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속박과 해방의 사이에서 사랑을 흘리다 - 산책하는 침략자

글 입력 2021.08.1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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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한 남자가 정처 없이 해변가를 배회한다.

 

죽은 금붕어를 한 손에 쥔 채 얼빠진 표정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 그런 기운을 감지한 '쇼조'(이강우)가 그를 향해 다가가 묻는다, "괜찮으세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지배적인 도입부는 외계인의 침략이라는 재난에 직면한 어느 해변가의 폭풍전야를 암시하는 복선이다.


2021년 7월 삼연으로 돌아온 <산책하는 침략자>는 창작집단 LAS와 두산아트센터의 공동기획으로 선보이며 이기쁨 연출가를 필두로 10인의 배우들과 매력적인 창작진들이 다시 한 번 뭉쳐 한껏 기대를 모은다.

 

'마에카와 토모히로'의 동명 원작은 전운이 감도는 일본의 어느 해변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기발한 발상과 심도 깊은 고찰을 드러낸다. 끊이지 않는 전투기 소리 때문에 긴장을 놓지 못하는 마을 주민들은 어느 날 발생한 끔찍한 가족 살인사건을 기점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서서히 노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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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남편과 현재 별거 중인 '나루미'(한송희)는 원인불명의 사고로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 '신지'(윤성원)를 간호하기 위해 선택의 여지없이 그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툭하면 밖으로 쏘다니며 사람들에게 단어 뜻을 꼬치꼬치 캐묻는 '신지'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면서 '나루미'의 속은 급속도로 타들어 가지만,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를 쭉 케어하는 과정에서 식은 줄로만 알았던 애틋한 감정을 조금씩 되찾는다.

 

한편, '나루미'의 지극정성을 쭉 지켜본 '신지'는 그녀에게 불쑥 생뚱맞은 제안을 건넨다. "'나루미'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가이드가 되어줘" 남편이 아닌, 지구 침략이 목적인 어느 외계인의 제안이다.


희극에서 묘사되는 외계인들의 섬찟한 인상은 그간 SF 물에서 수차레 활용되었던 신체 강탈자 모티브를 바탕에 두고 있다. 입만 열지 않으면 아무도 외계인으로 의심할 길이 없는 인간의 외모를 바탕으로 암암리에 자행하는 침략자들의 속칭 '수집' 활동은 소리 소문 없이 해변가 마을을 잠식한다. 그 과정에서 희곡은 침략의 일환으로서 인간의 언어 체계를 외계인들이 습득한다는 독특한 발상을 발휘한다.

 

제목 그대로 산책이란 명목하에 길거리에서 조우한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특정 단어의 이미지화된 개념을 강탈하는 메커니즘을 충실히 이행한다. 단 한 번의 접촉 만으로 수십 년간 구축해온 인간의 사고 체계를 마비시키는 외계인들의 수집 행위는 우리 사회에 잠식한 보이지 않는 위험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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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그 자체로 섬뜩한 외계인들의 침략 행위는, 이를 촉발시키는 외계인들의 전후 사정 가리지 않는 호기심에서 그런 인상을 배가시킨다. 인간의 탈을 쓴 채 상식에 가까운 질문("언니가 무슨 뜻이죠?")들을 꼬치꼬치 캐묻는 외계인의 모습에서 영락없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부모님에게 질문하는 아이를 연상시키지만, 지나친 호기심이 촉발한 일련의 행각들은 극 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신체 내부를 확인한답시고 자신이 맨 처음 강탈한 인간의 복부를 갈라 쏟아져내리는 장기들을 지켜봤다는 '아리카'(한수림)의 증언은 무미건조한 말투와 대비되면서 외계인들의 호기심에 내포된 잔혹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더불어, 병원에 입원 중인 '아리카'를 면회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주치의 '칸지'(김연우)와 벌이는 '마코토'(장세환)의 설전은 개념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을 통해 흡사 호러 장르를 환기시키는 등골이 서늘함을 드러낸다.


순수와 잔혹의 경계가 모호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벌어지는 외계인의 수집 행위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게 할 만큼 재난에 가까운 악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뜻 하지 않게 외계인의 수집 활동 덕분에 자신의 삶을 구속시킨 '소유' 개념으로부터 해방된 '세이치'(고영민) 에피소드는 강탈과 상실만 야기하는 줄로 인식되었던 외계인들의 행위 메커니즘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여지를 제공한다.

 

개념을 상실했다는 것만으로 인간으로서의 삶이 다 끝난 것 같은 재앙으로 다가오지만, 다른 한편으로 속박된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순간 비로소 세상을 향해 다가갈 수 있다는 이원론적 시각의 여지를 제시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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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인간과 외계인 사이에서 '신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던 '나루미'는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몸을 강탈한 외계인의 모습을 통해서 상실한 줄 알았던 사랑의 감정을 되찾는다.

 

희극은 과거 '신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장면을 제시하지 않지만, 아내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조차 쉽게 꺼내지 않았을 만큼 감정 표현에 서투르거나 무색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측 가능하다.

 

반면, 자신을 향해 적극적으로 감정 표현을 드러낸 외계인으로서의 '신지'는 인간으로서의 이전의 그에게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기존에 알고 있었던 '신지'라는 개념에서 외계인의 개입을 통해 식었던 사랑으로 집약된 인간 '신지'의 개념(정확히는 이미지)로부터 '나루미' 또한 벗어났다는 것을 가리키는 변화다.


그렇게 자신의 변화된 감정을 실감한 '나루미'는 발음은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에서 '신지'의 인간으로 향한 가이드 역할을 수행한다.


희극이 제기하는 질문과 직접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곧 인간의 자격을 입증할 수 있는 본질적 요소에 관한 질문과 직결된다. 희극은 '사랑'을 토대로 인간의 본질 혹은 자격으로 일컬을 수 있는 어떤 진실을 클라이맥스를 통해 강렬하게 드러낸다. 외계인의 침략이 사실상 기정사실화되었음을 실감한 '나루미'는 '신지'를 통해 외계인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사랑을 일깨워주기로 결심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소중한 감정이 외계인들의 침략 의지를 말소시킬 수 있을 거라 믿는 '나루미'는 '신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그에게 전달하기로 결심한다. 외계인 '신지'가 인간의 본성에 눈을 뜨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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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희극 특유의 모던함은 자칫 신파로 이어질 수 있는 클라이맥스의 요소들을 담담하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며 관객들에게 '나루미'의 진심이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해낸다.

 

'신지'의 몸을 빌린 외계인은 이전과 달리, 자신의 가이드이자 시종 친절을 베풀었던 '나루미'의 개념을 빼앗길 주저하지만 '나루미'의 진심을 눈치채면서 그녀로부터 '사랑'의 개념을 얻는다. 그 순간 '신지'의 눈에 흘러나오는 눈물은 희극이 지향하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이미지에 다름이 아니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기발하게 질문하고, 섬뜩하게 묘사하며 감동적인 마무리를 통해 스스로 제기한 의문을 제때 대답하는 미덕을 실천한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둘러싼 침략 에피소드는 비가시적인 형태로 파국을 조장하는 사회적 위험에 관한 일본인들의 불안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출시킨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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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옥상훈

 

 

강탈에 따른 상실의 후유증과 소멸로 인한 해방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의 과정을 거치며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감정으로서 '사랑'이란 목적지에 도달한다.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조건이자,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결과로 귀결되는 사랑은 지구 침략에 항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초능력으로 중무장한 외계인을 유일하게 압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다. '나루미'의 희생을 통해 사랑에 눈뜬 '신지'의 한 줄기 눈물로 집약되는 변화는 지구에 발 딛고 선 인류처럼, 혹은 가치를 망각한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누군가가 되었음을 방증한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하지만 인간 본연의 본성을 터득한 '신지'로 불리는 그 누군가는 그렇게 자신이 배운 바를 또 다른 자신의 종족에게 퍼트릴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신체를 강탈했던 자신들처럼, 인간 또한 외계인을 향한 침투가 시작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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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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