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OTEA] JUDGEMENT 20: 황홀한 경적소리

글 입력 2021.07.0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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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엉덩이 사진이 아파트 대문에 붙어 있다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것도 휴지가 붙은 버전으로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사진을 떼고 싶을 것입니다. 저 역시 변태목 숙고포기과에 들어간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지만, 차마 제 엉덩이 사진을 붙이고 "어떤 엉덩이 사진이 더 추잡한가요?"라는 문구와 동그라미 스티커를 제공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요즘 아트인사이트의 '이 에디터의 글 더 보기'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경고하는데, 제발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잔혹한 호기심이 그 저주받을 악마놈의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요. 지금 쓰는 이 [TAROTEA]가 저의 엉덩이 사진입니다.

 

아까 확인해보니 2019년 10월에 마지막 [TAROTEA]가 쓰였더군요. 대학원 생활 일년 중이었을겁니다(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학부 이하라면 알아두세요. 이렇게 대학원 생활이 위험합니다).그래서 이제는 일련의 글쓰기 과정이 그러니까, "나의 감정이나 경험이 섞인 글을 쓰라"라는 과제 자체가, 무슨 중학교 2학년 성교육 과제같이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저는 소개팅 상대가 "진주씨, 글쓴다고 들었어요. 무슨 글 쓰시는지 궁금한데요? 보여주세요."라고 묻고 있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의 기억을 제거하거나 당장 살해할 수 있는 수단과 시체를 숨길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TAROTEA]'와 '[Opinion]님아 BL보쉴?'이라는 두 글만을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저는 주저없이 두번째 글을 보여줄겁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좌우간 저는 역시 그 저주받을 악마놈의 버튼에 붙어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내리기 위해, 그리거의 끝난 연재물에 유종의 미를 남기기 위해서라도 2년이나 지난 성교육 과제를 마무리해보려 합니다. 아트인사이트의 가장 좋은 점이 또 필진의 자유로운 글쓰기를 억압하지 않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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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 집에서 친구들이랑 미술을 배웠었습니다. 저는 선생님한테 저는 썩 좋은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고 싶어했었거든요. 선생님한테 맨날 자유화를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심지어 맨날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려댔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제가 끔찍하게 좋아하는 주제는 "천국과 지옥"입니다. 잔혹한 초딩의 그림 세계에서는 도화지 중간의 경계선을 두고 사람은 천사가 되거나, 겉바속촉맨이 됩니다. 정말 미술 선생님이 저를 심리 상담가에게 보내지 않아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옳고 그름을 밝혀주는 것처럼 쩌는 상황이 어디있을까요? 우리는 절대적인 신의 판단 앞에서 맨몸이 됩니다. 그 순간 모든 경계와 권력을 해체되고, 가장 완벽하다고 착각했던 존재를 가장 나약하게 만듭니다. 신적인 개입 앞에서는 가장 진실된 모습을 보이게 되죠. 저는 한번도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런 저에게도 멋진 상상입니다. 왜냐면 현실에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보통 우리는 늘 불안과 의심을 마음 한 구석에 박아두고 삽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은 아주 작은 진리조차 소유할 수 없게 태어났고, 요즘 양자역학에서 펼치는 논리를 보면 완벽한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삶에는 극적인 개입은 없기 떄문에 대체로 지루하고, 짜증날정도로 모호합니다.

 

하지만 짧은 순간,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상황을 잠깐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입니다. 감정의 찰나, 생각치 못한 돌파구, 번개와 같이 흐르는 감탄과 마음 한구석에서 퍼져나가는 황홀한 고통. 우리는 그 앞에서 삶의 순간에 전율합니다. 마치 신을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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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카드 20번이 그런 카드입니다. 신적인 상징으로만 해석되길 바라지 않아 서문이 길었습니다. 카드에서는 벌거 벗은 남자, 여자, 아이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하느님의 전령인 대천사 가브리엘(혹자는 미카엘이 인간의 죄를 심판한다는 점에서 미카엘로 보기도 합니다)이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깨어난 사람들은 신의 부름에 응답하고 심판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한시적인 인간의 육체와 대비되는 창대한 산맥이 배경에 깔려있습니다.

 

이제 카드에 있는 하나하나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모두 두 팔을 벌려 하늘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는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방향을 공개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들은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가브리엘의 나팔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대부터 사용된 가장 단순한 상징이며, 연금술과 점성술 및 기타 밀교에서는 네 가지 요소(공기(칼), 불(완드), 물(컵), 바람(동전))의 조합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중동에서는 동, 서, 남, 북의 네 가지 방향과 네 가지 바람으로, 아즈텍인은 교차된 특성에따라 신과 만나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균형잡힌 십자가는 균형적인 판단을 의미합니다.

 

또 본 카드의 숫자 20도 이와 관련해서 해석할 수있습니다. 수비학적으로 2+0은 2가 되고, '여사제'카드가 이 카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사제는 흑백의 양면,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지킬 수 있는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이었음을 고려하면 이 카드의 의미가 조금 이해가 갑니다.

 

가브리엘의 나팔은 천사의 상징입니다.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에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나팔 소리는 재앙을 예고하는데, 이 카드를 해석할 때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 후 보상을 준다는 연속적인 의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팔소리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경각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부는 나팔소리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신성한 개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나팔에 달린 깃발자체도 새로운 시대에 대한 대담한 표현이라 할 수 있죠. 우리는 어떤 것을 알릴 때 깃발을 꽂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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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징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심판'은 결코 냉혹한 결론이 아닙니다. 타로카드 속 사람들은 신성한 개입을 맨몸으로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2번에 이르는 과정 중 20번에 배정된 이 카드는 영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바보는 비로소 물질과 세상에서 동떨어진 맨몸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셈입니다.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이 사람들이 관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꽤 오묘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유한한 정신을 가지고 있죠. 우리는 결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실패하고, 멍청이처럼 굴고, 남들에게 가혹하게 굴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우리의 존재를 넘어선 깨달음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돌아옵니다. 우리는 가장 끔찍한 실패, 복어처럼 부풀어 오른 무지, 깨닫지 못한 이기심으로 부터 배우고 다시 도전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 쥰내게 끔찍하면서도 로맨틱한 이유겠죠.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유기체들이 온전히 냉소적일 수 없는 이유기도 하겠고요.

 

저는 그래서 가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작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한다는 상상을 합니다. 예수만이 부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은' 이라는 부분입니다. 당장 제가 이 연재를 시작한 것도, 일종의 부활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쓰고 보니까 아무래도 좀비영화가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긴 하지만요.

 

그러니까 이 글을 보는 선생님들께서도 크고 작은 멍청한 짓은 "ㄹㅇㅋㅋ"만 치고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연재물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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