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주문하신 문장을 내려 드립니다 [공간]
-
좋아하는 음악의 가사, 영화의 문구, 책의 구절 등을 음료로 만들어 마실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여기 문장을 주문받는 한 카페가 있습니다.
'다다랩'은 커피 감별사이자 바리스타, 티 소믈리에, 독립출판 대표, 그리고 출판 작가까지 겸하고 있는 '다다'가 운영하는 카페입니다. 소개 페이지를 보면 "주문하신 문장을 내려드립니다."라는 첫 문장이 보입니다. 어떻게 문장을 내려준다는 것일지 궁금해 직접 주문해보았습니다.
주문서를 보면 작업지시서, 원단, 소재, 부자재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선 작업지시서에 원하는 문장을 쓰고 원단에서 커피, 차, 칵테일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소재 혹은 부자재는 안 쓰고 넘겨도 되고, 꼭 원하는 느낌 혹은 피하고 싶은 맛이 있다면 자유롭게 표기해도 됩니다.
주문서에 요즘 즐겨 듣는 하현상의 'Gone Tonight' 가사 중 일부를 작성하였습니다. 커피는 차갑게 마시는 것을 선호하지만 오늘은 가사의 느낌과 비슷하게 온기가 식어가는 맛을 느껴보고 싶어 따뜻한 소재로 주문합니다. 원두의 열대과일 향을 선호하기 때문에 부자재 칸에 적어주고, 노래에는 전체적인 느낌과 어울리게 추가적으로 다크, 스모키함도 적어줍니다.
주문서를 완성해서 내면 1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안내를 받습니다.
잠시 기다리면 예쁘게 장식된 음료가 나옵니다. 음료와 함께 나온 종이의 앞면에는 작업지시서에 주문한 문장이, 뒷면에는 블렌딩 노트가 적혀 있습니다.
첫 모금을 마시자 가장 지배적으로 나는 맛은 '자두'였습니다. 뒤를 이어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 맛이 스쳐 지나가고 목넘김은 매캐하게 마무리됩니다. 식을 수록 산미가 올라오면서 단 맛이 눌려 씁쓸함이 강조됩니다.
이렇게 문장을 음료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다다랩에서는 '문장 블렌딩'이라고 부릅니다. 문장 블렌딩에 대한 설명을 보면 "커피, 차, 칵테일로 번역해드리는 작업을 합니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마실 수 없는 음료일 뿐만 아니라 음료라는 매개체로 번역을 받는 것입니다. 다다랩의 매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안암동에 자리 잡고 있을 때는 방문해보지 못했지만, 대학로에 있을 때도 망원동에 있는 지금도 다다랩에서는 다락방 같은 분위기가 납니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소품이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어 정말로 다다의 실험실(Lab), 혹은 작업실에 그대로 방문한 듯한 기분도 듭니다.
다락방의 이미지는 대체로 포근하고, 작지만 따뜻하고, 안락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게는 다다랩이 정확히 그런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대학로에 있을 때는 좌석이 네 자리 정도밖에 되지 않아 작고 아늑한 느낌이 있었고, 아래 사진에 보이다시피 가게의 유리창 너머로 바로 주택들이 보여 집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런 공간에 있는 만큼 굽이굽이 높고 좁은 주택가의 길을 지나 도착하였는데, 여름이라서 정말 덥고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주문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자마자 그 고생이 한 번에 씻겨 내릴 만큼 커피가 맛있었던 기억도 함께 있습니다.
당시 주문했던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그것을 각색한 연극 '알앤제이'에 나오는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커피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 커피였고, 그 여름날의 기억은 그렇게 달고 향기로운 채로 남았습니다.
망원동에 있는 다다랩도 비슷한 느낌을 안겨 줍니다. 가게가 맞나, 싶은 지하로 내려가면 자동문처럼 생기지 않은 자동문이 열리며 비밀스런 공간이 드러납니다.
넓고 탁 트인 바 자리의 1층과 좁지만 아늑한 2층 자리가 있는데 개인적으론 2층 공간이 굉장히 다락방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따뜻함과 안락함을 지닌 공간을 선호하는 사람으로서, 다다랩이 어디에 있든 들어가는 순간 '다다'의 공간에 초대받은 느낌이 들어 좋았습니다.
어떤 문장이든 사람들은 주문서에 문장을 쓰는 동안 고민을 거칩니다. 저도 방문할 때마다 그 전날, 혹은 가는 길에 긴 고민을 하고 장소에 도착해서도 여러 후보를 두고 고민하다가 문장을 적어 냈습니다. 특정 연극을 보며 느낀 감정, 음악을 들으며 했던 생각까지 공유할 수는 없겠죠. 음료는 십 분이면 완성되어 나오니까요. 그렇지만 고르고 골라서 낸 문장들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응축된 시간을 받고 '다다'의 생각을 거쳐 번역된 음료는 분명 시간과 감정의 공유가 담겼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생각해서 쓴 문장이라도 그 순간의 감정과 쓰는 시간이 담겼기에 짧더라도 감정의 공유가 이루어졌을 겁니다.
창작자의 생각, 그걸 향유한 본인의 생각, 그리고 음료로 번역되어 나오는 과정의 생각까지. 다다랩의 음료는 단지 문장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의 생각이 응축된 만큼 음료에서도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음료를 번역가의 공간 안에서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참 매력적이지 않은가요? '다다'의 공간에 초대받는 기분을 더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합니다.
[정예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