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대 위에서 완성된 그저 짧은 이야기 -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글 입력 2023.02.0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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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이야기는 어젯밤 스친 꿈같은 그저 짧은 이야기"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 篇> 공연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몸을 바짝 당겨 관련 정보를 읽어볼 만큼 관심이 갔다.


판소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지만 처음 관람을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판소리는 '춘향가', '흥보가'처럼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장르라는 생각이 강했다. 이번 공연도 과거의 작품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하지만 '한국의' 고전이 아닌 프랑스의 고전을 각색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이미지가 강한 판소리가 서양의 문학을 어떻게 현대의 시각에서 창작하고 표현해냈을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포스터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를 극대화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한복을 입고 단정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길 것 같은 판소리 공연의 포스터가, 이렇게 거침없고 냉소적인 표정과 편하게 입은 세련된 의상에 부채를 마구잡이로 꽂은 모습이라니. 이런 멋진 분위기를 지닌 인물이 각색·연출·작창·출연하는 공연이라면 처음 보는 판소리 장르라도 용기 내어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최종적으로 봐야겠다는 결심이 든 이유는 단 3일만 공연하는 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좋은 공연이 긴 기간 많은 회차로 관객들을 만나는 것이,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한 제작진과 출연자뿐만 아니라 공연장을 찾는 관객에게도 기쁜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실험적인 성격을 지닌 창작 공연의 경우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관객에게 남기고 잠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단 3일 동안 4회로 진행되는 공연을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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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은 2022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으로 선정된 28개 작품 중 하나로, 판소리 창작을 해온 박인혜를 중심으로 2021년에 결성된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중 첫 번째 작업이다. 프랑스 대표 작가 '기 드 모파상'의 단편소설인 <보석>, <콧수염>, <비곗덩어리>를 한 무대에서 각기 다른 컨셉의 짧은 1인극으로 구성한 판소리 공연이 90분을 가득 채운다.


공연에 더욱 집중하기 위해 3편의 단편을 미리 텍스트로 읽고 갔는데도 공연을 보는 내내 장면을 어떤 표현과 음악으로 보여주는지 눈과 귀가 바빴다. 운이 좋게도 관람한 회차에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가 예정되어 있어서 바쁘게 따라간 공연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초의 판소리 경험



가장 한국적인 공연 장르임에도 이번 판소리 공연을 보면서 처음 떠올린 생각은 '재즈처럼 자유롭다'라는 것이었다. 판소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스스로도 이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가 싶었지만 실제로 공연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정확하게는 타악을 연주하는 정상화 악사의 추임새가 그랬다. 판소리 창작자 박인혜의 이야기 전달에 흥을 돋우고 더 몰입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자유로운 음악의 상징인 재즈와 달리 미리 약속된 음악 진행이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예견된 추임새였을 것이다. 하지만 판소리 공연을 처음 보는 관객에게는, 정형화된 안정적인 형태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관객에게는 다소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번 쑛스토리가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특유의 감성으로 색다른 시선이 담겨서 느낀 특별함이었다.

 

국악을 잘 알고 친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운 좋게 이런저런 기회로 나름 전통악기 소리를 여럿 들어보았다고 생각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아직 접해보지 못한 한국의 전통악기가 몹시 많다는 것을 이번 쑛스토리 공연을 통해 느꼈다. 양금과 생황은 이름조차 생소했다. 처음 듣는 소리를 내는 두 악기는 밴드에서 활용되는 악기, 서양 클래식 악기에만 익숙했던 관객에게 낯설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했다.


특히 인상 깊게 남은 음악은 <콧수염>에서 이야기의 색이 반전되어 집에서 나는 전나무 향기를 이야기하는 장면과, <비곗덩어리>에서 지친 10명의 사람들이 쉴 곳을 찾았을 때 나는 양배추 수프 냄새를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공연의 각색과 작창을 맡은 박인혜 창작자는 '관객과의 대화' 때 '너무너무 피곤할 때 나는 음식 냄새는 어떻게 느껴질까'와 같은 상상을 구체적으로 하면서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의 상상은 음악적 요소를 통해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따뜻하고 노곤한 느낌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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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가 가진 기본적인 문법의 특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이 모파상의 작품으로 구성됐지만 이야기는 전해지면서 덧붙여지고 각색된다. 박인혜 창작자는 오랜 시간 판소리를 하면서 생긴 습관 중 하나의 장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하나의 키워드에서 키워나가는 걸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원작을 읽고 왔음에도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이야기 진행은 판소리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연행되는 장르라는 것을 몸소 깨닫게 했다.


특히 의성어를 새롭게 떠올려 각색한 점이 그러했다. <보석>에서 랑탱이 적막하고 부끄러운 가운데 가장 깨어있을 감각으로 박인혜 창작자는 청각을 떠올렸다. 자신이 싫어하던 보석을 비싼 값에 팔아서 은근하게 좋아하는 민망한 상황에서 들리는 천 프랑 지폐 세는 '찹찹찹' 소리. 실제 당시 프랑스에서는 지폐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음악적 요소를 살리고 싶어서 종이 지폐로 이야기를 각색했다고 한다. 

 

 

 

함께 만든 공연



처음 포스터를 봤을 때는 중심에 우뚝이 위치한 박인혜 창작자에게만 시선이 꽂혔다. 공연을 보는 중에는 1인극을 배우 혼자 외롭지 않게 채워준 네 명의 악사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연을 위해 힘쓰는 제작진의 존재를 발견했다. 보통 공연 관람할 때와 달리 이번 판소리 쑛스토리에서는 관객의 존재도 공연의 일부로 느껴졌다. 준비된 공연을 숨죽이고 감상하기보다는 가볍게 추임새도 넣으며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었다. 무대에서 확인한 한국적 재즈의 연장선이었다.


냉소적인 미소가 멋진 박인혜 배우는 공연 시작부터 관객에게 친근히 말을 걸어왔다. 물론 공연의 일부로 진행되는 대사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분명 지난날 경험한 다른 대학로 공연들보다 관객과 무대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모습이었다. 일상을 묻는 듯 공연이 시작했고, 주인공이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서간 형식의 이야기 <콧수염>을 들려줄 때는 관객에게 친구 역할을 맡아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1인극임에도 무대 위에서 박인혜 배우는 외롭지 않아 보였다. 네 명의 악사는 각기 다른 악기를 맡아 세 편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 각 편이 지닌 개성을 음악적으로 다르게 표현해주었다. 지금껏 몇몇 1인극을 보았지만 음악으로 함께 하는 동료가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보석>에는 오초롱, 김성근 악사가 피리, 생황, 아쟁으로 함께했고, <콧수염> 공연 때는 심미령 악사가 가야금과 양금으로 함께한 후, 마지막 <비곗덩어리>에는 모든 출연자가 참여했다.



박인혜 창작자가 창작 작업할 때 늘 염두에 두고 조심하는 것이 꽉 채우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전통 음악에 익숙한 출연자가 느끼는 것과 전통 음악이 낯선 다수의 일반 관객이 악기 음색에 대한 정서와 받아들임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배려 덕분에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가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음색을 구별하며 공연에 빠져드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무대를 가득 채우고 빛나게 만들어준 네 사람의 목소리는 '신실위키' 유튜브 채널과 '관객과의 대화'에서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 이야기 <비곗덩어리>에서는 악기뿐만 아니라 목소리로도 참여했다. 말하는 목소리를 오래 듣지는 못했지만 이들은 사실 공연의 음악을 통해 우리와 계속 대화하고 있었다. 박인혜 창작자는 창작 과정에서 작창이 시작된 후 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은 연주자가 직접 편곡하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배우와 악사를 포함한 5명의 출연진 외에도 찢어진 스케치북 모양의 무대를 연출하고, 한국적인 느낌과 19세기 프랑스 느낌을 가미해서 의상을 완성하고, 이야기 전개와 이야기 간의 연결에 도움을 준 조명과 음향을 다루고, 공연 흐름을 주관한 사람들의 존재도 공연 중에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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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뿐이라 아쉬운 작품



공연과 '관객과의 대화'가 모두 끝나고 공연장 밖을 나오니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지나간 이야긴 훌훌 털어버리고 다가올 이야긴 몸을 바짝 당겨 의심 없이 들어야 할 그런 짧은 이야기"라는 말이 없었다면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악사와 배우가 떠난 무대를 떠올리며 왜 6편의 장편소설과 300여 편의 단편소설을 집필한 모파상의 작품을, 그중 왜 이 작품들을 공연했는지 정리했다. 


박인혜 창작자는 공연에 올릴 단편소설을 선정할 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고르기보다는 '그 작품이 좋아서' 선택한 게 더 큰 것 같았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는 굳이 동서양 문학을 나누어 받아들이지 않고, 재밌고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이라면 된다고 이야기했다. 모파상의 이야기를 고른 이유는 사실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공통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기 드 모파상의 작품세계가 판소리가 가진 이야기성과 부합한다고 보았다. 


한 무대에 세 편의 이야기가 올라가기 때문에 작품 선정에 있어서 무게감의 밸런스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야기 소재에 따라 관객이 몰입하는 깊이와 무게가 달라서 어떤 이야기는 조금 가볍고, 어떤 이야기는 많이 무겁게 비중을 두는 노력을 들였다. 고민하며 엄선한 작품들이라 스펙트럼이 넓은 모파상의 작품이지만 공연 시간 동안 본능과 충돌하고 위선을 보여주는 인물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껏 판소리가 주로 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전달했듯이 판소리에 적합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전형적인 질감의 텍스트는 분명 존재한다고 박인혜 창작자는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까지 이어온 작업들과(판소리 <필경사 바틀비>, <판소리 오셀로>, 창극 <미녀와 야수>) 앞으로 이어나갈 '단편소설 시리즈'처럼 비한국적인 이야기를 판소리가 담을 수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박인혜 창작자가 직접 작업하며 그 가능성을 관객과 나누고 있다. 


18세기 프랑스 문학이지만 한국의 창작자가 각색한 대본에 더해진 판소리의 유쾌함 덕분에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모파상의 이야기를 짧은 시간 따라갈 수 있었다. 언젠가 '단편소설 시리즈'의 후속작이 올라온다면 또 한 번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다. 모든 작품에서 전통악기만 써온 박인혜 창작자와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가 다음에는 어떤 문학과 음악으로 관객을 찾을지 기대만 가득하다.

 

 

[정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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