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0년이 지나 다시 본 '디지몬 어드벤처'는 무엇을 말해줄까? [만화]

나비처럼 날아가볼까
글 입력 2022.05.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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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마음 한편에 고이 품고 있는 인생 작품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귀하게 모시고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디지몬 어드벤처>다. 디지몬과 포켓몬이 양대 산맥으로 어린이들을 이끌었던 시절 당당히 디지몬 외길을 걸었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한 편당 500원을 지불하고 이 속엔 어떤 디지몬이 진화할까 설레하던 모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 당시엔 디지몬의 종류, 진화 등 만화의 외형적인 모습에 집중했다. 이야기는 극적인 진화를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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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0년이 훌쩍 넘어 다시 본 디지몬 어드벤처는 물론 짜릿한 진화 뒤에 더욱 찌릿한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었다. 탄탄한 설정에 따른 높은 개연성,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서 비롯하는 시사성, 선과 악, 선의 이면 등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화라기엔 꽤나 치밀한 구조가 짜여있다. 현실 세계에 치여 울고 있는 ‘어른 아이’라면 잠시 <디지몬 어드벤처>의 세계로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디지털 월드의 설정 1. 선택받은 아이들



어드벤처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은 모험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모험의 주체는 ‘선택받은 아이들’이다. ‘선택받았다’는 수동성과 ‘아이’라는 주체는 왠지 ‘모험’이 갖는 미지와 고난과 능동적인 이미지와는 멀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 두 설정만이 지난한 모험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행위에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게 한다.


모험은 두려움을 내포하며 무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든 불확실한 미지에서는 왠지 모험의 정당성을 찾기 마련이다. 단 하나라도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이 힘든 모험을 지속해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 설득하기 위해.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모험엔 별다른 이유가 없다. 확실한 목적이 있는 몇몇 여정을 제외하곤, 모두가 이 땅에 그저 태어나 그저 삶이란 모험을 하는 것이기에. 선택받아 이곳에 왔다는 막연한 이유 말고는 우리가 선택도 하지 않은 모험을 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란 없다. 


그렇기에 어른보다는 덜 선택적이고 덜 이해타산적일 수 있는 ‘아이’의 마음이 꼭 필요한 모험의 재료가 된다. 모험을 지속하기로 했다면, 내가 나아가지 않고는 지도를 그릴 수 없고 확신을 가질 수 없고 자신만의 모험의 이유와 필요성과 재미를 만들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떤 전제도 달지 않은 순박할 정도의 마음과 미숙할지라도 무모하게 수행하고 깨끗한 이상을 바라는 마음이 앞으로의 서사를 책임지는 중요한 원동력이자 전제가 된다. 인생이라는 압도적인 모험 앞에서 우린 모두 ‘선택받은’ ‘아이들’이라는 마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월드의 설정 2. 진화



디지몬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진화일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진화의 과정과 모습에 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디지몬 세계에서 진화는 ‘유년기 – 성장기 – 성숙기 – 완전체 – 궁극체’ 의 과정이 있다. 디지몬과 파트너는 서로의 유대와 크고 작은 시간의 경험으로 성숙기까지 진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여정과 더 악한 상대와 싸우기 위해선 그보다 높은 단계의 진화가 필요했는데, 진화는 단순히 시간이 지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문장’이다. 선택받은 아이들 각자가 가진 두드러지는 특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문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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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사랑, 지식, 빛, 희망, 성실, 순수, 우정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여덟 가지 가치다. 이들은 각자에게 배당된 문장의 가치를 긍정하기도, 두려워하기도, 의아해하기도 한다. 자신이 문장을 가져도 되는가, 이러한 문장이 과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의심한다.


대개 그 문장의 가치는 고조된 갈등에서 깨우치게 된다. 모험하며 맞게 되는 위기의 순간,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잃어버려 남루해지더라도 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가치(문장)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 순간 파트너 디지몬은 ‘완전체’로의 진화가 가능해진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얻어낸 가치는 깊이 새겨져 불안 속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방향성과 정체성이 된다. 


문장의 고유성과 유기성도 놓치지 않는다. 가장 먼저 빛을 발하고 힘을 얻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모든 상황을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상황에 부적합한 문장의 힘을 억지로 사용하려 할 때 그 가치가 퇴색되고 파트너 디지몬은 변이된다. 결국 마주치는 어려움에 가장 적합한 문장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가 존재하기 위해선 반드시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그대로 존재해도 된다는 따뜻한 위로가 되는 듯하다.

 

 


디지털 월드의 설정 3.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



디지몬이 사는 디지털 세계와 아이들이 원래 있었던 현실 세계는 서로 다르다고 인식됐다. 그 때문에 디지털 세계 안에서의 모든 존재와 모험이 가상의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디지털 세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평행세계라는 것이 밝혀지고. 이 둘의 세계는 연결된 통로가 있어 각각의 존재가 넘나들 수 있으며 다른 세계에 명확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디지털이 도입된 시기에 등장한 만화답게 디지털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시사점을 갖고 있다. 디지털 세계엔 다양한 종류의 디지몬이 있다. 그들이 디지털 세계에 존재한다 하여 단순히 ‘0’과 ‘1’의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몸을 움직이고 사고하고 집단을 이루고 고통을 느끼고 죽는 생명체다. '가상'은 '현실'이라는 개념에서 비롯한 축소된 정의로, 결국 하나의 명확한 세계라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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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계가 도입된 이후로 각 세계는 서로의 존재를 기반으로 유지되게 되었다. 두 세계 모두에 뿌리를 두고 자신을 형성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세계든 그곳에 투영된 자아를 공격하는 것은 하나의 실체를 뒤흔드는 행위가 된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여 행위의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대상을 향한 행위로써 판단하는 것이 더 적절한 판단 기준이라고 두 세계의 강한 연결이 입증한다.

 

 

 

디지털 월드의 설정 4. 선과 악



마지막으로 모험 서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선과 악이라는 소재 활용이다. <디지몬 어드벤처>는 단순히 주인공을 선으로, 주인공과 대립하는 것을 악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모험에서 만나 갈등을 겪는 디지몬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이들을 막으려는 존재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인위적인 힘으로 무차별한 공격성을 띠게 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고유 영역을 침범한 외부 생물을 경계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결국 대화를 통해 서로의 처지와 영역을 존중하며 동료가 되는 모습은, 선함이란 주인공이라는 ‘위치’가 아닌 그의 ‘행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그런 세계관에서 절대 악으로 표현되는 이들은 권력을 휘두르며 고유의 경계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을 괘념치 않는 디지몬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소수가 한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그들을 추종하는 자, 그들을 타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가 양분되는 모습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결국 모험의 최종 목적은 성장을 통해 절대 악을 제거하는 것으로 향하고, 어렵게 그것을 수행한다.


과연 선은 선하기만 한가?


<디지몬 어드벤처>의 묘미는 그들의 모험이 ‘절대 악’의 타도에서 끝나지 않는 것에 있다. 모든 악을 타도한 이후 선택받은 아이들은 심연으로 끌려간다. 그곳엔 ‘아포카리몬’이라는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포카리몬은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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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화 과정에서 도태된 열등한 종족들이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그건 우리가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화 과정에서 사라져 버린 존재, 나는 처절하고 슬프고 한 맺힌 마음의 집합체다. 슬프고 고독하게 어둠에서 사라져갈 때 너희는 찬란한 빛 속에서 행복하게 웃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뭘 어쨌길래 너희는 웃고 우리는 울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우리도 너희처럼 눈물과 감정을 갖고 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도록 만든 거지. 우리도 살아남아서 우정, 사랑, 정의를 외치며 이 세상에 몸 바쳐 일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필요하지 않고 존재가치가 없었다고? 더 이상 우리들의 권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

 

 

그의 말은 소수자의 절규가 가득한 현재 세상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이 말을 생물학적 진화로만 한정시킬 순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특정한 성격, 수행 능력, 신체, 기술을 가진 이가 주류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정해진 자연의 섭리, 불변의 진실이 아닌 만들어진 ‘보통’과 ‘정상’에서 멀어진 이들이 탈락할 가능성을 크게 설정한 구조적인 문제다. 탈락한 마이너들은 마땅히 탈락할 만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다. 아포카리몬의 말처럼 그들도 다르지 않다. 우정과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세상이 나아지는데 기여할 마음이 가득하기도 하다. 그들을 먼저 외면해버린 건 사회다. 


물론 특정한 개체가 생존에 유리하도록 형성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도 있다. 꼭 의도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의 탈락을 바라지 않아도 자연의 진화란 이뤄지는 것일 테니. 그러나 그 말 뒤에 숨어버리는 건 비겁한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지성과 문명은 이미 생존에 유리한 이들 외에 ‘어쩔 수 없이’ 도태된 이들이 정말 도태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악을 좇지 않고 선을 향하고 있다 생각할지라도 그 이면엔 악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항상 선을 향하고 있다는 착각과 '어쩔 수 없다'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험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라고 ‘아포카리몬’의 절규가 말해준다.

 

디지몬 어드벤처는 깊게 빠지면 굳이 나오고 싶지 않은 달콤한 늪과 같다. 물론 이것이 걱정이 조금은 덜 했던 어린 시절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고백하자면 가끔 정주행을 할 때 나이는 자꾸 먹는데 그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것인가 자책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 기억을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돌아갈 수 있는 명확한 지점이 있다는 건 불확실한 삶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가. 자꾸 흔들리는 어른일수록 오히려 이런 순간이 더 절실히 필요하지 않은가. 나에게 디지몬은 꽤 선명한 추억의 실체로서 나를 지탱해줄 것임을 깨달았다. 모두 그런 소중한 추억의 지점이 있다면, 외면하기 보단 바래지 않도록 잘 닦아주는 것이 어떨까.

 

 

[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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