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초등학생은 무지개를 써

여전히 알록달록한 포스터를 보며 떠올린 사람들
글 입력 2022.03.0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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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텁한 공기가 가득한 방구석에 홀로 있던 날,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밖을 나섰다.

 

나는 취업준비생이라는 명분을 쥐고, 불편함을 가슴에 얹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묵직한 집안의 공기와 함께 가라앉을 뻔하던 차에, 바깥 공기를 마셨다. 아무 신발이나 우겨 신고 터덜터덜 집을 나왔다. 우리 동네 주변을 빙빙 돌다 보니 정처없는 발걸음이 좀 더 멀리 뻗어 나갔고, 어느새 발끝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정문에 다다랐다.


개학하기 직전이라 그런지 학교는 너무나 한산하고 고요했는데, 정문 울타리에 붙어있는 종이 한 장이 아주 요란 법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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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하지 않을 땐 학교 오지 않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공지문구인듯한데, 세상 이렇게 화려할 수가 없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 활용은 기본이고, 줄무늬, 하트, 점선 등 오만때만거 다 그려넣은 포스터였다.


그리고 그 포스터에 애정이 어린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 역시 어린 날에 똑같이 꾸몄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지각색 색연필과 사인펜을 들고 예쁘게 꾸미겠다며 친구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던 나. 세월이 지나도 평범한 초등학생의 미적 수준은 여전한 건지, 그 애들이 그린 포스터가 마치 과거의 내 것 같았다.

 

상념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구름에 가려졌던 햇빛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틈으로 비친 햇빛이 학교 정문과 운동장을 쬐자, 스산하고 고요했던 학교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무슨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전환되는 모습에 피식 웃고 지나가려던 찰나, 햇빛을 받아 따끈해 보이는 운동장이 눈에 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곤 오랜 시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나와 함께 색연필로 스케치북을 채우고, 술래잡기하며 운동장을 쏘다녔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 갔던가?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도 있고, 연락은 하지 않지만, SNS 친구 목록에 있어 간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아이가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그 애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흐릿해지는 기억이지만, 분명 이름도 얼굴도 희미한 누군가와 함께 6년의 세월을 이 아담한 학교에서 보냈었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붙잡아 선명히 떠올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나는 동창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였다. 첫사랑을 찾고 싶다거나, 꼭 보고 싶은 특정한 누군가가 있어서 아니다. 그저 가장 티 없이 맑게 웃으며 빛나던 시절을 함께하던 동급생들이 있었음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다들 잘 살아가고 있음을 보고 싶었다.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여전히 어디선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아야 나의 그 찬란한 날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느낄 것 같기 때문이다.


나와 울며불며 싸웠던 친구여도, 유치하게 눈치 주며 서로 미워했던 친구여도,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친구여도 상관없을 것 같다. 그저 나한테도 저런 예쁘고 소중한 어린 날이 있었다는 걸 증명해줄, 살아 움직이는 너희가 보고 싶어졌다.

 

한편으로는 속상했다. 파도에 조금씩 휩쓸려가는 모래알처럼, 자꾸만 나의 소중한 기억들이 부서져 간다는 게. 모든 것을 천천히 잊히는 게 당연한 순리겠지만, 알면서도 붙잡고 싶어진다. 손으로 집은 모래가 파도에 다 빠져나가도, 손가락 사이사이에 남은 모래알이라도 소중해서.

 

*

 

아련히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다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괜한 청승을 부렸나, 혼자 있는 집인데도 머쓱한 채로 방에 앉았다. 하지만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묵직하고 텁텁한 집안 공기는 없어졌다. 손가락 새에 조금 남은 모래알이 나를 들뜨게 하였기 때문이겠지.


행복한 나를 떠올리게 한 얼굴도 이름도 희미한 동창생들.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억 속 흐릿한 존재들 덕에 나는 가슴에 얹혀있던 불편함을 조금 내려놓고, 그날 가벼운 마음으로 자소서를 써내려갔다.


달라진 게 없었지만, 달라진 게 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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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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