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겨울이야, 여행을 떠날 시간이야 - 윤하 'END THEORY' [음악]

낯선 별조차 사랑하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글 입력 2021.12.2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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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왔다. 이제 한겨울에 들어섰다. 보일러 온도 1도에 예민해지고, 베란다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낮은 짧고 밤은 길다. 어떤 날은 짧은 낮에 내 게으름을 미루어 두고 긴 밤이 오면 계절의 낭만을 마신다.

 

그러나 어떤 날은 짧은 낮을 지독히 원망하며 길어진 어둠을 덮는다. 참으로 감정에 매몰되기 쉬운 계절이다. 성큼 다가온 연말에 자책과 후회에 빠질 수도 있고, 성큼 다가온 연초에 쉬이 들뜨게 될 수도 있다.

 

어쨌든 하던 일은 모두 놓아줬고, 새로 할 일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한순간에 텅 비어 버린 두 손을 어디에 놓을지 몰라 방황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다. 손에 잡을 무언가가 필요하다. 쥐고 있던 것들을 놓은 공허함은 잊을 정도로 적당히 무겁지만, 새로 쥘 것들을 위한 힘은 남겨놓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가벼운 것으로.

 

작은 선물 상자가 딱 좋을 것 같다. 열면 오르골처럼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손난로처럼 따뜻하고, 너무 작진 않아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해야 할 때까지 잠깐 기댈 수 있으면 좋겠는데.

 

똑똑, 문밖에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조심히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연다.

 

한순간에 난 우주선 한 칸에 타 있다.

곁에는 '너'가 있고,

손에는 미처 읽지 못한 상자 속 작은 메시지 카드뿐이다.

 

"자, 겨울이야, 여행을 떠날 시간이야."

 

 

 

YOUNHA(윤하) 6th Album 'END THEORY'


 

 

 

딛고 지내온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사랑하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

모든 탄생은 끝에서 시작된다.

예외는 없도록 설계되어있다.

 

- YOUNHA 6th Album 'END THEORY' 앨범 소개

 

 

강한 앨범이다. 지나온 시간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오래된 마음이 들린다. 우리는 모두 시공간의 제약이라는 그물에 걸려 불안감에 버둥대는데, 이 앨범은 '더 이상의 시공간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노래를 순서대로 쭉 듣다 보면, 정말 그런 것 같이 느껴진다. 바로 지금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한 것들은 나에게 얼마나 긴 시간과 얼마나 넓은 공간이 주어졌든 간에 내가 어떻게든 사랑할 것이었다.

 

 

여행의 초입, 'P.R.R.W.'를 들으며 나는 지난 시간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과거에서 온 메시지는 반드시 행복한 미래를 보장한다고 하기 어렵고, 미래에서 온 메시지는 미래의 아름다움에만 매몰되어 현재의 나를 무시하려 한다. 과거는 미래를 모르고, 미래는 현재를 모른다. 과거에 사무치듯 아팠던 기억도, 어쩌면 찔린 듯 더 아파져 올 미래도 현재의 나에게는 아무런 조언도 주지 못한다.

 

과거의 나를 보내고 오롯이 혼자 남은 듯한 현재의 나는 조금씩 불안해진다. 그러나 '나는 계획이 있다'는, 나는 혼자가 아니었음을 들려준다. 과거의 나와는 이별했지만 내 곁에는 여전히 현재의 '너'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함께 하는 모험에 완벽하고 세세하게 짜인 계획은 필수품이 아니다. 멀리 나아갈 것, 함께 갈 것, 계속 갈 것. 나의 여행에서는 이것들만으로도 여권을 대신할 수 있었다.

 

내가 마음속에서 홀로 세웠던 목표까지의 여행을 마치면, 블랙홀처럼 깜깜한 시야에 또 성큼 두려움이 다가온다. 하지만, 끝은 과연 끝이었을까? 저 멀리 태양계를 둘러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르트구름'처럼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넘어가는 석양을 잡을 듯 힘차게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처럼 경쾌한 기타 반주에 발을 구르고 양손을 맞부딪히다 보면, 오르트 구름까지는 생각보다 금방일지도 모른다.

 

꽤 멀리 떠나온 여행.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아도 달려온 항로 끝에 약하지만 분명한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여 있었지만 흐르고 흘러 바다를 향하고,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 큰 북 같은 소리를 내는 '물의 여행'처럼 나의 여행도 더 멋있어질 듯한 예감이 든다. 이미 큰 파도를 이룬 물방울들과 오케스트라 반주가 내 등을 밀어주고 있다.

 

가끔 여전히 과거의 인연이 떠오른다. 그 시간 때문에 아팠지만, 그 시간 덕분에 아픈 줄을 알았다. 과거에 기대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좀 더 자란 지금의 내가 어리고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를 쓰다듬는 일은 제법 괜찮은 일이었다. 치기를 부려 그때는 도저히 하지 못했을 말을 이제는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잘 지내'. 나는 이제 '반짝 빛을 내'.

 

현재만 바라보고 달려가던 중이었는데, 지구의 생명은 '6년 230일'이 남았다고 한다. 이대로면 시간은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영원할 것 같았는데, 기후 위기 시계는 쉴 생각이 없는 듯하다. 'Truly', 이제 와서 사랑을 찾자고 모든 걸 그만둘 수는 없지만 정말 남은 시간이 6년 230일뿐이라면 6년하고도 231일이 되는 날을 함께 맞을 사람은 꼭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 여행 중, 사랑에 욕심내기에 시간은 너무 짧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을 세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더더욱 시간낭비인 것 같다.

 

곧 지구와 함께 내가 사라진다면 나는 왜 이 땅에 서게 되었을까? 고민이 시작된다. 누군가 날 이 '별의 조각'에 두고 가 버린 걸까, 이 별이 실수로 날 만들어 버린 걸까. 여전히 멈추지 않은 여행의 한가운데서 정답을 고민할 생각은 이미 없다. 잠시 단순해지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이번 여행을 시작하며 결심한 것,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것. 시작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 뒤의 시간은 모두 나의 선택이다. 지금은 선택 이후의 길에 집중할 시간이다. 이 별은 이미 내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빛을 내고 있다.

 

내가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는 서서히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나는 이 광활한 우주의 중간 정류장에 '너'를 내려 주려 한다. 다른 곳에 가게 되더라도 '하나의 달'을 보게 될 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기로 하자. 때로는 흐린 날씨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계속 같은 달을 향해 메시지를 보내자. 얇고 가볍지만 별의 조각들을 통해 결국 서로에게 닿게 될 테니까.

 

어쩌면 이건 새로운 여행길이 아닌 것이었을까? 눈을 깜박, 하는 순간 처음에는 낯설기 그지없던 우주선 안이 익숙하지 그지없는 집 안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이 실제로 어디든 간에 나는 매일같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별에 착륙하게 되더라도, 그곳만의 전리품을 찾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흐른다. 나는 그 별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제 나에게 선물 상자를 보냈던 이를 추억한다. 상자에 발신인은 쓰여 있지 않았지만 사실 어렴풋이 그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다. 주춤거리던 내 어깨에 늘 손을 올려주던 사람. 너무 세게 밀어서 내가 겁내지 않게, 그러면서도 어깨에 놓인 손의 온기는 분명히 전해지게. 그 적절한 온도와 강도 덕에 나는 여기까지 왔어요, 나만 들리게 속삭여 본다. 모순적이지만, 그는 나를 별안간 떠나게 한 사람인 동시에 나의 'Savior', 구원자였다.

 

많은 계절이 지나면 언젠가 모두 다시 만날 거라 믿는다.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오르트구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자. 나는 또 나아간다.


 

YOUNHA 6th Album 'END THEORY'

2021.11.16

 

1. P.R.R.W.

2. 나는 계획이 있다

3. 오르트구름

4. 물의 여행

5. 잘 지내

6. 반짝, 빛을 내

7. 6년 230일

8. Truly

9. 별의 조각

10. 하나의 달

11. Savior

 

 

[이건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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