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진화한 유인원의 집 - 포르투갈의 높은 산
-
목차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
인간에게 집이란 뭘까?
17세기 중반, 율리시스 신부는 상투메 섬에 부임하여 아프리카 노예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홀로 떨어진 이방인의 시선으로 그곳 노예들의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다. 집은 잃은 자신과 집에서 도려내진 사람들. 그는 당시의 종교 당국에 동등을 역설하지만 돌아온 것은 파문이었다. 고독한 상투메 섬에서 그는 일기에 끊임없이 적는다. “이곳이 집이다.”
그것은 격정과 고독 속의 자기 암시에 불과한 것일까?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율리시스)의 이야기는 집으로의 귀환을 그린다. 그 이름처럼 끊임없이 집을 갈구하는 율리시스 신부의 여정의 끝에는 그가 혼을 담아 만들어 낸 십자고상이 있다. 실로 그보다 더한 구원의 상징은 없을거다. 그 십자고상은 집을 잃은 자들에게 기적을 선사할 수 있을까?
1904년 포르투갈에 집을 잃은 또 다른 사내 토마스가 있다. 그는 불과 일주일 사이에 연인과 아들, 그리고 아버지를 잃었다. 우연히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와 마주한 그는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해 떠난다. 그것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자신에게서 집을 빼앗아간 세상과 신에 대한 반항이자 복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_35쪽
‘포르투갈의 높은 산’의 저자 얀 마텔은 ‘파이 이야기’로 유명한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다. 익히 들어왔지만 읽어본 적은 없다. 별다른 이유도 없건만 ‘파이 이야기’는 나에게 책장에 꽂힌 뒤 빛을 보지 못한 여러 책들 중 한권으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처음 한 두장 읽고나서 떠오른 것은 흐릿하고 전형적인 이미지였다. 영웅의 귀환처럼, 로드 무비의 장면처럼, 혹은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소설들처럼. 기벽을 가진 청년이 불화와 고독을 곱씹으며 여정을 시작하고 그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내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무난한 전개 말이다.
그러나 토마스의 여정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무난하다고, 평탄하다고 할 수가 없다. 난장도 그런 난장이 없다. 그의 내면적 사색은 몰아닥치는 현실의 풍파에 밀물과 썰물처럼,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르고 요란하게 요동친다. 여정의 순간에 집중하면 지루할 틈이 없을뿐더러 솔직히 그의 마지막이 막연히 궁금해지지도 않는다. 당장에 닥친 일들이 너무도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만 놀라버리고 말았다. 본래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전반부를 조금 읽고 나면 당장에 마지막 장으로 달려가 후기와 엔딩을 살펴보곤 한다. 그렇게 하면 글을 읽으면서 내내 불안하거나 긴장되거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에는 같은 행동을 하다가 작가의 말에서 <강력 경고>를 당하기까지 했다. 후기부터 읽어대는 폭주족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나, 부디 스포일러를 읽지말고 앞으로 돌아가 읽어달라는 경고문이었다.
그런데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읽으면서는 뒤로 달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토마스가 목적지에 다다를지 궁금하지 않아서 였을까? 그가 불운할까 불안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의 여정을 따라가느라 벅차 폭주족처럼 먼저 달려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토마스와 같은 속도로 1부의 마지막 즈음에 도착했다. 십자고상을 찾는 여정에서 토마스는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그 무엇도 마지막의 고난에는 비할 바가 되지는 못한다. 그가 실수로 아이를 차로 쳐 죽인 것이다. 충격과 혼란에 빠져 끊임없는 구역감마저 느끼는 토마스가 마침내 마주한 십자고상의 형상은 가히 충격적이다. 토마스의 두 눈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 분은 침팬지의 모습으로 보인다. 율리시스 신부가 일찍이 알았던 것처럼, 인간은 타락한 천사가 아닌 진화한 유인원이었던 것이다. 토마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며 울부짖으며 외친다. “아버지 당신이 필요합니다!”
***
그리고 2부. 집으로. 토마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이야기는 삼십여년을 뛰어넘어 1938년의 포르투갈이다. 대체 토마스는 어디로 간 것일까? 추측은 어렵고 해답은 요원하다.
이야기와 여정이 닮았다 한다면,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세 이야기는 포르투갈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안개처럼 뿌연 수십년 시간의 간격을 두고 느슨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얽혀있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집이었던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여정을 떠나고, 그 끝에는 침팬지가 있다.
2부는 보다 환상적이고 미스테리한 요소로 가득하다. 토마스의 이야기가 자동차를 타고 길쭉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그렸다면, 병리학자 에우제비우의 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그의 좁은 병원 사무실에서 단 하룻밤의 사건을 그린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긴 삶을 관통하는 여정과 다르지 않다.
새해로 넘어가는 날 밤, 에우제비우의 사무실에 죽은 아내 마리아가 방문한다. 그녀는 성경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테리 소설이 얼마나 유사한지, 예수의 기적이 암시하는 안락한 구원과, 그에 다다르기 위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고 떠난다.
그녀가 떠난 뒤, 에우제비우의 사무실에는 마리아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여성이 찾아온다. 그녀는 에우제비우에게 죽은 자신의 남편을 부검해 줄 것을 요청하며 지나온 삶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삼십여년 전, 토마스가 뺑소니한 아이의 부모로, 아이의 죽음 이후 공허해진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일어나는 일은 가히 판타지다. 죽은 시체의 몸에선 토사물이, 온갖 잡동사니들이, 그리고 새끼곰 한 마리를 껴안은 침팬지 한 마리가 나온다. 마리아는 죽은 남편의 몸 안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웅크리며 ‘여기가 집이야’라고 말하며 봉합을 요청한다.
***
피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려운 동물의 기술을 익혔다. 그는 시간이라는 경주에서 족쇄를 풀고 시간 자체를 음미하는 법을 배웠다. 피터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오도는 바로 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처음에 그는 한눈을 팔고 싶었다.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머릿속으로 같은 영화를 돌려보고, 후회하고 조바심치며 잃어버린 행복을 갈망하곤 했다. 하지만 강변에 앉아 빛나는 휴식의 상태에 젖는 데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오도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가 오도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놀랍다. _365~366쪽
3부 ‘집’은 또다시 수십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캐나다의 상원의원 피터는 아내 클래라와의 사별 후 그를 이루고 있던 삶의 가치들을 거의 모두 잃게 된다. 공허한 삶을 살던 중 그는 유인원 연구소에서 우연히 만난 침팬지 오도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에게 남은 물질적인 유물인 집, 차, 상원의원이라는 명예로운 커리어 모두를 내려 놓고 오도와 함께 자신의 뿌리인 포르투갈로 떠난다. 낯선 땅, 낯선 사람, 그리고 낯선 언어로 가득한 그 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고 순수하며 오직 현재를 살아가는 동물인 오도와 교감하며 공허를 극복하고 현재라는 순간에 충실한 평화로운 시간을 얻게 된다.
***
그들은 모두에게 집은 사람이었고 사랑이었다. 사랑했던 사람들. 그들은 그걸 상실했고, 여정을 떠났다. 하느님의 아들이 약속한 구원을 집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야기의 시작을 연 율리시스라는 신부의 이름에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정복지 내지는 도달점과 같은 제목에서 상실에 빠진 인물들이 마침내 약속된 집의 문앞에 도달하는 순간을 상상했지만 흐릿하고 아리송하기만 하다.
토마스가 목격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다. 지대는 완만하게 이어진다. 집을 잃고 떠나온 토마스는 십자가에 매달린 침팬지의 형상을 보고 흐느낀다. 인간은 멋대로인 동물일 뿐, 더 나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간절히 부른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느님일까? 죽은 아버지일까, 아니면 율리시스 신부? 하지만 그가 부른 것이 그 누구든 간에,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저 멀리서 울부짖는 이방인을 돕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낡은 교회의 신부님이다.
이야기를 그렇게 읽었다. 결국 구원의 가능성은 인간에게 있다고 믿으며 책을 덮었다. 토마스는 인간이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진화한 유인원일 뿐이라는 사실에 짓눌렸지만, 그건 격하가 아니라 도리어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피터의 공허를 오도가 매꿔주었던 것처럼, 시체 속의 침팬지가 결국 인간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처럼, 침팬지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신의 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피터의 생각대로 인간은 더 이상 유인원처럼 살지 않는다. 현재가 아닌 미래와 과거를 유령처럼 떠돌며 괴로워하는 인간에게 순수하면서도 이치에 맞게 행동하기란 지나치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진화한 유인원이니까, 우리가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 내면의 가장 날 것의 모습은 다른 이를 구원하는 집의 형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
포르투갈이 높은 산은 혼자 여러번 읽거나, 여럿이서 함께 읽기 참 좋은 책이다. 읽을 때마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여정을 눈 앞에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김민혜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