 보겠구나 했는데, 오늘 딱—기다렸다는 듯 동그랗게 나를 맞았다. 음, 이곳에서 바란 일은 다 이뤘다. 이제는 안녕이다. 안녕!

 

…을 하려고 했는데, 인사드리러 내려간 층에서


“이대로 간다고?”

 

아이스크림을 주문할 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셨다.


로그아웃한 컴퓨터를 다시 켜고

녹차빙수를 기다리며

이 글을 토닥이는 중… (토닥토닥)

이별은 잠시 말차 뒤로 유예 중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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