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를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어렸을 적 장래 희망으로 떠올리던 예술가는 길을 걸으며 그림의 대상을 즐겁게 고민하고 영감이 떠오를 때만 작업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생각했다.
그러나 작년 ‘베르나르 뷔페’의 전시를 보고 매일 정해진 시간만큼 그림 작업을 이어가는 규칙적인 삶을 발견했고, 그보다 더 전에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를 보며 미술 거장들의 그림을 분석하고 공부하는 치열함을 찾았다.
예술가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삶이 여유롭게 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림 실력을 키우고, 작품 활동을 이어간 화가의 전시가 현재 삼성역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다. 체코의 국민적 사랑을 받는 화가 ‘알폰스 무하’이다. 화가의 이름이 낯설더라도 그의 그림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을 의미하는 ‘아르누보’ 미술 양식의 대표작에 무하의 그림이 많기 때문이다.
아르누보 작품은 회화, 조각, 그래픽 아트, 건축, 장식 예술 등 시각 예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을 담은 순수 미술보다 주로 포스터, 제품 디자인 등 응용 미술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인다. 당시 서구 사회에서 유행한 소비재 디자인의 장식성은 아르누보 양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미술 양식의 가장 큰 특징이 아름다움이다. 물결치는 머리를 가진 여성이 등장하고 꽃과 나무, 잎사귀가 등장하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다. 유려한 곡선들은 화려한 장식들과 어우러져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빼앗는다.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알폰스 무하 탄생 16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하는 <아르누보의 꽃: 알폰스 무하전>은 2025년 7월 13일까지 진행된다. 아르누보의 거장, 체코의 별이라 불리는 그의 오리지널 포스터, 판화, 드로잉, 유화, 도서 간행물, 디자인 장식 오브제 등 300여 점의 작품을 직접 눈으로 담을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필자는 도슨트를 포함해 2시간 반 동안 전시를 보았지만, 2배의 시간이 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하가 정교하게 완성한 그림들에 황홀함을 느꼈다.
<지스몽다>, 신시내티, 1895, 스트로브릿지 석판 인쇄소
인상 깊었던 그림을 모두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이 한정되었기에 3가지 요소에 초점 맞춰 전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섬세함이다. 4부까지 구성된 전시에서 첫 장인 ‘뮤즈가 건넨 붓, 화가가 그린 전설’에서는 알폰스 무하가 세상에 인정받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를 만들어준 전설적인 작품 <지스몽다>가 전시되어 있다.
무명의 알폰스 무하에게 생긴 크리스마스 이브의 기적은 이미 여러 차례 한국에서도 소개되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문화에 보편적인 프랑스에서 홀로 인쇄소 당직을 서고 있던 무하는 최고의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 작업을 맡아 당시에 생각할 수 없던 비주얼의 연극 포스터를 완성하였다. 시각적인 디자인도 그러한데 당대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포스터의 크기였다.
무하는 인쇄소에서 작업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포스터를 두 장 이어 붙여 <지스몽다>를 완성했다. 그에게 이 포스터 작업은 큰 기회였기 때문인지 이후로 다른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완성했지만, 작품을 실제로 보면 알폰스 무하 생애 중 가장 정교하게 계산한 그림이 아닐지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두 포스터가 연결되는 부분을 주목해서 보면 알 수 있다. 완벽하게 하나처럼 보이기 위해 앞장이 뒷장을 감싼 형태를 보인다.
<웨스트 엔드 리뷰>, 파리, 1898, 르메르시에
이후 런던의 수많은 문학잡지 중 하나인 <웨스트 엔드 리뷰> 표지를 맡아서 그렸다. 전시에는 기존 크기의 표지와 함께 총 9장의 종이에 인쇄하여 하나로 연결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이는 무하의 작품 중 가장 큰 크기이다. 9개의 포스터 종이를 연결하는 접합부의 디테일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무하의 섬세함을 느낀 부분은 포스터 안에 정보를 작성한 그의 타이포그래피다. 포스터 내용에 따라, 제품에 따라, 주제 그림에 따라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그의 다양한 글씨체는 대상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늠케 한다. 내가 포스터 제작을 진행하는 사람이어도 무하에게 제작을 맡길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평소 글씨체가 궁금해졌다.
<모엣 샹동>, 파리, 1899, F. 샹프누와
<모엣 샹동> 제품 사진
두 번째 요소는 아름다움이다. 무하의 작품에 관해 표현되는 가장 뻔한 단어이다. 하지만 이것만큼 무하를 대중에게 확실히 인식시키는 데 기여한 요소는 없다. 5시간을 알폰스 무하 전시에 사용한다고 해도 그의 그림을 눈이 보고, 머리가 감탄하고, 마음이 반하는 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멀리서 크기를 느끼고, 가까이서 섬세한 제작 과정을 상상하고, 그가 선택한 색감에 반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흘러간다.
무하의 그림을 아름답게 만드는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모든 작품에 여성이 등장하지 않고, 여성만 등장하지도 않지만 무하가 자주 사용하는 유려한 곡선은 여성의 물결치는 머리칼과 흩날리는 옷자락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린다. 또 그들의 자세와 표정은 모델 포즈의 레퍼런스가 되지 않을지 혼자 추측해 볼 정도로 매혹적이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작품은 장식 패널인 <하루의 시간>과 제품 디자인인 <모엣 샹동>과 <욥>이다.
작품 속 여성들은 모두 각자가 가진 매력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듯 보인다. 감상에 빠진 눈빛으로 옆모습만 보는 자세와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시선 처리와 아예 눈을 감아버린 인물의 연출은 아름다움을 스스로 강조하여 드러내지 않고 있음에도 자꾸만 눈이 가는 끌림이 있다.
<장식 자료집>, 파리, 1902, 보자르 중앙 도서관
제품 패키지 디자인인 <모엣 샹동>과 <욥>은 틴 케이스 제품으로도 전시되어 있다. 하나의 그림을 종이에 프린트된 모습과 제품 자체, 이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보면서 아르누보 미술 양식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장식적 기능을 더욱 실감했다. 특히 <모엣 샹동> 그림 속 인물을 둘러싼 화려함에서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하게 표현한 것을 보며 놀랐다. 전시의 두 번째 장, ‘아르누보의 꽃’의 끝부분에 위치한 무하의 <장식 자료집>이 놀라움을 극대화했다.
여기에는 그가 1894년부터 터득한 미술의 원리가 총 72개의 판화에 담겨 있다. 꽃과 인물의 모습, 포스터와 메뉴 디자인이 있고, 무하가 직접 고안한 서체 또한 포함되었다. ‘무하 스타일'로 알려진 화풍을 수많은 예시 그림과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은 수년 동안 무하의 스타일을 익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유럽과 미국의 다양한 학교에서 미술 수업 교재로 쓰였다. 무하 스타일이 가진 독보적인 아름다움이 어떤 연습을 통해 이룬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요소는 무하 작품의 목적성이다. 알폰스 무하가 처음 제대로 자신을 알렸던 연극 포스터부터 상업적 디자인들 모두 대상을 세상에 알리는 홍보의 목적을 분명히 드러낸 작품들이다.
<페르펙타 자전거>는 아름다운 여성만큼 자전거가 돋보이는 연출로 대중들이 ‘이 여성이 타고 있는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하는 분명한 효과를 낸다. 앞에서 한 번 언급한 <욥>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를 들고 있는 여성의 이미지가 그 제품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
무하가 체코의 별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그가 이룬 상업적, 미술사적 성과에 있는 것이 아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그가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슬라브 민족의 정신과 역사를 담은 <슬라브 서사시>라는 대작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하던 때의 동네와 지역 사람들, 문화를 담은 예술적 이상과 상업적인 성공 사이에서 갈등하던 무하는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미국의 사업가를 만나 <슬라브 서사시> 프로젝트의 후원을 약속받고 조국으로 돌아온다.
<슬라브 서사시> 중에서 <포데브라디의 후스파 국왕 이르지 (1923)>
그가 돌아온 후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무하는 신생국의 국가 정체성을 담은 자체 화폐와 우표 디자인을 맡았다. 그는 조국을 위해 이 작업을 무보수로 참여하며 헌신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공공 디자인 작업을 이어가며 돈이 아닌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작업에 임했다. 무하는 단순히 예술가, 화가를 넘어서 국민의 자부심이었고, 세계에 자국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알리는 존재가 되었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그가 삶의 끝자락에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작한 <슬라브 서사시>다. 슬라브 민족의 신화와 역사를 주제로 한 20점의 대형 회화 연작으로, 현재까지도 무하의 필생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연작은 체코를 비롯한 슬라브 세계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한다. 무하는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이 연작을 프라하에 기증했다.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을 때 무하의 애국심은 눈엣가시였고 몇 번이나 고령의 무하를 심문했다. 이로 인해 몸이 약해진 무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듬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의 작품들도 훼손될 위기에 놓였었고 오랜 시간 동안 은닉되었다. 전쟁 이후 모라브스키 크룸로프 성에서 전시되었으나 2026년까지 프라하에 전용 전시관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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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의 커리어는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을 홍보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화가로 자리매김한 이후, 세상에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조국을 알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의 그림에는 섬세함과 아름다움으로 표현된 확실한 목적이 존재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표현과 내용을 균형적으로 이뤄낸 그의 업적 뒤에는 언제나 의뢰를 맡아 작업할 수 있는 성실함이 준비되어 있었고, 하나의 주제도 다채롭게 표현하기 위해 꾸준히 연습하는 끈기가 있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예술가에 대한 동경이 더 커지는 시간이 되었다. 특히 그가 자기 일을 대하는 성실한 자세는 다양한 직업을 아울러서 우리가 지녀야 하는 삶의 자세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야에 나의 최선을 다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요즘 현대인에게 어떤 분야건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만드는 것이 먼저라는 깨달음을 주는 알폰스 무하의 뛰어난 작품들로 채워진 이 전시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