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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1934)

 

화자는 남쪽으로 창을 낸다. 밭을 갈고 김을 매고, 익은 강냉이는 함께 나누고, 도시의 구름은 외면한다. 왜 사느냐는 물음에는 웃음으로 답한다. 이 웃음은 답의 회피가 아니라 답을 풀어내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살아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살아가는 일을 그대로 놓아두는 태도. 시의 핵심은 창과 웃음이라는 두 가지 몸짓에 있다. 창은 안과 밖을 잇고, 웃음은 안쪽을 굳이 펼쳐 보이지 않는다. 안쪽이 평화롭다는 사실 자체가 답이 된다.

 

이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 연극 <정희>가 2026년 3월 말 예스24아트원 3관에서 막을 올렸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조연으로 머물렀던 정희를 무대 중심으로 끌어낸 스핀오프다. 원작에서 정희는 후계동 골목 술집 '정희네'를 운영하는 인물이었다. 주인공들이 모여 안부를 나누는 배경, 그 공간을 지키는 사람. 연극은 그 배경을 전면으로 끌어온다. 공간의 주인이 곧 이야기의 주인이 된다. 과연 '정희네'의 창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 꺼진 불을 다시 켠다는 건


 

무대는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술집이다. 수도가 새고 벽에 금이 가 있다. 소품은 버려진 것 없이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다. 관객이 객석에서 처음 마주하는 풍경은 이미 누군가가 살아왔다는 증거다. 대사가 나오기 전에 공간이 먼저 말을 건넨다.


정희는 할머니를 여읜 뒤 오랜 친구 동훈과 상원만 곁에 두었다. 너무 작은 가족은 관계를 절대적으로 소중하게 만든다. 상원이 연인이 되었고, 상원이 떠나갔다. 속세를 버리고 절로 들어간 상원의 자리는 메워지지 않는다. 술과 사람을 아무리 불러도 그 빈 구멍은 채워지지 않는다. 정희는 밤마다 가게의 불을 끄고 퇴근길을 되돌아 걷는다. 불을 다시 켜면 20년째 변함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 정희를 기다린다. 빈 공간을 마주하는 일이 정희의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이 된다.


여기서 정희는 '귀찮다'를 반복한다. 뻔한 일들을 되풀이하며 사람으로 사는 일이 귀찮다고 중얼거리며 잠에 든다. 관객이 당혹감을 느끼는 대목이다. 인생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 그러나 정희의 귀찮음은 삶을 등지는 몸짓이 아니다. 귀찮다고 내뱉으면서도 매일 불을 켜는 행위가 정희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다. 귀찮음은 삶을 붙잡으려는 간절함의 다른 얼굴이다.

 

 

 

# 정적이 전하는 또다른 이야기


 

〈정희〉의 연기는 낮고 단단하다. 울거나 설명하는 연기를 넘어 참는 연기가 중심에 놓인다. 대사가 끝난 뒤 정적이 대사보다 길게 남는다. 이 정적이 공연이 의도한 미학의 핵심이다. 관객은 인물의 내면을 정적 속에서 읽도록 설계된 객석에 앉아 있다.


캐스팅 구조는 시간의 층위를 몸으로 구현한다. 한 배우가 두 시점을 동시에 연기한다. 지안과 어린 정희를 한 배우가 맡고, 가람과 어린 동훈을 한 배우가 맡는다. 여기서 캐스팅은 단순히 배우 수를 줄이는 문제가 아니다. 어린 정희를 연기한 배우가 자라나 지안으로 다시 등장하는 구조는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다른 얼굴로 도착한다는 사실을 무대 위에서 물리적으로 증명한다. 시간을 건너온 인물이 같은 몸으로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희의 내면에 흐르는 시간의 연속성을 시각화하는 장치다. 어린 정희가 지안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난다면, 정희가 끝내 닿을 곳이 평안이라는 이름의 안식임을 미리 일러주는 셈이다. 캐스팅이 서사를 앞선다.


대사 뒤의 정적은 대사가 품고 있던 감정이 객석으로 건너가는 통로다. 참는 연기는 감정을 억누르는 기술이 아니다. 감정이 새어나오는 속도를 조절하는 기예다. 관객은 그 속도에 맞춰 자신의 기억을 들여놓는다. 연극이 관객과 함께 만드는 시간은 대사 안에 머물지 않고 대사 사이로 퍼진다. 〈정희〉는 그 사이를 최대한 넓게 연다. 감정 기복이 큰 인물의 표면은 관객과 거리를 만든다. 〈정희〉는 깊이를 판다. 깊이 파인 자리에서 관객 자신의 목소리가 울린다. 배우가 감정을 터뜨리지 않고 참아낼 때 관객은 그 빈자리에 자신의 질문을 넣어둘 공간을 얻는다. 연극이 건네는 것이 대사가 아니라 정적이라는 사실은, 관객에게 완성된 답을 주는 대신 스스로 물을 자리를 내준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대 위에서 정희가 빈 공간을 향한 창을 여는 행위와 정확히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


공연은 무너진 벽을 마주한 관객에게 무엇을 고치고 싶은지 묻는다. 이 질문이 관객을 정희의 자리로 끌어당긴다. 무대 위의 벽이 객석 앞의 벽으로 옮겨온다. 각자의 균열을 마주하게 하는 힘이 〈정희〉의 연기를 낮게 유지시킨다.

 

 

 

# 비워진 자리에 새 창을 내고


 

정희는 가게 수리를 결심한다. 낡은 건물의 물리적 노후가 그 결심의 계기가 된다. 젊은 목수 가람이 찾아온다. 정희가 사람을 맞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나 음료를 대접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의 정희와 사람을 대할 때의 정희는 다른 얼굴을 보인다. 명랑한 태도는 마음이 아직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손님을 들이는 일은 아직 세계와 연결되고 싶다는 뜻이다.


가람과 함께하는 며칠은 망치질로 채워진다. 표면의 필요는 건물의 금을 메우는 일이다. 안쪽의 필요는 마음에 난 구멍을 향하는 일이다. 두 층위가 나란히 진행된다. 벽을 고치는 일과 마음을 고치는 일은 별개로 떨어지지 않는다. 무대에서 망치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는 단순한 효과음이 아니라 리듬이다. 망치가 벽을 두드릴 때마다 정희의 안쪽에 있던 무엇도 함께 흔들린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망치질은 건물의 균열을 메우는 동시에, 정희가 20년 동안 외면해온 빈자리를 향해 열려 있는 문을 만든다.


〈정희〉는 이 지점에서 비유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다면 벽 전체를 허물어 창을 내면 된다. 구멍을 메우려는 시도는 구멍의 존재를 전제로 삼는다. 벽을 허물면 구멍은 사라진다. 구멍이 있던 자리에 창이 생긴다. 창은 바깥을 향해 열린다. 정희는 이제 상원이 떠난 자리를 메우려 하지 않는다. 그 자리 전체를 향해 창을 연다. 상원이 남긴 고통 바깥의 것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등장인물의 이름은 이 변형의 방향을 가리킨다. 가람은 강처럼 흐르고, 지안은 평안에 이른다. 정희는 평화롭고 기쁜 이름을 얻는다. 이름대로 살고, 어떤 날은 이름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 자유. 〈정희〉가 제시하는 치유의 최종 지점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그 상태를 건너뛸 수 있는 여유다. 고친 사실조차 잊을 수 있는 일상.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낡은 바닥을 비출 때, 정희네는 상처의 증거를 넘어 삶의 흔적이 된다.

 

 

 

# 닫으며


 

드라마에서 정희는 타인의 서사를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연극에서 정희는 자신의 서사를 쓰는 인물이 된다. 배경에서 전경으로, 조연에서 주체로. 〈정희〉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것은 한 인물이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자, 남겨진 자가 빈 자리를 빈 자리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100분 동안 무대는 과장 없이 놓인 소품과 배우의 참는 연기로 채워진다. 수도가 새고 벽이 갈라지는 순간마다 정희의 안쪽에서도 균열이 함께 벌어지고, 망치 소리는 관객의 귀에 직접 닿는다. 정적 사이로 감정이 흐르고, 정희가 입을 연 순간에도 정희는 여전히 침묵한다. 한 배우가 어린 정희에서 지안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시간을 건너온 상처의 경로를 몸으로 읽는다.


연극 〈정희〉는 완성된 치유를 보여주지 않는다. 치유 중인 상태를 보여준다. 구멍이 완전히 메워지지 않은 채로 창이 열려 있는 상태. 그 상태에서 정희는 매일 불을 켠다. 내일도 불을 켤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불을 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벽을 허물어 창을 낸 사람은 내일의 빛도 받아들일 것이다. 비워진 자리에서 이름이 피어오르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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