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경계를 넘어선 몽환 [문학]

몽환의 시인, 김중일의 시를 읽어보자
글 입력 2022.10.17 13:4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우리가 습득하는 ‘지식’은 범주화의 영역이다. 하나의 언어로 명징하게 의미를 짚을 수 있어야 비로소 지식이 된다. 그러나 삶은 명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증오로 가득 찬 사랑이라거나, 너무도 익숙한 친구에게 느끼는 낯섦은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다. 김중일이 흥미를 느끼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랑과 적대감 사이의 무엇, 친숙함과 낯섦 사이의 무엇, 수많은 분류들 사이에 존재하는 무엇이 김중일의 시적 주제로 자리한다.


우리는 흔히 둘 혹은 다수로 나누어진 영역이 만나는 지점을 경계라고 부르지만 경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는 범주화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장치일 뿐, 서로 다른 영역이 맞닿은 지점에는 두 영역이 혼재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비율은 예상할 수 없다. 최초에, 김중일은 이 지점에 대한 골몰로 가득하다. 시는 결국 삶에 대한 것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생각해볼 때 김중일이 생각하는 삶이란 설명할 수 없는 ‘몽환’으로 가득 찬 것이다.


김중일은 몽환의 시인이다. 특히 첫시집 <국경꽃집>에서부터 세 번째 시집인 <내가 살아갈 사람>까지 보여준 몽환적 이미지는 많은 매니아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삶은 무엇보다 몽환적이라는 것을 증명해내는 시인이다.

 

 

bottles-g7a4f70f70_1920.jpg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더듬이 같은 푸른 털은 공중을 잡아당 긴다 부유하던 얼굴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오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 열고 타박타박 걸어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 「가문비냉장고」 전문

 


냉장고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기계다. 이러한 냉장고가 수행하는 기능은 무언가를 ‘담는’ 기능이다. 냉장고와 인간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냉장고가 음식이나 화장품 등을 저장하고 축적하는 것과 같이 인간도 몸속에 시간을 저장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가장 강렬한 시간은 무언가를 상실했거나 상처받은 시간이다. 살아가면서 경험한 상실이나 상처가 몸속 깊숙이 한 번의 죽음으로써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살아있음을 가장 크게 느끼는 시간은 상실과 고통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가장 절실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시 「가문비냉장고」 속에 가문비나무도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냉장고는 “내 생의 뒷산”에 버려진다. 가문비나무는 “버려진 냉장고”, 즉 버려졌다는 속성이 자기 앞에 주어지자마자 “독 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가르릉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버려진 냉장고”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한다.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그러나 분명 냉장고는 가문비나무 앞에 주어진 것이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가는 상황은 가문비나무 앞의 냉장고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암시를 준다.


그리하여 가문비나무는 자신의 앞에 주어진 냉장고, 즉 버려졌다는 속성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지만,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넣고”, 가문비나무가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리며 가문비나무와 냉장고는 한 몸이 된다. 가문비나무의 생명성, 버려진 냉장고의 죽은 자아가 한 몸이 되어 “혈액을 끌어올”리는 대목은 모순적으로 보이는 삶과 자아의 죽음이 필연적으로 혼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연에 서술되는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에서도 이러한 혼재의 속성이 잘 드러난다.

 


lone-tree-gac52644c4_1920.jpg

 

 

김중일이 최초부터 매몰되어 있던 시적주제는 우리 머릿속에서는 분리된 개념이나 실제로는 혼재하는 개념들이다. 필자는 김중일 시에 유난히 ‘저녁’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혼재양상들과 관련이 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같은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이 근본적으로 시간을 구분하는 방식을 낮과 밤으로 양분하는 것이다. ‘저녁’이라는 시간의 발견은 낮과 밤의 이분화구조를 파괴한다. 낮이면서 밤인 ‘저녁’은 몽환의 시인인 김중일의 시간적 배경으로 무엇보다 적합하다.


 

공룡의 멸종은 권태 때문이다, 라고 마을회의에서 누군가 술잔을 탁자 위에 소리나게 놓으며 말했다, 원탁에 앉은 덥수룩한 수염들은, 붉은 양탄자처럼 긴 혀를 둘둘 말고 굳게 입을 닫았다, 나날이 회의는 계속되었다 매일, 시커멓게 하늘을 뒤덮으며 몰려오는 저녁의 정체가 공룡이란 것을 깨닫고 경악할 때까지

 

- 「공룡」 부분

 


공룡은 마을의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카프카의 『가장의 근심』에서 오드라데크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포섭할 수 있는 어떠한 실마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와 부재가 혼재하는 대상이자 가장이 근심을 하는 이유이다. 「공룡」도 이와 비슷한 대상이다. 공룡은 존재한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공룡은 존재로써 마을 사람들의 곁을 떠돈다.


그러나 공룡은 출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물기 무섭게 허술한 문을 걸어잠그고, 침대 위에서 검은 창문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아무도 공룡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즉 소문으로나 사람들 마음속에는 존재하면서 실체는 부재하는, 존재와 부재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대상이다. 실체가 없음으로 사람들 머릿속을 둥둥 떠다닐 뿐 무엇으로도 포섭되지 않는 공룡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마을회의의 대상이 된다. 마을 사람들은 공룡의 야습 때문도 아니고, 공룡의 멸종 떄문도 아닌, ‘공룡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계속 마을회의를 진행하고, “붉은 양탄자처럼 긴 혀를 둘둘 말”아가며 근심한다.


후에 시인이 서술하기를 ‘공룡’의 정체는 ‘저녁’이다. 활동적, 탄생의 전통적 상징을 가지고 있는 낮과 비활동적, 소멸의 전통적 상징을 가지고 있는 밤 사이에는 저녁이 있고 존재와 부재 사이에는 공룡이 있다. 저녁과 공룡 모두 두 가지 양상이 혼재하는 대상인 것이다. 저녁과 공룡과 소문처럼,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우리 삶 도처에 숨 쉬고 있다.

 

 

man-ged3b20cf5_1920.jpg


 

내 등에 솟은 두 개의 깊은 혹 사이, 해와 달 사이

그 사이에 낀 엉덩이는 도무지 빠지지 않고, 욱신거린다

너와 내가 아주 오랜만에 마주앉은 저녁

자전하는 거대한 테이블

그 위에서 너나 나나 어지간히도 지독해지는

두 겹의 저녁, 그렇군 여긴

우리의 궁지였군!

 

- 「두 겹의 저녁으로 보는 테라스」 부분

 


시 「두 겹의 저녁으로 보는 테라스」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연인을 묘사한다. “일찍 퇴근해서 까페 테라스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은 연인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귀가 먹먹한 적막”을 느끼면서 “테이블의 지름”이 “점점. 길어지고 넓어지”는 경험을 통해 서로의 거리를 실감한다. “테이블의 반지름은 우리의 팔길이를 넘어선 지 오래”이다. 사랑은 서로를 가깝게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다름을 실감하게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상해요. 당신과 사랑하고부터 점점. 일그러지고. 추악해지는 나의 얼굴. 나는.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을까요.” 이와 같이 사랑은 하나가 되고 싶으면서도 서로의 거리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관계맺음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랑의 양가성을 ‘저녁’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통해 드러낸다. “두 겹의 저녁으로 보는 테라스”에 앉은 연인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사랑으로써 “너나 나나 어지간히도 지독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궁지”가 된 테라스는 양가적인 사랑을 담은 장소다. 결국 사랑은 서로를 가깝게 만들면서도 멀어지는 과정이다.

 

 

swimmer-g0b1b33ab2_1920.jpg


 

우리가 삶에서 겪는 것들 가운데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생각들이 더러 존재한다. 너무나도 친숙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낯설음이라든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적대감 등이 그렇다. 김중일 시인은 이런 것들을 몽환적인 이미지로 독자들 앞에 재생시킨다.


우리의 삶은 그다지 명확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모호하고, 애매한 것들로 가득한 세계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해 골몰할 때 우리는 좀더 섬세하고 명민한 감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슬픔을 단순히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어떤 슬픔’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다. 당신을 섬세하게 만들어줄, 몽환이 궁금하다면 김중일의 시를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에디터 명함.jpg

 


[권명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