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질문, 삶에 대답하겠다는 신호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열 명의 한국 그림책 작가가 말하는 ‘돌파하는 힘’
글 입력 2021.11.1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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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진 기이한 힘에 대해 곱씹던 어느 날, ‘돌파하는 힘’이라는 두 마디 단어가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오래 기다린 이해가 번개처럼 도착한 순간, 흩어졌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았다. 두 마디 단어를 붙잡고 다시 그림책을 열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북유럽 그림책이 건네는 말』 등의 책을 집필해온 ‘최혜진’ 작가가‘돌파하는 힘’이라는 주제어로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책이다.

 

권윤덕 작가 (『만희네 집』 등), 소윤경 작가 (『레스토랑 sal』 등), 이수지 작가 (『파도야 놀자』 등), 유설화 작가 (『슈퍼 거북』 등), 고정순 작가 (『가드를 올리고』 등), 이지은 작가 (『이파라파냐무냐무』 등), 유준재 작가 (『시저의 규칙』 등), 노인경 작가 (『사랑해 아니요군』 등), 권정민 작가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등), 박연철 작가 (『떼루떼루』 등), 총 열 명의 한국 그림책 작가들이 이곳에 이야기를 풀었다.

 

 

 

직관의 즐거움

: 디자인 뜯어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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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열 가지 각기 다른 모양의 도형이 있다. 이들은 서로를 왜곡하여 바라보거나 훼손하지 않으면서 한 뼘의 공간을 공유한다. 가장 자기다운 모양으로 각각의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인데, 우리는 이제 이 열 개의 도형을 하나의 공동체로 바라본다. 그림이라고 부른다.

 

열 개의 도형은 본문에서 저자가 열 명의 그림책 작가를 만나는 동안 내내 작가 한 명 한 명과 연을 맺는다. 공작새의 날개를 닮은 부채꼴의 도형은 소윤경 작가와 짝이 되고, 두 개의 반원이 쌓인 모양은 고정순 작가와, 곡선 없이 뾰족한 각과 직선 면으로만 이루어진 도형은 권정민 작가와 짝이 되어 작가의 작은 캐릭터가 된다.

 

직관의 즐거움에 조금 더 머물러보자. 열 가지 도형은 책 속 다양한 디자인 요소와 일맥상통한다. 가령 가로 쓰기와 세로 쓰기가 혼합된 형태로 이루어진 앞표지의 텍스트, 사선을 그리고 곡선을 그리며 또는 ‘ㄴ’자 모양을 만들며 자유로이 쓰이는 소제목 텍스트가 그러하다. 모두 그림책의 유연함을 닮았다.

 

그림책은 ‘어린이라면, 학생이라면, 딸이라면, 어른이라면 마땅히 무엇 해야 한다’는 당위에 반문한다. ‘“다 그런 거지. 원래 그런 거야. 당연한 거야. 나는 다 알고 있었어”라는 말을 하지 않는 태도’ (이수지 작가의 답변 중에서)로 세상을 바라본다.

 

 

 

돌파하는 힘으로 가는 길목에서

: 유보하고, 가능성을 돌보고, 기다리고



 

그림책은 다음에 올 사람, 아직 미정인 존재를 위한 책이다.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언어로 스스로를 온전히 설명하거나 변호할 수 없는 사람들, 권력의 중심부에 서본 적 없는 이들을 향한다. 이들이 겪어나갈 세계는 그리 녹록지 않다. 위계는 촘촘하고, 경쟁은 잔혹하다. 좌절, 실망, 모욕, 상실, 상처가 필연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쉽게 안 변해.” 다음에 올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이야기는 없다. 그림책은 부지런히 속삭인다.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야. 더 자유롭게 비틀고 꿈꾸렴. 너에겐 이곳을 더 좋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

 

- 작가의 말 중에서

 

 

제 책에는 작거나 약하거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요.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 책은 아니지만, 분명 아이들을 향해요. 선거권이 없으니 기성 사회의 중심에 서본 적 없는 존재들이지요.

 

- 노인경 작가의 답변 중에서

 


서랍을 정리하던 오후였다. 서랍 안에는 다양한 크기의 수납함이 있다. 그중에서도 빗이나 핸드크림처럼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을 모아 분류한 수납함 안에는 오로지 머리끈만 보관하는 작은 바구니를 하나 더 두었다. 그 바구니를 뒤적이는데 검은색 머리끈 하나가 바구니 밖으로, 또 수납함의 밖으로 빠져나와 서랍 내벽과 수납함 사이의 아주 좁은 틈으로 들어갔다. 고작 머리끈이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검은색 머리끈 하나였다. 대체할 머리끈은 많았고 정리된 수납함을 들어 꺼내기엔 귀찮기에 서랍을 닫으려던 찰나, 가만히 틈새의 어둠을 내려다보았다. 수납함을 들추지 않는 이상, 침대나 소파를 옮기는 날이 아니면 오랜 시간 빛을 기다릴 작은 존재들을 생각했다. 머리끈이나 동전, 샤프심, 비즈 구슬 몇 알, 그런 것들이 여기 아래에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저자는 그림책을 ‘다음에 올 사람, 아직 미정인 존재를 위한 책’이라고 말했다. 저자가 말하는 미정의 존재는 나이에 특정되지 않는다. 사회가 고도로 복잡해진 오늘날엔 더더욱 그러하다. SNS로 바라보는 세상은 실시간으로 뒤처지는 중이라는 불안감을 계속하여 손에 쥐여준다. 알고리즘이 권하는 수십 개의 선택지는 적절한 정도의 즐거운 고민을 넘어서 이중 무엇을 내 것으로 취할 수 있는지, 인간의 정체성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다. 불안과 혼란, 자기 불신이 계속되며 우리는 좌절과 실패, 모욕의 감정에 쉽게 노출되는 시대의 한 가운데에 있다. 한 번의 미끄러짐으로 좁은 틈새에 빠진 머리끈, 무력함으로 가득 찬 침대 밑 동전, 작은 존재에 공감하고 이입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리고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는 그림책을 언어 삼아 ‘돌파하는 힘’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 최혜진은 작가의 말을 통해 ‘절망할 이유가 수만 가지지만, 그래도 이 세계는 살아볼 만한 곳이’ 라고, ‘다음번은 다를 수 있다’ 고 말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증언을 바탕으로 그림책을 쓰고, 제주 4.3 사건이나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시대적 아픔을 이야기하는 권윤덕 작가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강조하며 폭력이 깃든 역사에서도 화해를 이끌어낸다. ‘아무리 아픈 이야기라 하더라도 사건의 배경이나 사회 구조를 들여다보며 질문을 이어가면 결국 인간의 선한 의지와 희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권윤덕 작가가 발견한 아름다움이야말로 폭력의 실체를 집요하게, ‘끝까지’ 들여다본 사람이 찾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닐까.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은 열 개의 삶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모든 시선은 ‘나’의 삶으로 닿았다. 타인의 고유한 목소리를 경청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는 일이었다. 발전소를 돌리듯 ‘힘’을 차곡히 저장했다. 저자가 말하는 돌파하는 힘으로 가는 길목에서 새롭게 발견한 힘들이 있었다. 유보하는 힘, 가능성을 돌보는 힘, 기다리는 힘. 묻고 답하며 우리는 계속하여 삶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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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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