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든 것이 틀어지는 순간 [도서/문학]

글 입력 2022.12.27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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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는 없다. 모든 인간은 타인과 어떠한 방법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며 가족, 친구, 동료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주체가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서 ‘소통’은 필수적인 수단이다.


그리고 소통을 통한 관계 형성의 기반에는 언어가 있다.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부터, 좋고 싫음의 의사를 표현하며 새로운 지식을 전해 듣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끊임없는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애초에 그런 세상, 언어가 없는 세상은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언어는 인류 문명을 구축할 수 있게 했고, 한 집단의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으며 그들에게 결속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과도 같다. 국경 넘어, 바다 건너에는 어떤 이들이 살고, 그들이 축적해 온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의사소통의 자유로움을 얻게 된다면, 한 인간의 외적 세계가 확장될 것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지구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현재에 여행의 거의 유일한 장애물인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만나는 세상의 황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음에 틀림없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낯선 것들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두려움 대신 설렘이 느껴질 것이다. 망설임 없이 기차에 몸을 싣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외적인 세계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외국 작가가 쓴 책을 원문으로 읽고 그들이 전하려 했던 많은 것들을 온전히 느낀다면. 사랑, 희망, 분노, 비애 등과 같은, 그 종류와 깊이가 각기 다른 수많은 감정의 덩어리와 종교, 철학, 물리학, 천문학처럼 분야를 가리지 않는 지식을 얻을 때, 인간의 내적 세계는 확장된다. 그리고 확장을 경험하기 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인간을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현재의 상태와 상관없이 이 확장을 경험한 순간을 저마다 갖고 있다. 바로 우리가 처음 빛을 보고 숨을 들이마시는 탄생의 순간을 지나 부모의 언어를 하나씩 흉내 내기 시작할 때이다. 아기들이 내뱉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점점 언어의 형태를 갖추어 갈 때, 작은 인간의 세계는 넓어진다.


부모로부터 주변 사물의 이름을 익히고, 그들의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오래전부터 이어진 법칙이다. 어쩌면 모든 생명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면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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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에보르크 바흐만’의 단편 소설집 '삼십 세'에 수록된 단편 소설 중 하나인 ‘모든 것’은 화자가 아내 ‘한나’와 결혼한 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언어는 화자가 자신의 아이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아주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핍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화자는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외출을 자제하고, 친구들과의 교류를 줄였으며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 안정적인 살림을 추구하는 환경적 변화와 ‘폭발력이 잠재한 생각’을 항상 갖게 되는 내면적 변화를 겪는다.


화자는 어떻게 ‘어린애’와 자신이 만나게 되었는지,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한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뿐인 인간의 삶은 우연에서 시작되고 어떤 아이를 만나게 될지도 우연의 문제이다.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한 후, 흩어진 잔해에서 생명이 만들어졌기에, 인간 모두는 별의 원소로부터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 유일한 공통점 하나로 화자와 어린애는 가족이 되고 화자의 언어를 물려받음으로써 화자의 세계는 어린애의 세계로 이어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화자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언어를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갈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불공정함으로 가득 찬 ‘나쁜 세계’의 언어가 아닌 아이가 스스로의 언어를 창조하길 바랐다. 아이가 새로운 언어를 구축해갈 동안 화자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기존의 언어 체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소리로 표현되는 언어가 아닌 침묵의 언어로 대화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세계에서 단절된 숲에서 아이에게 자연의 언어를 보여주며 화자는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결국 새로운 언어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아이에 대한 기대감과 열정을 잃은 그는 철저히 방관자로서 가족을 대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와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존재하는 듯 하나,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줄 수 있는 사랑의 행동은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는 그저 아내에게 잔인한 현실을 전달해주는 역할의 수행자처럼 보인다.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이야기는 매우 극단적으로 전개된다. 새로운 생명을 만나 삶의 모든 것이 바뀌어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서의 아이를 기대했지만 체념하게 되는 화자 내면의 변화와 생명의 탄생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극단적 변화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작가 바흐만은 문학에서 극단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가 달라지고, 어떻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지듯이 사고와 언어는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는 인간의 생활 곳곳에 침투하여 우리 사고와 언어에 영향을 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의 시기를 가리키는 전간기에 활동했던 바흐만은 자신의 고향이 나치의 영향력에 물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언어를 배우는 것이 또 다른 세계로의 만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차별과 극단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세계라면 그 언어의 확산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나치가 대물림되지 않고 나치의 영향력에 문학의 언어가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이 화자에 투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흐만이 탈피하고자 했던 또 다른 ‘나쁜 세계’의 언어는 바로 남성중심적인 규율이었다. 대부분 남성으로 구성된 당시의 문학계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 거의 유일한 작가였던 바흐만은 쉽게 비난할 수 있는 타깃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사회에 만연한 차별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관습에서 탈피하려 했던 바흐만의 문학적 시도는 많은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했고, 오히려 작가에게 또 다른 고통으로 돌아왔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바흐만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여성들은 고통받아 왔다. 세상의 차별을 극복하려 하지만 반복되는 실패를 경험하고, 행동을 검열당한다. 현대 한국 문학의 선두 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정세랑’ 작가의 ‘옥상에서 만나요’에서 이러한 구절이 등장한다. “내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우울함에 잠식될지라도, 모든 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아무것도 깨닫지 못함으로써 얻는 낙천적인 삶과 현실을 마주하며 얻은 불행 중, 불행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바흐만은 나치즘과 여성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자신의 문학 세계에 메시지를 녹여 내었다. 그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상처로 인해 우울에 시달렸으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그의 삶과 문학은 현재의 독자들에게 우울을 극복하고 다시 새로운 언어를 찾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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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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