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설거지나 집안일을 하며 매번 유튜브나 영화를 본다. 보는 것은 그 때 그 때 다른데 집안일을 하며 보기에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동물의 왕국 같은 동물 다큐멘터리이다.
가장 최근에는 설거지를 하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티벳 여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봤다. 몸집에 비해 큰 머리가 사뭇 엉성해 보이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그릇을 물로 헹구며 티벳 여우 가족의 안위를 걱정한다. ‘사냥이 잘 되어야 할 텐데. 드디어 토끼가 잡혔구나. 입에 토끼를 네마리나 물고 가네. 저 스라소니가 티벳여우를 발견하면 안될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보는 와중에 영상은 끝나고 설거지는 끝으로 향한다. 탈탈 물기를 턴다. 매번 이런 식이다. 티벳여우를 볼 때는 티벳여우의 생존에 마음을 졸이고 표범을 볼 때는 표범의 그것에, 생쥐를 볼 때면 생쥐의 그것에. 심지어 포유류의 관점에서 그다지 귀엽지 않은 생물의 생존기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존재를 알면서도 매번 다른 종, 이해관계가 대치되는 각 생물들의 생존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영상이 각 생물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야기에 이입하는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티베트여우 4남매의 슬기로운 초원 생활"(2020), 내셔널 지오그래픽, 유튜브
이야기에 이입하는 것에 관련된 또 다른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몇년 전 개인적인 일로 상당히 지쳐있던 때가 있었다. 하루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적잖이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꽤나 맛있는 음식을 저녁으로 차렸던 것 같고 기분을 환기시키고자 넷플릭스에 있던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를 봤다. “판타스틱 Mr. 폭스”는 말그대로, 시작과 끝이 완벽하게 설정되어 있는 하나의 이야기였다. 어떤 멋진 여우 한마리, “Mr. 폭스”가 집을 구하고 인간을 골탕 먹이기까지 하는 유쾌한 이야기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는 식의 엔딩을 맞는다.
이 사소한 저녁에 사소한 영화를 본 에피소드가 기억에 깊게 남아 있는 까닭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느낀 감각 때문이었다. 그 감각은 일종의 해방감이었고 이 저녁은 이전에 들었지만 영 가닥을 못 잡았던 “이야기의 힘”이라는 말을 몸소 체험한 저녁이었다. 이후 “판타스틱 Mr. 폭스”의 이야기 효과로 내가 준비하던 일 또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식으로 진행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이야기에 한껏 몰입한 경험이 내 일상에 바깥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 바깥으로 큰 위안을 얻었다.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2009) 중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내게 일으킨 효과를 생각해보고 싶다. 먼저 “판타스틱 Mr. 폭스”라는 영화가 가지는 특성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앞은 물론(갑자기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고 그 지점 전의 설명을 곁들이진 않는다는 측면에서) 뒤가 꽉 닫힌, 흔히 말하는 “꽉 닫힌 해피엔딩”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추측컨대 변수로 가득한 삶과 달리 도장이 꽝 찍힌 해피엔딩 이야기는 불변한다. 그 여우가 어떻게 되었는지 마음을 졸이며 걱정할 필요도 없다. 확실한 끝. 가능성이 소멸된, “좋은 쪽으로의 세계”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 종교에서 천당, 천국이 영원함의 개념을 동반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큰 위안을 주는 것은 잠깐 좋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영영 좋고 나빠질 가능성이 없는 그런 세계에 대한 생각이니까. 부정할 수 없이, 나빠질 것 없이 좋게 완결된 이야기는 위안을 제공한다.
한편 “판타스틱 Mr. 폭스”를 다 보고 느낀 감각이 해방감이라면 그 해방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 그 해방은 과학적인 사실로서의 사실들이 존재하는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다. “판타스틱 Mr. 폭스”같은 애니메이션 장르에서는 더욱더 이런 특성이 빛을 발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이 아니더라도, 영화가 아니더라도, 심지어 현실에 기반한 다큐멘터리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지는 못한다. 모든 이야기는 창안된 혹은 재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재구성된 세계로서의 이야기들은 사회의 주류적인 “상식”이나 가르침, 심지어는 현실에 일어난 사태에 대한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동시에 현실로 인식하고 있는 ‘현실’도 무수한 이야기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상과 인식은, 현실을 회피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가치 평가를 가능하게 하며 이는 오히려 더욱 냉철한 현실직시에 기여한다.
영화 "판타스틱 Mr. 폭스"(2009) 중
또한 이야기가 주는 해방감은 자아에 집중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감이다. 서사가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보고 듣는 것은 자아가 잠시 비워지는 경험을 제공한다. 이야기들은 인간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고, 몰입한다는 것은 무아, 스스로가 없어지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에 진정으로 짜릿함을 느끼는 때는 역설적으로 스스로가 없어지는 때가 아닌가? 우정이 정말 즐거워질 때는 각각 ‘내’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에 집중할 때이고 무언가를 순수하게 즐길 때는 ‘나’의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을 때 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겪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판타스틱 Mr. 폭스”를 봐’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가 주는 어감때문에 다분히 오락적으로 들리는 문장이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적인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없거나 이런 도움 너머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를 나누는 것’ 혹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최근 몇 주를 앓았지만 개인 사정으로 뾰족한 치료를 받을 수 없어서 힘들어하던 가족 한명에게 (다짜고짜) “판타스틱 Mr. 폭스”를 보라고 했다. 가족이라 가능한 표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 누군가의 이야기, 더 좋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듣는 ‘나’는 미묘한 변화를 겪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변화가, 듣는 이를 자유롭게 만드는, 좋은 쪽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어서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에 대해 적어보겠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