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계속되는 여성들의 말하기 - 영화 '애프터 미투'

글 입력 2022.10.0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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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2010년대 중반 사회 각계각층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외친 구호다. 그 후로 4년이 지난 지금, 정말로 가해자는 감옥에 가고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갔을까.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애프터 미투>는 제목처럼 미투 운동 이후를 살아가는 동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소람 네 명의 여성 감독이 각각 ‘여고괴담’,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이후의 시간’, ‘그레이 섹스’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더 이상 괴담이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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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미투>의 문을 여는 작품은 박소현 감독의 '여고괴담'이다. 괴담은 실체 없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을 겁주는 이야기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며 듣는 사람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로 마무리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 선생님’에게는 잘 보이지도 못 보이지도 말고 그냥 보이지 말라는 용화여고의 괴담 역시 그런 식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여고괴담’은 괴담에 머물던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든 용화여고의 스쿨 미투 이야기를 담았다.

 

2002년부터 2018년까지의 용화여고 사진을 배경으로 미투운동 당시를 회상하는 졸업생들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사람들에게 용화여고의 미투 운동은 창문에 포스트잇으로 붙인 'WITH YOU' 사진으로 알려졌지만, 그 사진을 둘러싼 앞뒤 상황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졸업생들의 말에서 학교라는 공간에 어떤 위계가 있는지, 오랜 시간 알 사람은 다 알았던 이야기가 어떻게 은폐되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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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이솜이 감독의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피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미투 운동의 의의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주인공인 ‘행복’ 씨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려 한다. 카메라는 군더더기 없이 그가 말하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고향에 내려간 그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스피커와 마이크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소리 내어 말한다. 자주 클로즈업되는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체념, 고통과 공포 등 다양한 감정이 깃든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야 만다. 매일 ‘자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라는 문장을 100번씩 써서 앞뒤가 새카매진 공책을 보며, 주목받지 않을지라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괜찮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자신이 겪은 일을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괴담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으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잘못한 사람이 명백히 있으며, 우리는 그 사람의 잘못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이야기는 세상에 널리 퍼질 테고,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증인이 될 것이다.

 

 

 

한 명의 영웅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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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두 작품이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라면, 강유가람 감독의 '이후의 시간'은 미투 운동 이후를 살아가는 여성 예술가 세 명의 시간을 따라간다.


송진희 작가, 남순아 감독, 이산 배우는 각각 미술계. 영화계, 공연계에서 활동하는 여성 예술인이다. 동시에 반성폭력 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활동가로서의 정체성도 갖고 있다.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것은 녹록지 않다.

 

미투 운동 이후 4년, 이들은 예술가와 활동가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곤 한다.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면서도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것이다. 미투 운동으로 세상이 완전히 바뀔 것 같다는 사람들의 기대감이 현실의 벽과 부딪치며 사그라든 다음에도 이들은 꾸준히 자리를 지켜왔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미투 운동 당시의 카타르시스만 기억하고, 그 이후에는 충분한 관심을 갖지 않은 게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가해자가 감옥에 가는 것 이상으로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와 조직의 역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많은 성폭력이 폐쇄적인 조직, 위계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미투 운동 이후 예술계에도 반성폭력을 위한 공적 지원과 제도가 늘어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상당 부분을 활동가 개개인에게 의지하고 있다. '이후의 시간'은 예술가 개인이 소모되지 않고 다함께 안전한 '판'을 만들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성 평등 사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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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미투 운동 이후 우리에게는 어떤 사회가 필요할까. 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통 받아왔던 이 사회의 문제는 무엇일까. 소람 감독의 ‘그레이 섹스’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제목처럼 ‘회색지대’, 즉 피해자와 가해자를 명확하게 구별하기 힘든 지점에서 여성들의 경험과 감정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영상에서는 여러 여성이 등장해 친밀한 관계, 자발적인 섹스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토로한다. 앞선 작품들에서 피해자에게 상대적으로 쉽게 이입하며 분노했다면, 이번 작품은 계속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왜 데이팅 앱 사용자는 상대방을 만날 때 당연히 성관계가 있을 것을 전제해야 하는지. 사랑한다면 내가 내키지 않을 때에도 상대방의 욕구에 응해야 하는 것인지. 내가 원해서 시작한 섹스에서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을 느끼는지.


어떤 말들은 관객을 불편하게 하고 혼란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 소람 감독은 걸리는 말들을 편집하고 매끄러운 결론을 낼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지 내부에서도 많은 논의를 거친 끝에 후자를 택했다고 밝혔다. 그에 따라 작품은 섣불리 결론 내리는 대신 회색지대에 위치한 수많은 상황과 감정을 보여준다.

 

그 상황과 감정은 우리 사회 속 남성 중심의 섹스 문화가 지닌 문제점으로 수렴된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런 가해자가 나올 수 있었던 사회와 문화를 돌아보는 일 아닐까.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져서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하여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영화는 나가는 길을 열어둔다. 많은 질문이 나올 법한 작품을 마지막에 배치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

 

<애프터 미투>는 미투 운동을 갈무리하는 게 아니라, 미투 운동으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시작’을 담고 있다. 미투 운동이라는 회오리바람이 새로운 땅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면, 그곳에서 어떤 세상을 만들어갈지는 우리의 몫이다. 물론 단기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지난 9월 30일은 용화여고 스쿨 미투 대법원 선고 1주년이었다. 해당 사건이 2018년에 공론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대로 된 결론이 나오기까지 3년이나 걸린 셈이다.


미투 운동 이후, 다양한 분야에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싸우는 중이다. 성 평등 사회로 가는 과정은 길고 멀기에 꾸준한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용기가 도화선이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붙은 불을 유지하는 건 많은 사람이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다. <애프터 미투>가 그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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