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빛나는 기억의 조각,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 [공연]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게 되는 무언가
글 입력 2022.04.2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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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유독 사진처럼 포착되는 순간들이 있다. 특별한 날 먹은 맛있는 음식, 햇볕 좋은 날 걷던 길, 하염없이 이야기하던 적당히 소란하고 어두운 술집.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때가 와도 여전히 사진처럼 남는 기억의 조각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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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주인공 '톰'이 옷을 입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딸 '소피'는 여러 차례 당부한다. 재킷은 옷걸이의 맨 끝에, 넥타이는 주머니 안에 있다고. 그러나 넥타이를 발견하지 못한 '톰'은 결국 다른 재킷을 꺼내 들고, 빼곡하게 걸려있는 옷과 함께 과거의 기억 속에서 유영한다.


무대는 빛이 들어오는 단상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빛이 들어오는 단상은 '톰'의 기억 조각들이 재생되는 공간이다. 수업을 듣던 교실,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던 비탈길, 결혼식과 피로연 장소, 그리고 교통사고가 나던 차 안이 된다.

 

선명하지 않은 기억은 음악과 함께 끊어지고 늘어지는 것을 반복한다. 행복한 기억과 그렇지 않은 기억이 섞이면서 음악은 장단조를 넘나들기도 한다.

 

(우란2경과 같이 좌석이 적은 극장의 특성상, 배우의 표정과 배경 음악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만큼 특정 장면과 불쾌한 음악 소리가 견디기 힘들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란다.)

 

기억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며 환희와 괴로움 사이를 줄타기하는 '톰'과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소피'는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어쩌면 영원히 이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조각조각 찢어진 기억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울어버리고 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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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본 날의 저녁 하늘

 

 

'나'도 그렇게 빛나는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톰'의 과거는 마치 필름 영화를 보듯 눈 앞에 펼쳐진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순간들이 나를 그 속에 함께 있던 사람처럼 만든다. 빛나고 몽글몽글한 감정 때문에 속에서 무언가가 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기분도 든다.

 

힘들게 살아왔더라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 연극은 '내'가 '나'의 과거를 헤엄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결말을 아는 이야기라고 해서 과거의 지나친 순간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하여,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배우들은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관객이 자신의 일상을 환기하는 시간을 갖길 바랐다. 조기 치매는 하나의 극적 장치일 뿐이고 누구나 주인공을 보면서 '나에게 가장 강렬한 순간, 소중한 순간은 무엇일까'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내가 공연을 보러 다니는 날들이 그렇게 강렬한 순간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보러 간 날만 해도 푸르른 나무와 선명한 햇빛,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청량한 음악까지 완벽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길에 코앞에서 놓친 지하철은 허망했지만,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보이스 온리 브이앱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길동무라도 된 듯이 끝난 기억 또한 잊기 힘들지 않을까.

 

기억이 점차 사라지는 날이 오더라도 어떤 소품, 날씨, 향기, 혹은 음악으로 기억의 조각을 끼워 맞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참고 기사: 한국일보, 치매로 혼란스런 기억의 조각을 무대로…"소중한 기억, 돌아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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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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