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RGB [영화]

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2002)
글 입력 2021.07.0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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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적이고 음울한 남자가 외향적이고 과감한 여자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남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극복한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어디서 많이 본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뻔하고 유치한 이 영화의 묘한 매력은 헐겁기까지 한 서사와 달리 치밀하게 설계된 시청각적 요소에서 나온다. 영화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색과 빛(조명)인데, 감독은 적녹청의 삼원색과 명암을 통해 인물을 창조하고 장면의 의미를 구성한다.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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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배리는 타인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걸 어려워하며, 가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변의 물건을 부수기도 하는 불안정한 심리 상태의 소유자다. 그는 작중에서 파란색과 어둠으로 표현된다. 그의 옷과 가구는 대부분 파란색이고, 그의 생활 공간은 대체로 빛이 잘 들지 않는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그는 벽을 파랗게 칠한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서 파란 양복을 입고 등장한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그는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데,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그의 언행은 어둡고 푸른 화면의 음울한 느낌과 어우러지며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의 성격적 결함은 어린 시절부터 사사건건 그에게 간섭하던 가족으로부터 기인한다. 영화는 배리가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불편한 감정을 주로 조명을 통해 드러낸다. 배리의 사무실에 그의 여동생이 찾아오는 장면에서, 정면으로 조명을 받던 배리는 그녀가 화면으로 침입하자 자연스럽게 위치를 바꾼다. 이때 정면으로 들어오던 빛이 측광/후광이 되면서 그의 얼굴에 강한 그림자가 지는데, 이는 특별한 대사 없이도 그의 불편한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가족들이 그의 정서적인 불안함이나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웃음거리로 소비하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사무실만큼이나 어두운 자신의 집에서 음란 전화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음담패설 대신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배리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소통을 갈구하는 인간인지 보여준다.

 

 

 

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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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배리의 파란 양복이 별로라고 말할 때,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레나는 유일하게 그의 파란색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의 레나는 작중에서 빨간색과 빛으로 표현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빨강과 파랑, 빛과 어둠이 부딪히고 섞이는 과정이다.

 

어두운 창고에서 일하던 배리가 잠시 밖으로 나오자 어둡던 화면은 강한 빛과 렌즈 플레어로 뒤덮이고, 곧바로 빨간 원피스 차림의 레나가 태양을 등진 채 후광 같은 윤곽선을 걸치고 등장한다. 사무실 옆 카센터에 차를 맡기려고 찾아온 그녀는 배리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빛이 드는 방향으로 사라지고, 배리는 대화가 끝나자마자 황급히 어두운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때 칠흑 같던 창고 벽의 일부를 밝히는 작은 수직 조명은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이 배리의 내면에 일으킨 변화를 상징한다. 배리가 그의 개인 공간인 창고 안 사무실로 들어가자, 내내 어둡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빛이 들어오며 영화의 도입부가 마무리된다. 영화는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시각적인 요소만으로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얼핏 배리와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듯 내면에는 그와 비슷한 욕망을 갖고 있다. 배리에게서 충동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자신의 내면을 본 레나는 그에게 강한 호감을 느낀다. 첫 만남 이후 배리의 사무실을 다시 방문할 때 레나는 자주색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이는 배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자 그녀가 빨강과 파랑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단서다.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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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초록은 욕망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이다.

 

배리가 사는 초록색의 음식들은 모두 같은 식품 회사의 제품이다. 이 회사는 자사 제품을 구매하면 항공사의 마일리지를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는데, 가격이 싼 제품의 경우 지급하는 마일리지의 가치가 제품의 구매가보다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배리는 회사의 가장 싼 제품인 푸딩을 대량 구매하여 공짜 비행기를 탈 계획을 세운다.

 

비행기를 탈 일이 별로 없는 그에게 이는 소소한 일탈이나 호기심에 가까웠지만, 배리가 하와이로 출장을 가는 레나에게 자신도 사업차 하와이에 가기로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순간 막연했던 그의 욕망이 구체적인 목표로 바뀌면서 초록은 두 사람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그렇기에 초록은 빨강과 파랑, 레나와 배리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세 가지 색의 관계성은 빨강, 초록, 파랑의 순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슈퍼마켓의 물건 배치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이 구도는 배리와 레나가 만나는 장면에서 계속 변주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시각화한다.

 

 

 

Col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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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하면 세 가지 색은 명암과 어우러져 다채로운 화면을 만들어낸다. 첫 데이트를 하는 두 사람이 식당에 마주 앉아 대화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장면은 시각적인 세부 요소들로 가득하다.

 

배리의 자주색 넥타이는 레나를 만나 조금씩 변화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첫 만남 때와 같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초록색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은 두 사람의 인간적인 연결을 암시한다. 재미있게도 소파 위에 놓인 그림에는 강 사이를 잇는 다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초록의 매개성을 더욱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레나는 자신이 처음부터 배리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를 만나러 일부러 카센터에 차를 맡겼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뭔가를 숨기면서 친해지기 싫다는 그녀의 말에 배리는 얼굴도 모르는 음란 전화 회사의 직원이 아닌, 눈앞의 타인에게 처음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레나에게 그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데이트가 끝난 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다.

 

이후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배리는 음란 전화로 노출된 개인 정보를 가지고 돈을 뜯는 양아치들에게 공격당한다. 진정한 사랑을 찾은 동시에 세상의 쓴맛을 본 배리는 현실에서 도망치기로 하고, 다음 날 하와이로 출장을 간 레나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는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무르익는 이곳에서, 색과 빛을 통한 의미 표현은 절정에 달한다.


하와이에 도착한 배리가 공중전화로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레나가 어디 있는지 묻는 장면을 보면, 처음에는 빨간색의 축제 행렬과 파란색의 공중전화 부스로 화면이 분할되어 있다(이때 배리의 전화를 받는 그의 여동생이 전과 달리 초록색 옷을 입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요소다).

 

동생이 알려준 호텔 전화번호를 통해 레나와 연결되는 순간 전화부스에 달린 수직 조명이 켜지면서 배리의 얼굴에 빛이 들어오고, 붉은색으로 가득하던 축제 행렬에 푸른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섞이면서 두 사람의 연결을 시각화한다. 이후 배리와 레나가 호텔에서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은 지금껏 다뤄 온 시각적 요소를 집약한다. 빛과 그림자, 푸른 바다, 녹색의 잔디, 빨간 펜스와 파라솔을 정교하게 한 화면에 담아내며 두 사람의 만남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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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 드렁크 러브>는 로맨스 영화치고 상당히 불친절하다. 두 주인공의 생각이나 감정선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아 두 사람의 서사를 이해하기 어렵고, 두 사람의 관계는 한쪽이 거의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수용하는 형태에 가까워서 로맨스 영화의 주요 동력인 남녀의 갈등 구조도 희미하다. 두 사람을 둘러싼 외부적인 시련 역시 빈약하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이 사랑의 힘으로 그동안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음란 전화 회사의 악당들을 단숨에 굴복시키는 장면의 개연성은 웃음이 나올 정도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묘한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서사의 빈약함을 시각의 깊이로 채웠기 때문이 아닐까. 화면의 색감과 깊이에 취해 두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좋은 영화는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 색과 빛은 서사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는 제목 그대로 언어적인 구체화가 불가능한 사랑의 충격을 감각을 통해 묘사하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미묘한 과정을 영화의 언어로 멋지게 구현한 작품이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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