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족, 그 바깥의 가족 [영화]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영화 문법을 중심으로
글 입력 2022.07.0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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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에바.jpg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세상에 홀로 던져진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친구, 직장동료, 단골 식당 사장님 등 일상에서 맺는 여러 관계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관계는 단연 ‘가족’이다. 특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각별하다. 다른 관계들이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 태어나는 것과 달리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운명적으로 결정된다. 사회적 관계는 맺고 끊음이 자유로운데에 비해 부모와 자식은 피로 묶여있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는 ‘책임’이라는 특수한 의식이 작용한다. 이 책임은 단순히 아이를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차원을 넘어서 나 자신의 욕망과 삶보다 아이를 우선시해야 하는 정체성의 전복을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롭고 싶어 한다. 사회적 관계도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자유도 보장받고 싶은 양가적 의식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런 의식으로 하여금 출산과 양육은 기피하고 싶은 일이 된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유를 포기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행복감'을 자유와 등가 교환한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포기하는 일.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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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여야 하는 둘


 

에바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녀는 여행자이며, 어디로든 다니고 싶은 욕망과 기질을 지녔다. 그러나 그녀에게 ‘케빈’이라는 아이가 찾아오며 그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자유를 포기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에바가 가정을 이루는 계기가 그려진다. 그녀는 낯선 곳에서 비를 맞으며 자유를 즐긴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앵글은 에바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앵글은 에바와 함께 휘청거리며 위험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프랭클린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카메라는 고정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 장면은 에바의 자유가 위험과 공존하는 것이었으며, 그 위험을 프랭클린과의 합치로 잠시 극복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장면은 이내 성관계 장면으로 전환되고 그 관계에서 에바는 케빈을 잉태하게 된다.

 

에바의 임신은 계획된 것이 아니다. 그저 하루 동안 자유라는 위험 요소를 내려놓고 프랭클린과 함께 했을 뿐이다. 그러나 에바는 그 하루 때문에 자유를 잃는다. 성관계 장면이 끝나고 등장하는 전자시계는 12시에서 12시 1분으로 변화하는 시간을 보여주며 에바의 인생에 새로운 국면이 들어설 것을 암시한다.

 

원치 않은 임신이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산부인과에서 에바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는다. 다른 임산부들은 에바의 주위를 둘러싸고 신나게 이야기를 나눈다. 이 침묵과 소음의 대비는 에바가 자신에게 찾아온 생명을 부담으로 느끼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다른 임산부들이 당당하게 배를 드러낸 상태인 것과 달리 에바는 축 늘어진 옷으로 배를 가리고 있다는 것도 에바가 임신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장면이다.

 

에바의 상심과는 달리 그녀는 건강하게 아들 ‘케빈’을 출산한다. 작품 초반 신생아 시절의 케빈은 단지 울음이 많은 아이일 뿐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엄마가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에바는 아들이 달갑지 않다. 계속 우는 케빈을 데리고 길을 가던 에바는 시끄러운 공사현장에 멈춰 선다. 그 순간 케빈의 울음소리는 공사현장 소음에 묻혀버리고 에바는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나 에바에겐 안도감인 소음이 케빈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자신의 울음소리가 공사장의 소음에 묻히자 케빈은 더 큰 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한다. 케빈의 비뚤어짐은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이다. 공사장 소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던 엄마의 모습은 기억에 없겠지만, 케빈의 무의식에는 엄마가 자신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성된다. 이때부터 케빈과 에바는 떼어낼 수 없는 혈연관계이면서, 인생을 망쳐놓은 원수의 관계가 된다.

 

한편 에바가 케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면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케빈의 첫 등장 장면은 에바가 케빈을 달래주는 장면인데, 이때 에바는 케빈을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달랜다. 케빈을 자신의 일부로 인정할 수 없는 듯 케빈의 겨드랑이를 들어올려 자신과 밀착되는 부분을 최소화한 후 달래기 시작한다. 하지만 케빈은 계속해서 운다. 반면 프랭클린은 케빈을 쉽게 달랜다. 프랭클린은 자고 있는 케빈을 품에 안아 살살 달래준다. 프랭클린은 이미 자신의 일부인 케빈을 품 안에 꼭 끌어안은 채 교감한다. 이러한 장면에서 보이는 에바의 적대감이 어린 케빈의 무의식에 쌓인다. 에바의 가족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는 형태로 형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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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중반까지 에바는 가족에게 중심을 두기보다 개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반면 케빈은 진심 어린 교감과 애정을 갈구하는 방향으로 비뚤어진다. 에바는 케빈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한다. 공을 주며 굴려보라고 하거나, 덧셈을 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케빈은 애정이 결여된 관계에 불만을 가지고 반항한다. 그것이 극대화되는 시퀀스는 에바가 자신의 방에 지도를 붙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지도는 여행과 자유에 대한 상징이다. 이 장면에서 자유에 대한 에바의 갈망이 드러난다. 케빈은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에바의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에바의 방에 못생겼다는 평을 퍼붓는 한편, 개성대로 방을 꾸며준다는 에바의 말에 ‘내 개성이 뭔데?’라고 질문하며 자신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는 엄마에게 불만을 드러낸다.

 

이윽고 에바가 업무적인 통화를 하려고 방을 떠나자 케빈은 물감이 든 물총이 쏴 에바의 방을 망쳐버린다. 케빈의 행동은 에바를 향한 일종의 시위다. 그러나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에바는 케빈의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케빈의 물총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만다. 이 씬에 이르러 에바와 케빈은 서로의 행동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며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 이후로 케빈의 모든 의식, 행동은 에바가 원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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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자 관계의 단절은 케빈이 일부러 기저귀에 볼 일을 보는 씬에서 전환된다. 에바를 자극하기 위해 케빈은 변기를 사용할 줄 아는 데에도 기저귀에 볼일을 본다. 기저귀를 갈자마자 케빈이 한번 더 볼일을 보자 화가 난 에바는 케빈을 옮기다가 놓쳐버린다. 그로 인해 팔이 부러진 케빈은 병원에 가서 깁스를 한다. 에바는 케빈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에 가족공동체로 편입되려 한다. 그러나 케빈은 이에 반발한다.

 

케빈은 동양적인 음악을 틀어놓은 에바에게 음악을 끄라고 명령하며 상처를 만진다. 에바는 이 장면에서 케빈의 반항심에 패배한다. 케빈의 상처와 연결된 장면들에서 케빈은 에바와 자신의 대립을 감추기 위해 주위사람들에게는 우연히 다쳤다고 거짓말을 한다. 에바에게는 상처를 만지는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일깨운다. 에바는 죄책감에서 기인한 책임감으로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고, 아들을 책임지려고 한다. 케빈은 이러한 에바의 다짐을 밟아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때부터 케빈은 바게트나 시리얼 등 하나로 뭉쳐있는 것들을 뜯어놓고, 부수는 행동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이는 케빈이 앞으로 보여줄 행동에 대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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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둘이지만 하나


 

⌜케빈에 대하여⌟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다루며 부모가 된다는 행위의 중압감을 극적인 형식으로 형상화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퀀스의 배치, 소리와 사물을 통한 복선 설정, 색의 상징 등을 통해서 극의 긴장도를 높인다. 특히 유사성을 통한 전환이 두드러진다.

 

유사성을 통한 전환은 편집기법적으로 작품의 긴장감을 조절한다. 스토리텔링 콘텐츠에서 적당한 긴장은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지만, 반대로 러닝타임 내내 계속 되는 긴장은 오히려 집중도를 떨어뜨린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 보통의 스토리텔링 콘텐츠들은 긴장감을 풀어줄 수 있는 유머러스한 조연을 삽입하거나 편집적인 장치를 이용한다.

 

⌜케빈에 대하여⌟는 후자의 방법을 택해 과거와 현재를 전환해가며 내러티브 내의 긴장감을 조절한다. 이 과정에서  소리를 이용한 자연스러운 전환이 두드러진다. 작품 초중반, 에바는 사무실에서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 과거 속에서 에바는 부담스러운 사무실을 탈출해 급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반복적으로 누르는 소리는 이내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로 바뀌며 장면이 전환된다. 이러한 음향적 유사성에 기반한 전환을 통해 영화는 흐름을 유려하게 가져가면서도 긴장도를 조절한다. 사무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과정이 에바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가득찬, ‘긴장’의 시퀀스였다면, 소리의 유사성을 통해 전환된 장면은 일상 어느곳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전도사와 마주치는 ‘비긴장’의 시퀀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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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유사성은 음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장셴에도 존재한다. 영화는 미장셴들의 유사성을 통해서도 내러티브의 긴장감과 통일감을 강화시킨다. 케빈이 실리아의 기니피그를 죽인 것이 암시되는 장면에서 에바는 막힌 하수구를 뚫기 위해 찬장에 걸린 잠금쇠를 푼다. 이 잠금쇠는 아이들이 찬장을 열기 위한 것을 막기 위한 용도이며, 다르게 말하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잠금쇠는 위험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 잠금쇠는 결말부에 케빈의 체육관 학살 장면에서도 같은 역할을 한다. 체육관 장면에서 케빈은 스스로 잠금쇠를 걸고 체육관으로 들어간다. 잠금쇠를 거는 행위로써 케빈 자신이 위험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찬장 안의 하수구 용액으로 실리아의 눈을 다치게 한 것처럼, 케빈은 학교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케빈을 찾으러 학교로 왔을 때, 에바는 체육관에 케빈이 산 잠금쇠가 걸려있는 것을 본다. 실리아를 다치게 하며 가족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켰던 케빈은 학교 공동체도 내부에서 붕괴시켜버린다. 찬장의 잠금쇠부터 체육관의 잠금쇠까지 이어진 미장셴의 유사성은 관객들에게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며 극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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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는 굉장히 잦은 시퀀스의 전환을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전환하며 극의 긴장을 자유자재로 전환하는 방식은 케빈과 에바가 가진 편집증적 양상을 대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정신없는 시퀀스 배치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은 에바와 케빈의 관계이다. 에바와 케빈은 최초에 배타적인 가족 공동체였다. 케빈의 살해 이후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었지만 결말에 이르러 에바와 케빈은 포옹을 하며 가족 공동체로 돌아간다. 이때의 가족공동체는 최초에 배타적 태도를 간직한 것이 아니라 친근하고, 애정 어린 보편적 가족 공동체이다. 서로에게 무척이나 적대적이었던 에바와 케빈이 결말에 이르러 애정 어린 가족으로 변화하는 스토리라인은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에바와 케빈의 유사성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이러한 결말을 암시한다.

 

작품의 초반, 에바는 세안을 한다. 그러나 세안하는 에바의 얼굴은 잠시 케빈으로 바뀌었다가 돌아온다. 이 장면은 에바와 케빈이 동일시되는 현상이 일어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영화는 진행되어 케빈은 영화 초반에 에바가 보여준 모습과 동일시된다. 작품 초반에 에바가 가족 공동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과 동일하게 케빈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모두 부수며, 자신이 어릴 적 보았던 에바의 화신이 된다. 공동체 안에서 사회의 규범을 학습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완전한 공동체 속에서 자라지 못한 케빈은 에바의 자유에 대한 욕망과 불안을 학습하며 규범화할 수 없는 존재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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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케빈이 손톱을 뜯어 가지런히 놓는 장면은 작품의 초반에 묘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는 후에 에바가 대충 만든 오믈렛에서 계란껍질을 골라 가지런히 놓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영화는 이 유사성을 통해 케빈과 에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집증의 증상을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이 장면에서 편집증적으로 정렬되는 것이 각각 손톱과 계란 껍질이라는 것에서 의미를 더한다. 케빈은 엄마에게 받은 육체의 일부를 뜯어낸다. 에바는 출산의 상징인 달걀을 골라냄으로써 출산이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이 장면의 오버랩은 모자가 서로를 상징하는 것들을 자신에게 떨어뜨려놓으며 후에 극에 달할 모자의 갈등을 암시하기도 하는 동시에 그 유사성으로써 모자가 합치되는 결말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의 결말부에 에바는 케빈에게 왜 학우들과 가족들을 살해했는지 묻는다. 케빈은 이에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답하며,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자신의 욕구는 규명할 수 없는 것임을 내비친다. 그와 동시에 에바와 케빈의 포옹은 이루어지는데 이떄 공동체 안에 포섭되고 싶은 케빈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케빈은 성인 교도소로 가는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며 자신을 보호해줄 공동체를 찾고 그로써 에바와의 합일을 이룬다. 이때 케빈은 유아기부터 품어온 에바에 대한 반항심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도 유아적인 옷차림을 유지함으로써 유아기 시절부터 품어온 반항심을 극도로 표현했던 케빈은 결말부에 이르러 가족으로 회귀한다. 에바와 케빈의 포옹 이후, 에바의 임신을 암시했던 전자시계가 다시 등장한다. 시계로써 에바와 케빈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될 것임을 암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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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진정한 가족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반항, 살해, 편집증 등의 과격한 시련을 통해 형상화한다. 케빈이 살해를 통해 사회에서 튕겨져 나간 이후에, 에바가 겪는 트라우마는 과거, 자신이 아들에게 보였던 배타적 태도에 대한 응징이다. 영화는 에바가 아들과 멀어지는 과거와 트라우마를 겪는 현재를 편집증적인 방식으로 봉합해 보여주고 대중으로 하여금 가족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가족은 혈연이라는 특수한 관계로 이어져있지만, 결국 하나씩의 개인이다. 그러나 가족은 서로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과감히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나가 된다. 영화에 따르면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몇 명의 나를 죽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나를 비우고, 그 안에 가족을 채워 넣음으로써 내가 아닌 나를 만드는 일. 그것이 잔인하면서도, 행복한 ‘가족이 되는 일’인 것이다.

 

 

[권명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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