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설 '게르니카의 황소', 폭력 속에서 발을 내딛다. [도서]

글 입력 2021.12.25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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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리 장편소설 <게르니카의 황소>


 

케이트는 열 살 이전의 기억을 모조리 잃었다. 그녀가 본인의 과거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남편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것뿐이다. 그 사건의 충격으로, 케이트는 완전한 기억상실이라는 축복을 얻었다.


케이트는 정신과 의사인 칼 번햄의 막내딸로 번햄 가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생일 선물로 받은 <게르니카>의 복제품에서, 그림 속 황소가 움직이거나 그림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칼 번햄은 케이트가 그녀의 친모에게 광기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말하며 정신질환 약을 처방한다. 그러나 케이트는 약을 먹은 후로 황소가 그림 밖으로 나오는 일이 뜸해지고, 그림을 그릴 영감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 약을 거르다가 정신 치료를 받게 된다.


정신 치료 후 다시 약을 꼬박꼬박 먹게 된 케이트는 그녀가 원하는 정도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는 약을 다시 걸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열일곱 살에 약을 걸렀을 때는 그림 그리는 게 너무나 쉬웠으니까. 그렇게 케이트는 몰래 다시 약을 거르고, 어느 날부터 꿈에서 에린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꿈에서 본 에린의 그림은 케이트가 그토록 그리고 싶었던 완벽한 걸작이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 그림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케이트는 에린의 그림을 현실로 훔쳐오기 위해 꿈과 현실을 매일같이 오가게 된다.


 

 

‘미칠 것 같은’ 기분



[꾸미기]게르니카.JPG

 

 

본 도서를 읽기 전, 그리고 읽은 후에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다시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참상, 폭력과 공포를 담아낸 거대한 그림.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진 케이트가 어떤 이유로 이 작품에 그토록 매료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


<게르니카>에서의 정형적이지 않고 괴기스러운 표현처럼, 케이트의 관점에서 쓰인 서술들은 굉장히 혼란스럽다. 그녀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긴장된 상태로 보인다. 독자들은 소설의 중후반에서 마치 케이트처럼 길을 잃게 된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케이트와 함께 광기 속을 헤쳐나가야만 한다.


통제하기 어려운 무의식의 영역에 대해 개인적으로 공포감이 커서, 책을 계속 읽기가 많이 힘들기도 했다. 독서 중 짧은 잠에 들었을 때도 이 책에 관한 긴 악몽을 꾸었을 정도로. 현기증이 나서 몇 번이고 책을 덮었지만, 다시금 책을 펼쳐 들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가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도, 그리고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다음 단계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던 것처럼. 나 역시 불편한 기분을 안고도 한 장 한 장 넘기며, 끝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읽어냈다.


‘게르니카의 황소’의 세밀한 표현은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는 케이트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이는 독자가 몰입감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도록 한다.


 

 

폭력 속에서 뜨인 눈



사람이 약해졌을 때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기 마련이다.

 

상황에 따라 이건 꿈 혹은 현실일 거라고 굳게 믿으며 되뇌는 케이트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상관없는 거라고 다짐한 후에도 그녀는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간절한 바람 속에 들어서게 된다. ‘이건 꿈일 거야. 꿈이어야만 해.’ 하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믿어왔던 과거마저 거짓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가 느꼈을 공포감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게르니카의 황소’에서는 케이트가 겪는 폭로와 분열만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교묘하게 감춰진 폭력 속에서 눈을 뜨고, 분노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다한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초콜릿 케이크를 골랐다. 직원은 내게 초가 몇 개 필요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한 개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나는 센트럴파크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내 아파트 테라스에 앉아 케이크에 촛불을 밝혔다. 오늘이 온전한 나 자신으로 태어난 첫 번째 생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게르니카의 황소

 


그녀에게 케이크는 죄책감과 망각의 시작이자, 잊혀버린 순수한 바람이다. 그런 케이크에 초 하나를 밝히고는 자신에게 선물하는 케이트를 보며, 나는 그녀가 분명히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꾸미기]게르니카의황소_표1_띠지유.jpg


 
 

송진희 컬쳐리스트.jpg

 

 

[송진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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