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ENFP의 상상 2

개인기 학원
글 입력 2022.01.2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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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기자랑이 싫다. 물론 처음부터 싫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교 신입생 OT에서 별것 아닌 이유로 무대에 끌려가 막춤을 춘 이후, 나는 한동안 여기저기서 ‘OT 때 걔’로 불렸다. 그 인상이 희미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는 내가 첫 학기를 거의 없는 사람처럼 보낸 이유 중 하나였고, 한동안 자려고 누울 때면 그 순간이 생각나 나무토막 같은 몸을 사방으로 뒤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차라리 밖을 향한 분노로 바꾸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다고 생각했고, 이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듬해 나는 신입생 OT의 준비위원회에 자진해서 들어갔다. 고생길이 훤한 직책인데다 학과 활동에도 딱히 흥미가 없었던 내가 거기 들어간 이유는 딱 하나, 신입생 장기자랑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첫 기획 회의에서부터 나는 집요하게 하나만 팼다. 이 세상에 장기자랑을 꼭 해야 하는 이유 따위는 없으므로 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지만, 대부분은 뭐 그런 걸로 유난이냐는 반응이었다. 나의 부끄러운 순간을 대충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내 날선 태도를 조금 뜨악해했다.

 

마침 일부 대학의 악습이 국민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있었던 시기라, 그럴싸한 명분까지 등에 업은 나는 가열하게 장기자랑 무용론을 주장했다. 나는 티 안 나게 집단에서 소외되었고, 어느 날엔가는 내가 뒤에서 욕을 먹고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장기자랑과의 싸움에 진심이었던 나에게 그런 걸로 상처받을 여유는 없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명분과 갈 곳 잃은 복수심으로 나는 미친개처럼 날뛰었고, 결국 그해 OT에서는 신입생들에게 장기자랑을 시키지 않았다.

 

*

 

그러나 험난한 취업 시장에서 나는 내 손으로 쓰러뜨린 나의 적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에 지원서를 넣었던 나는 한 뉴미디어 콘텐츠 기업의 다대다 면접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자려고 누울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비망록에 한 페이지를 더했다. 그런대로 무난하게 끝날 것 같았던 면접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만든 것은 한 지원자의 현란한 춤사위였다.

 

-K씨는 스트릿 댄스가 특기라고 쓰셨네요?

-네. 어렸을 때부터 춤을 좋아했고, 대학에서는 스트릿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했습니다.

-요즘 또 스트릿 댄스가 화제잖아요? 혹시 짧게라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춤을 쉰 지 좀 됐지만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간 그녀는 노래도 없이 냅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시원시원하게 팔다리를 뻗으며 모 TV 프로그램에 나왔던 안무를 선보인 그녀는 엔딩 포즈까지 야무지게 잡은 다음 여기까지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앞선 겸손이 무색해지는 퍼포먼스였다. 면접관들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때 나는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기회 안 드렸으면 서운할 뻔했네요.

-다른 분들도 한번 보고 싶은데, H씨도 뭐 보여주실 거 있나요?

 

얄궂게도 다음 순서는 무대를 찢고 돌아온 K의 옆에 있던 나였다. K가 춤을 추던 순간부터 이 상황을 예상했던 터라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그때부터 내가 뭘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했음에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시계 안 보고 시간 맞추기? 귀 움직이기?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우선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뱉었다.

 

-준비할 시간이 조금 필요한데, 나중에 보여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럴싸한 임기응변이라고 생각했지만 엄청난 자충수였다. 다른 지원자들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무려 ‘준비’까지 필요한 내 개인기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올려놓았다. 춤과 노래 정도는 예사였고, 끝에 있던 사람은 당돌하게도 면접관에게 제시어까지 요구한 다음 프리스타일 랩을 선보였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끼는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들 못지않았다. 화려한 무대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제가 취미로 마술을 했는데, 지금 도구가 없어서 보여드릴 수 있는 게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개인기가 없어서 떨어진 건 아니었겠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은 편했다. 그렇지만 당장 그 자리에 다시 보내준다고 해도 뭔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불합격 문자를 받은 날 밤, 나는 친구 Y와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왜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한테 끼를 바라지?

-그러게. 콘텐츠 기획하는 능력이랑은 좀 다른 부분 아니냐?

-모르겠다 진짜. 다른 데도 다 이럴까?

-다 그런 건 아닐걸? 들어보니까 거기도 그냥 분위기 타서 시킨 것 같은데.

-이게 다 처음에 헤이 마마 춘 사람 때문이라고.

-너도 뭐라도 하지 그랬어. 너 뭐냐, 이수만 성대모사 잘하잖아.

-듣는다고 알까?

-그건 그래.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거 하나라도 있으면 되는데.

-유명한 거 하나씩 해보자. 내가 평가해 줄게.

 

이선균부터 이정재까지, 단 한 개도 비슷한 것은 없었다.

 

-지금이라도 춤을 배워야 하나?

-성대모사보다는 나을 것 같아.

-근데 그런 데 가면 완전 기초부터 배워야 하잖아. 어디 가서 개인기로 써먹을 정도만 가르쳐 주는 데 없나?

-아예 개인기만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있어도 웃기겠다.

-복면가왕처럼? 거기 출연자들 개인기 강제로 만들어주는 방 있다며.

-그렇지. 수강생 목소리랑 비슷한 연예인 성대모사 가르쳐주거나, 비보잉 동작 한 두 개 정도만 알려주는 거지.

-그런 학원이 잘 될까?

-하긴 그 조금 배우려고 학원 다니는 사람은 없겠지.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뛰어넘는다고 했던가. 호기심이 동해 인터넷에 ‘개인기 학원’을 검색하자 가장 먼저 나온 기사의 내용은 상상 이상이었다. 취업 준비생이나 신입 직장인들 사이에서 취미 스펙 경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매년 초 학원에 등록하는 수강생의 70%가 장기자랑 거리를 만들려는 예비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이라는 댄스 학원 강사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에 묘한 위안을 느끼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 세상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을까. 남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실격일까. 그렇지만 내가 온 힘을 다해 부딪혀 봤자 바뀌는 건 고작해야 단과대 OT의 신입생 장기자랑 정도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나 이외의 것을 바꾸는 일은 점점 어려워졌다.

 

*

 

긴 고민 끝에 나는 모 실용음악 학원의 취미반에 등록했다. 노래를 부르는 건 그런대로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여기가 나랑 비슷한 처지의 대학생이나 취업 준비생에게 꽤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배정된 강사님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꽤 많이 보셨는지, 첫 수업 때부터 내가 원하는 걸 정확하게 짚어 주셨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원 없이 노래를 불렀다.

 

몇 번 수업을 듣고 나자, 강사님은 같은 취미반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다들 실력이 비슷하니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되고, 자신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말도 함께였다. 좋은 연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별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나는 학원에 있는 조금 큰 연습실로 향했다.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안 그래도 조용한데 방음까지 완벽한 탓에 방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천년의 어색함도 잠시, 약속한 시각이 되자 강사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눈짓으로 인원을 파악하고는 음향 기기들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점검을 마친 그는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처음으로 노래를 부를 사람을 호명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범수 씨부터 한 번 해보실까요?

 

흔하지만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이름의 앳된 학생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뭐랄까, 아주 닮은 건 아니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안경을 쓴 모습이 동명의 가왕을 생각나게 했다. 그는 손에 마이크를 쥐고 강사님이 음악을 틀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누구나 알 법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나는 소리 없는 감탄사를 뱉었다. 나는 그가 김 씨임을 확신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난 못 가...

 

불안하던 음정은 후렴에 이르러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원곡 가수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나는 그가 길지 않은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검증의 순간을 거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어떤 결심으로 여기까지 왔을지 생각했다. 아, 당신은 대체 어떤 싸움을 해 온 것입니까.

 

그의 노래가 끝났다. 나는 진심을 담은 박수를 보냈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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