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독백이라 착각하기 쉽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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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은 늘 설렌다. 사람마다 각자 확실히 자신이 좋아하는 색이 있기도 하지만 기분에 따라 좋아하는 색이 결정되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오늘처럼 하늘이 높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는 파란색과 하얀색이 좋다가, 가을에 물든 낙엽을 보면 갈색 계열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짙푸른 여름에는 초록색이 좋고, 바다 위로 지는 해를 보면 주황색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삶의 모든 시점에서 많은 색들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제법 뚜렷한 색 취향이 있던 시기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인 시절. 좋아했던 색은 분명히 노란색이었다. 사실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아있는 그 시절 물건들이나 가족들의 말에 따르면 꽤나 노란색에 빠져 지냈던 것 같다. 놀랍게도 색채심리학에 따르면 노란색이 낙천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와 같은 이미지가 있다.
윤석철 트리오의 2018년 세 번째 정규 앨범 <4월의 D플랫>을 뒤늦게 소유하고 싶었던 이유에도 이런 색에 관한 인상 때문일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순간 이 앨범에 심취했고 하루 종일 수록곡을 반복하여 재생했다. 처음에는 앨범까지 소유할 생각이 없었는데 구매하려고 찾아보니 이미 절판이었다는 소식에 한번 크게 낙망한 후, 중고 서점 한 곳에 중고 제품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아버지와의 저녁 데이트 날이었는데 이 앨범을 위해 무려 한달음에 차로 이동해서 손에 넣었다. 샛노란색의 앨범 재킷. 앨범을 실물로 본 그 순간 어렸을 적 좋아한 노란색이 떠올랐다. 집에 오자마자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들었다. 매일 듣던 곡이 CD의 홈을 따라 데이터가 읽혀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니 깊은 내면부터 가득 채워지는 행복이었다. 어렵게 구한 앨범인 만큼 소중했고, 좋아했던 만큼 자주 찾아들었다. 가사가 없는 연주곡이 대부분이라 가족들도 즐겼다.
스트리밍으로, CD로 앨범을 들으며 나름 모든 수록곡이 익숙해졌을 즈음 2019년 연말 윤석철 트리오의 콘서트 일정이 발표됐다. 날짜가 기말고사와 가까웠지만, 공연 위치와 시간, 티켓 가격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취소표를 통해 무려 1열 중앙 자리를 얻었다. 앨범의 타이틀곡 ‘4월의 D플랫’을 듣고 싶은 마음에서 떠났지만, 라이브로 들으니 다른 곡을 좋아하게 되었다.
'독백이라 착각하기 쉽다'. 벌써 이 곡을 들은 지 5년이 되어가지만, 사실상 압도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귀에 익숙해진 음원과 다른 자유로운 변화가 재즈의 매력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다른 유명한 재즈곡들의 변주와는 달리 윤석철 트리오 음악의 변주는 처음이라 황홀했다. 특히 ‘독백이라 착각하기 쉽다’는 아는 그 소리가 전자 드럼으로 연주하는 것을 깨달으며 시작하는 첫 부분부터 벅차올랐다.
알고 보니 원곡이 따로 있는 곡이었다. 그것도 윤석철 트리오의 곡이다. 2016년 두 번째 EP <자유리듬> 앨범에 동명의 곡(약칭 독백 1)이 존재한다. 원곡은 타악기에서 시작해서 피아노가 등장하는 앨범 <4월의 D플랫> 수록곡(약칭 독백 2)과는 달리 피아노 선율로 시작하는 정반대의 곡 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콘서트에서 라이브로 듣고 매력을 느낀 곡은 '독백 2'였지만, 재밌게도 이 글을 쓰게 한 계기는 '독백 1'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 곡에서 조금의 상상력이 필요한 매력을 발견했다.
'독백 2'를 처음 들었을 때는 사실 제목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해하려는 생각을 굳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음악은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청자는 단지 그 흐름에 귀를 맡기면 되었다. 그렇게만 해도 이 음악이 좋다는 것은 분명하게 전달된다. 대중적인 음악이라는 느낌도 있다. '독백 1'은 다르다. 낯설고 날 것인 듯 가볍지만 위태롭지는 않다. 힘이 있다. 분명 힘이 있는 피아노 소리지만 외롭다.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하지만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아도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은 음정들이다.
'독백 1'은 윤석철 트리오의 곡을 좋아하기 시작한 후 앨범 관계없이 모든 곡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무작위 재생을 하다가 처음 들었다. 같은 제목이지만 다른 곡 구성과 분위기 때문인지 필자가 듣던 리메이크곡의 원곡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채지는 못했다. 동명의 제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독백 1'이 왜 그 제목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사랑을 떠올렸다.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의 사랑 중 떠올린 것은 사랑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짝사랑이다.
짝사랑은 필자가 가장 즐기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의 방식을 지속하는 일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두자. 우선 그렇다. 개인적인 짝사랑 경험에 따르면 아무도 모르게, 어떨 때는 짝사랑의 상대도 모르게, 소중히 마음을 품은 채 그 사람의 주위를 맴돌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 마음을 표현하는 시간이 주가 된다. 어쩌면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시간이다. 하지만 시작한 이상 멈추기는 어렵다.
마음을 표현할 때는 조심스럽지만 용기를 낸 움직임이기에 힘이 느껴진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용감하게 발을 내딛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본인만 알고, 때론 그들 또한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상대가 어떤 마음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하게 보이기도 한다. 나의 선택이 원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두려움. 그렇기에 짝사랑은 쉽지 않고 소중한 경험이다.
'독백 1'에서 피아노 선율은 어떤 망설임도 없이 당차게 들어온다. 듣는 사람은 아무런 준비가 안 된 무방비 상태인데 빠르게 머릿속을 점령한다. 다른 악기가 들어올 공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47초까지 홀로 음악을 끌어나간다. 1분 30초쯤부터 타악기의 소리가 피아노 소리만큼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홀로 음악을 채우고 있지 않지만, 당찬 멜로디는 변치 않는다. 2분이 지나면서 드럼 소리와 어느새 들어온 베이스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함께 연주하는 시간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피아노가 사라진다. 유유히 남은 드럼과 베이스 소리로 곡이 끝난다. 이 곡을 사랑의 관점으로 보면 피아노의 독백인 '짝사랑'에서 시작하여 드럼과 베이스가 함께 연주하는 '사랑'과 그 이후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작년과 올해 동안 열심히 짝사랑했다. 상대는 한 명이기도 단체이기도 했다.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사랑하며 기뻤고 즐거웠지만, 어느 날은 그것이 독백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고 답변이 돌아오지 않는 독백, 혼자의 중얼거림에 그치는 것 같은 날에는 낙심해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 홀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사랑이 늘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지만 결국 다시 짝사랑을 시작하게 한 힘은 상대의 답장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핑!하고 표현했을 때 퐁!하고 반응하는 날이 찾아오면 지난 아픔들이 모두 씻긴 듯 사라지고 행복만이 남는다. 상대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는 기적을 기다리기에 '독백 1'의 피아노처럼 용기내 소리낼 수 있는 것이다. 악기가 피아노 뿐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독백을 계속 이어가다보면 드럼과 베이스와 함께 트리오 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독백이라 착각하기 쉽다'는 이처럼 쿨하게 위로해주는 노래이다. 지금은 독백처럼 느껴지는 작은 용기들이 멋진 곡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혼잣말에 익숙한 사람에게 독백이라 '착각하기' 쉽다는 말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른다. 언젠가 나로 시작한 사랑이 당신을 만나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도 혼자처럼 보이는 외로운 음표들이 트리오 곡의 시작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차게 또 사랑한다.
[정서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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