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열며,
지난 주말, 대구로 놀러 갔다. 전주의 벚꽃이 모두 피는 걸 기다릴 수 없었다.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 식사 때까지 잠시 쉴 동안, 나는 마감을 했고, 친구는 옆에 앉아서 ‘금쪽같은 내 새끼’를 시청했다. 배우 이지현과 그의 아들이 나왔다. 화면에선 금쪽이와 오은영 박사님이 번갈아 가며 큰 소리를 내고, 화면 밖에선 친구가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그 상황이 어딘가 귀엽고 안타깝긴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무엇도 마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친구를 봤다. 친구는 멋쩍은 표정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엄마가 너무 슬퍼 보여서...” 나는 금쪽이 편을 들어야 할지 그의 엄마 편을 들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정할 수 없어서 이어폰을 꼈다.
그렇다. TV 속 금쪽이들보다 스무 살은 더 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금쪽이’다.
아, 왜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 거야?*
* 황시연 컬쳐리스트의 리뷰 ‘지금 누군가 필요한 당신에게 – 헬프 미 시스터’ 첫 구절을 빌려옴.

“약물 성범죄를 당할 뻔한 뒤 회사를 그만둔 수경, 그런 딸의 곁을 지키는 엄마 여숙, 이렇다 할 직장 없이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 천식,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큰 전업투자자 남편 우재, 수경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일찍 철들어버린 조카지후와 준후, 그리고 수경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틴챗’ 유저 은지와 수경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보라까지.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을 겪었지만, 수경의 가족은 생계유지를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플랫폼 노동에 뛰어들게 된다.”
나는 종종 과거의 금쪽이들을 상상한다. 어른들 말대로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에는 금쪽이가 없었을까? 그 아이들도 어찌 됐든 자연의 순리에 따라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을 텐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소설을 쓴 작가 이서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무엇이었을까. 저 아이의 두려움을 촉발한 것은.
여숙은 평화롭고 고요한 아파트 단지를 둘러보았다. 잘 정돈된 화단과 식별성 좋은 표지판, 적당한 높이의 과속 방지턱과둥근 반사경,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고, 범죄의 의도 같은 것은 품을 일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만 오갔다.
여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도 이런 아파트에 살았다. 그놈 역시 범죄의 의도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탔을 것이고, 이웃과 인사했을 것이고, 아들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로서 모두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툭하면 여숙을 성희롱하던 실장도 그랬다. 믿음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자 실장으로서 가족과 동료에겐 좋은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다.
다들 어쩜 그렇게 위선적인지. 구역질이 나는지. 가족에게 부끄럽지도 않은지.
불행 포르노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오징어 게임’이 그랬다. 연대는 아주 잠시고, 휴머니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런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모두 보고 나면, 남는 건 물음표뿐이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그런 인간이 만든 사회도 역시 악하니 그만 살라는 거야? 혹자는 ‘오징어 게임’을 두고 헬 조선을 아주 잘 반영했다던데, 그 면전에 대고 ‘오징어 게임’이 리얼리즘이라면 톨스토이가 지하에서 통곡하겠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가 질 것 같아서 참았다.
오히려, ‘헬프 미 시스터’가 리얼리즘에 가깝지 않나 싶다. 소설은 사람들의 아픔을 조명한다. 이때 소설은 이들이 누구에의해 어떤 계기로 아프게 되었는지를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내용은 사회면 기자가 자신의 르포에서나 다뤄야 할내용이라는 듯이 최대한 배제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이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아픈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내는지에 집중한다. 이는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마세요”란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
나이를 먹을수록 금쪽이들은 얌전해진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명예 금쪽이로서 다르게 부르고싶다. 바로 체념이다. 아무리 울고 떼써도 바뀌지 않을 것이니 포기하는 그런 마음.
우재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다.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이었다. 우울증인가 싶어 수경 몰래 병원에도 다녀왔다. 의사는 단박에 우울증이라고 했다. 어쩐지 반기는 얼굴이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우울증이 확실해보인다고 했다. 우재의 말을 듣더니,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마시고요, 한강 다리에도 그만 가세요.“라고 말하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우재는 약을 봉투째 버렸다. 단박에 우울증이라고 말하는 게 의심스러웠다. 고작 20분 상담한 끝에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프다고 호소하기를 멈추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상처는 여전히 아프다. 살아가야 하기에 그 마음을 안고 혼자 끙끙 앓다 보면 굳은살이 생긴다. 어쨌든 더이상 아프지는 않으니 내가 괜찮은가보다 싶다. 계속되면 자기가 아픈 줄도 모르게 되고 다른 사람이 ‘우린 그걸 아프다고 말하기로 했어’라고 알려줘도 스스로가 아픈 게 아니라며 부정하는 상태가 된다.
우재가 그렇다. 그 이유는 단순하지만 분명하다. ‘내가 남들과는 달리 별 볼 일 없는 사람일까 봐.’ 사회에서 ‘남들과 다른사람’은 허용되지 않는다. 인식이 아무리 나아졌다고 해도 말이다. 이 시선은 내가 남을 볼 때만 적용되지 않는다. 내가 자신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재’는 남들과 다르지 않기 위해서 ‘아픔’이라는 감각을 거세한 것이다.
의사가 우재의 증상을 단박에 알아차렸다는 서술 또한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건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의사도 처음부터 환자들을 함부로 진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고심하고 고심해서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세상에 얼마나 아픈 사람이 많았으면 환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진단 내려야 할대상으로만 보게 되었을까. 슬프지 않을 수 없다.
*
이런 아픔은 친구가 된 후에야 보인다. 친구가 되기 위해선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민 활동가와 소설가, 그리고플랫폼 노동자인 수경은 친구의 개업을 축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으나 서로가 못마땅하다.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은 공통점 하나로 뭉쳐 그 순간만큼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이들은 모두 프리랜서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정기적인 수입이 없다.
소설가가 수경을 바라보았다. 수경도 소설가를 바라보았다.
너만 힘든 거 아니야. 나도 힘들어.
너만 별 볼 일 없는 거 아니야. 나도 별 볼 일 없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그래. 그러니까, 마시자.
수경은 소설가와 건배했다. 소설가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와인 잔에 빠졌지만 수경도 소설가도 개의치 않았다. 소설가가잔을 비운 뒤 머리카락을 빼내 옆으로 휙 넘기자 시민활동가 은주 씨의 베이지색 니트에 보랏빛 와인이 튀었지만 수경은잠자코 있었다. 술자리에선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지금 그런 말을 해주기엔 은주 씨가 너무 멀쩡해 보였다. 술을 좀 더먹어야겠어. 수경은 은주 씨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이미 와인이 남아 있었음에도. 은주 씨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면서도 와인 섞인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정규에서 벗어난 삶은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들은 모두 괜찮은 척했지만 자본주의를 이루는 피라미드 속에 편입조차되지 못하고 그 근처만 부유하는 삶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민을 느껴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렇다. 이상한 애들끼리 돕고 살면 된다. 남이 아플 때는 그의 엄마나 언니가 되어 보살피고, 내가 아플 때는 딸이 혹은동생이 되어 보살핌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마치 어플 ‘헬프 미 시스터’처럼.
다 울었니? 이제 할 일을 하자.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근데 왜 나랑 결혼했어?”
수경은 틈을 두었다가 답했다. “그땐 그런 게 귀여워 보였어.”
“지금은?”
수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지금은 하나도 안 귀엽지?”
“귀여울 때는 지나갔지. 아직도 귀여우면 범죄야.”
수경은 그렇게 말한 뒤 잠든 척했다. 더 이상 우재와 대화하기 싫을 때마다 쓰는 방법이었다. 우재는 수경의 어깨를 흔들며 그러면 자기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해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 할 수 있는일을 계속 해야지.
세상의 모든 금쪽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