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처 위에 자라나는 것 - 흉터 쿠키

이혜미, 『흉터 쿠키』(현대문학, 2022)
글 입력 2022.11.1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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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이 없어진 상처는 잊힌다. 등장과 동시에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이 되던 상처는 그 통증의 부재와 동시에 희미한 존재감으로만 남게 되는 것. 그리고 조금 특수한 어느 날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크건 작건, 오래된 흉터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날.

 

그런 날이면 우리는, 흉터는 상처 위에 남겨지므로 흉터는 상처의 흔적이라는, 그러므로 흉터에 대해 얘기하려면 먼저 상처를 입어야 한다는 따가운 생각에 도달한다. 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처 없인 도저히 시를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 시인이 있고, 그렇게 상처 많은 시인이 낳은 흉터 같은 시들이 있다.


아플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이혜미의 시집 『흉터 쿠키』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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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를 찍어내고 남은 반죽을

쿠키라 할 수 있을까


뺨을 맞고

얼굴에 생긴 구멍이 사라지지 않을 때


슬픔이 새겨진 자리를

잘 구워진 어둠이라 불렀지


- 「흉터 쿠키」 중에서

 

 

전체를 조각냈을 때 조각이 오히려 전체를 압도하는 경우. 시인은 온전한 전부였다가 온전함이 찢어져 조각난 것에 시선을 건넨다.

 

“쿠키를 찍어내고 남은 반죽”은 쿠키라 할 수 없으므로 슬프다. 쿠키 반죽의 조각난 존재론은 서글픈데, 그보다 더욱 슬픈 건, “잘 구워진” 무언가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깊은 한 부분을 “찍어내고” 놓아줘야 한다는 것. 그 슬픔은 “얼굴에 생긴 구멍”처럼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어둠”을 드리운다.


시인은 한 걸음 나아가 “마음이 저버리고 간 자리에 남은 사람”에게서 같은 슬픔을 포착한다. 그러나 잔여로 남겨진 후에도 삶은 계속되기에, 마음이 “테두리”만큼 떨어져나가며 생겨난, 미처 “덮지 못한” 마음 구멍의 “통증으로부터” 우리는 흘러나와야 할 테다. 통증‘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통증‘에서’부터 우리가 빠져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아픔은 아픔대로 두고, 우리는 그 아픔에서 스스로 물러나와 “흉터가 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


시인의 미학적 논리에도 다분히 일리가 있지만, 벌어진 상처가 무감각한 흉터가 되는 과정이 분명 쉽지는 않을 테다. 한 차례 분열의 아픔을 겪고 조각난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픔을 잊기 위해 “사랑으로 더럽히”거나 “다른 몸을 헤매”야 할까. (「네토」 중에서) 삶의 고통스러운 생채기 앞에서 흔해질 우리의 방황에 대하여, 얼마간 우울해 보이는 시인의 답변은 의외로 힘차고 오히려 경쾌하다.


뭘 겁내 못 되돌려 그냥 지금 바라봐 여름이 장전한 눈빛을 알잖아 이제 와서 헤아리는 심정 생각보다 깊이 묻혔던 자기야, 부를 수 없이 저기요 별것도 아닌 일에 뒤돌아보는 고개를 봐 언제까지 저 뜨거운 뿌리의 자장을 외면하겠니 - 「하필이면 여름」 중에서


“못 되돌”리는 일이니 “겁내”지도 말고, “이제 와서 헤아리”려 하지도 말라는 배수의 진. 혹은 “별것도 아닌 일”이라 여기며 정면의 아픔을 직시하라는 정공법. “숙근”은 겨울에도 죽지 않고 말랐다가 봄이면 다시 꽃을 피워낸다.

 

아마도 무거운 머리를 고통스럽게 겨우 가누면서도 활짝 피어난 작약을 사랑했을 시인은, 스스로가 잠긴 우울의 깊이가 충분함에도, “아름답기를 포기하지 말자”는 독려를 자꾸만 건넨다. 시인에게 쿠키란 맛있게 아문 반죽의 상처다.


마음이 조각난 상처를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모르는 장면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경외로” 죽음의 공간마저 거닐 수 있게 되고(「비문 사이로」 중에서), 혹여 그 길을 “하나의 목도리를 감고”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면 “어울려 있음의 혼란한 기쁨”을 만끽할 수도 있을 테다. (「달 속으로 무지개 회오리 깃들 때」 중에서) 이를테면 용기와 연대. 상처 위에 뿌려져 흉터를 단단하게 굳히는 건 그런 것이다. 그렇게 굳어진 흉터는 그 아래서 새살을 밀어 올린다. 흉터란 미결된 새살이다.


이혜미의 시는 어려운 시고, 이혜미의 시집은 두려운 시집이다. 어렵고 두려운 이 시집을 여러 번 읽으면서, 상처는 흉터의 잉태 조건이자 동시에 모든 새살들의 모체라는 생각까지 겨우 도착했으나, 나에게 상처는 여전히 두렵다.

 

‘상처 입었다’와 ‘흉터 생겼다’는 문학적으로 정확히 같은 말이지만 어쩐지 하나는 아프고, 다른 하나는 반갑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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