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젯밤 스친 꿈같은 그저 짧은 이야기 -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아주 먼 곳에서 강산이 열댓 번 변하기 전 솜씨 좋고 애처로운 한 남자가 꾹꾹 눌러써 남겨놓은 이야기
글 입력 2023.01.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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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의 ‘단편소설 시리즈’ 중 첫 번째 무대인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이 1월 27일부터 29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판소리 쑛스토리’는 단편소설의 간결한 형식을 판소리의 ‘대목’이 가진 형식에 접합하고, 독자성을 추가했다.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은 그 단편소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프랑스의 대표 작가인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소설 세 작품을 판소리 1인극으로 재구성했다. 


‘2022년 공연예술창작산실-올해의 신작’ 전통예술 장르 선정작이기도 한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은 관객들에게 판소리의 이야기성과 음악성, 판소리 배우의 연기 등 다양한 관람 포인트를 제공했다. 


소리꾼 박인혜가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의 연출과 각색, 음악감독, 작창, 배우를 모두 맡았다. 박인혜는 판소리 뮤지컬 ‘적벽’에서 조조를 연기하고, 드라마 ‘역적’에서 열연했다. 또한, 제5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수상작 ‘필경사 바틀비’와 제4회 한국 뮤지컬 수상작 뮤지컬 ‘아랑가’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 


박인혜는 2021년에 [오버더떼창 : 문전본풀이]를 통해 연출가로 데뷔했으며, 판소리의 특징을 살려 독창적인 창작 색깔을 구축했다. 2022년에는 실력을 인정받아 문화예술유공표창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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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는 기 드 모파상의 ‘보석’, ‘콧수염’, ‘비곗덩어리’를 판소리로 각색했다.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은 세 작품을 각기 다른 컨셉의 1인극으로 진행하되,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때의 감상을 판소리로 표현하며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지도록 연출했다.


박인혜는 ‘판소리 쑛스토리’의 첫 번째 작품으로 기 드 모파상의 작품을 선정한 것에 대한 이유로 ‘연민’을 이야기했다. 모파상의 글은 인간에 대한 첨예하고도 적나라한 관찰이 특징이다. 그는 그 어떤 철학이나 신념도 작품에 넣지 않고 그저 사실적인 묘사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 그에게 박인혜는 연민을 느꼈다고. 예민한 시선으로 세상을 글에 담아낼 때, 외로웠을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고 했다. 


모파상의 글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쉽게 한 가지의 종류로 재단되지 않는 부류이다. 복잡한 존재인 그들은 모파상의 아름다운 문체 속에서 희망을 가진다. 그것이 바로 박인혜가 모파상을 선택한 이유이다. 


박인혜가 선정한 작품 세 가지 ‘보석’과 ‘콧수염’, 그리고 ‘비곗덩어리’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단편소설이다. ‘보석’은 인간의 속물근성을 위트 있게 풀어내고, ‘콧수염’은 아주 작은 키워드 하나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풀어낸다. ‘비곗덩어리’는 전쟁이라는 극악무도한 상황 앞에서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박인혜는 이 세 가지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인간의 다양한 내면과 어리석은 본능에 대한 주제 의식을 던졌다. 


관객들은 ‘보석’의 랑탱이 속물적인 본능에 눈을 떴을 때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콧수염’의 잔이 콧수염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들려줄 땐, 마치 그의 친구 뤼시가 된 것처럼 집중했다. 또한, ‘비곗덩어리’ 속 등장인물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한탄하며 극의 마지막 부분에선 비곗덩어리와 함께 눈물을 훔쳤다.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은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작품 속 메시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유도했다.

 

*


박인혜는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을 시작하며 ‘이 이야기는 어젯밤 스친 꿈같은 그저 짧은 이야기’라며 지나간 이야기는 훌훌 털어버리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몸을 바짝 당겨 집중해서 들을 것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흐름은 대목으로 이어지는 판소리의 형식과 잘 어우러지면서, 이야기가 짧고 강렬하게 전개되는 단편 소설의 형식과도 일맥상통했다. 작품마다 악사들의 연주 스타일, 효과음과 조명, 무대 구성이 전부 달랐다. 공기의 질감마저 다른 듯 느껴졌다. 


그 덕분에 작품 하나하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랑’ 대목에서는 랑탱의 절망적인 감정에 온전히 집중했다. ‘콧수염 예찬’에서는 언제 랑탱의 슬픔에 눈물지었냐는 듯 잔의 귀여움에 미소 지었다. 또 ‘달래고 재촉’ 대목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불안한 두려움에 떨었다. 


앞 이야기를 모두 잊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작품을 모두 온전하게 집중해서 즐길 수 있었다는 뜻이다. 세 작품의 여운은 마치 하나의 작품을 본 것처럼 모든 공연이 끝나고 ‘그저 짧은 이야기’ 대목이 나올 때 홍수처럼 밀려왔다. 서로 다른 느낌의 세 작품의 매력을 모두 느끼게 만든 것은 분명 무대의 힘이었다. 


그 과정에서 판소리의 매력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판소리는 대사와 상황을 노래로 전달하는 창, 말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아니리, 보다 섬세한 전개를 도와주는 사설, 무대의 흥과 분위기를 만드는 너름새로 이루어진다.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은 창과 아니리, 사설과 너름새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그야말로 훌륭한 판소리 무대였다. 


무대에 대목의 가사를 띄워준 것 역시 관객이 보다 극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 장치였다. 창의 특성상, 정확한 가사를 캐치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을 수 있는데, 가사를 띄워줌으로써 관객들이 창의 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여 즐길 수 있도록 도왔다. 물론, 박인혜 소리꾼의 발음과 발성이 정확하여 가사를 자주 보지 않았지만, 관객을 배려한 장치라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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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은 무엇보다, 박인혜의 역량을 아낌없이 볼 수 있는 무대였다. 혼자서 판소리 극을 끌어가는 판소리 1인극은 전적으로 소리꾼의 역량에 좌지우지된다. 악사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관객들의 이목을 주목시키는 것도, 무대의 흐름을 이끄는 것도 전부 소리꾼이다. 


박인혜는 훌륭한 연출가이자 타고난 소리꾼이었다. 등장부터 유쾌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박인혜의 친근한 태도는 관객들이 긴장을 풀고 공연을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왔고, 수준 높은 창은 무대의 퀄리티를 한껏 높였다. 또한, 적절한 아니리와 사설은 이야기를 즐겁고 호소력 있게 전달해주었다. 박인혜의 너름새는 어딘가 모르게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는 차분하고도 익살스러워 자꾸만 웃음을, 또는 눈물을 짓게 했다. 


그의 연기 역시 일품이었다. 1인극이기 때문에 그녀는 극마다 적게는 한 명의 사람을, 많게는 10명 이상의 사람을 연기했다. 박인혜는 순식간에 다른 역할에 몰입했다. 랑탱이었던 그는 한순간에 보석상으로 변신했고, 애국심 있는 강단 있는 아가씨에서 한순간에 이기적인 백작으로 변했다. 그 변화에 이질감이 없었다. 그저 박인혜가 보여주는 것 그대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 됐다. 


박인혜는 극장 안의 모든 이와 소통했다. 판소리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악사들과의 소통은 보는 사람마저 감탄하게 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불이 꺼지고, 무대 구조물을 옮기는 스태프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극장 안의 모든 요소가 박인혜와 함께 숨을 쉬었다. 


악사들의 연주 역시 [판소리 쑛스토리 - 모파상篇]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악사 김성근과 심미령, 오초롱, 정상화는 각기 다른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무대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때로는 흥겹게, 때로는 스산하게, 때로는 슬프게.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추임새는 그들이 극에 몰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극의 흥을 돋워주었다. 


박인혜의 훌륭한 연출과 실력을 필두로 출연진들의 합이 좋아 더욱 인상 깊었던 공연이었다. 


*


판소리 무대를 보는 것은 판소리 뮤지컬 ‘적벽’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그런데 판소리는 내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야기를 이리도 즐겁게 전달할 수 있다니. 노래와 말, 춤이 섞인 판소리는 뮤지컬과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이 있었다.


한 시간 반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롭게 박인혜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세 가지 작품 모두 흥미로웠지만, 특히 마지막에 들었던 ‘비곗덩어리’가 가장 흥미로웠다. 셋 중 가장 길었던 무대였는데 박인혜는 단 한 점의 지루함도 없이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무대장치라고는 의자 하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시 상황의 불안감과 공포, 기분 나쁜 대치 상황과 긴장감 등이 실감 나게 느껴져서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에서 슬쩍 눈물을 닦아내던 박인혜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이 무대에 몰입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몰려오던 감정은 미처 이름을 붙일 수도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아 손바닥이 뜨거워지도록 박수를 쳤다. 


‘판소리 쑛스토리’가 다음 시리즈로 또 나오길 바란다. 다음 시리즈로 어떤 작품이 소개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판소리 쑛스토리’의 첫 시리즈를 만나볼 수 있어 영광이었다. 


아주 먼 곳에서 강산이 열댓 번 변하기 전 솜씨 좋고 애처로운 한 남자가 꾹꾹 눌러써 남겨놓은 이야기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강산이 열댓 번 흘러간 후에 나와 같은 한 여자가 목청 높여 전해주는 짧은 이야기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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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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