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사람]

배우 윤여정에게 배우는 삶의 태도
글 입력 2021.04.2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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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자세히 알아봐 진짠가"


 

얼마 전 온라인 쇼핑몰 플랫폼 지그재그의 새로운 광고모델이 공개되고 반응이 뜨거웠다.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배우 윤여정이다. 20대가 주로 사용하는 어플의 광고를 50년 넘게 활동한 원로배우가 맡을 줄 누가 알았을까. 광고 내용 역시 재치 있었다.

 

"근데 나한테 이런 역할이 들어왔다? 젊고 예쁜 애들도 많은데. 근데 잘못 들어온 거 아니니? 아니 자세히 알아봐 진짠가." 이 장면은 연출이 아니라 배우 윤여정이 실제로 한 말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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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그재그' 광고의 한 장면 (출처: 지그재그)

 

 

이 영상은 일주일 만에 조회 수 140만을 넘겼다. '브랜드 이미지가 고급스러워졌다.', '안 쓰는 앱인데 호감도가 확 올라간다.'라며 긍정적인 댓글이 달렸다.

 

만 73세의 배우 윤여정, 그는 지금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종영한 예능 <윤스테이>에서는 재치 있는 사장님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고, 영화 <미나리>로는 글로벌 무대를 누비고 있다. 무엇보다 올해 연기 인생 55년 차를 찍은 배우가 젊은 세대들까지 '윤며들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힙한 할머니'인 윤여정, 도대체 그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나는 창의적인 배우도 못되고, 오히려 노예근성 같은 게 있었나 봐."


 
사실 앞서 제2의 전성기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의 오랜 연기 인생에는 이미 빛나는 순간들이 많았다. 데뷔 초부터 똑 부러지게 감독들의 말을 알아듣고 연기로 보여주었던 그는 <장희빈>, <화녀> 등의 주연을 맡으며 스타 배우로 톡톡히 자리매김한다. 이후에도 연기를 쉰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10여 년간 미국에서 생활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성실하고 또 꾸준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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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정의 필모그라피 (출처: 네이버 영화)

 

 

그는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작품에 참여하면서 90여 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쌓은 다작 배우가 되었다. 연기 스펙트럼 또한 무척 넓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악역부터 따뜻하고 온화한 어머니 역할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정도이다. 그는 자신이 미인도 아니고 끼가 넘치는 사람도 아니라서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고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인기가 있고, 연기를 잘하고, 타고난 배우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제가 아는 선생님은 끼는 없어요. 타고난 배우도 아닌 거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선생님을 너무나 존경하고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하는 건, 의사가 환자에게 메스를 대듯, 수학을 풀듯, 과학자가 탐구하듯. '아 연기는 그런 거구나.' 하는 거를 처음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선생님처럼 등장인물을 모던하고 세련되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표현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 노희경 작가

 


그에게는 당연해 보이는 그 성실함이 쌓여서 자신만의 매력을 만들었고, 다른 이들에게 신뢰를 주는 배우가 되었다. 묵묵한 발걸음이 만드는 힘은 생각보다 더 위대하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그냥 불공정 불공평이야."


  

그의 인터뷰는 매번 회자가 된다. 막상 본인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명언'이나 '어록'이 되냐며 너스레를 떨지만, 사람들이 입 모아 감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 업계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업력을 쌓았으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가르치려는 모습이 보일 수도 있는데,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말이 가슴을 찌르는지.

 

젊은 세대들이 그에게 특히 공감하고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굳이 조언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윤여정은 우리가 어른에게 배워야 할 지혜를 자연스럽게 내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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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능 '꽃보다 누나'의 한 장면 (출처: tvn 유튜브)

 

 

그의 몸에 쌓인 이런 내공 뒤에는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하고, 또 치열하게 버텨온 삶이 있었다. 떠오르는 스타 배우였지만 10여 년의 공백 끝에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의 자리는 없었다. 한동안 비호감 이미지로 찍혀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그이기에, 들어오는 모든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임했다. 그는 자신이 연기를 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절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배고파서 연기했는데 남들은 극찬하더라. 그래서 예술은 잔인한 거야. (...) 배우는 돈이 필요할 때 연기를 가장 잘해.

 

- <무릎팍도사> 中

 

 

그는 이른바 '생계형 배우'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단한 삶이 훌륭한 그의 연기, 그리고 지금의 윤여정을 있게 했다.

 

 

 

"어우 얘 내 정신 좀 바, 으응, 얘네들이 글쎄, 아까는 너무 저기 하드라구"


  

그의 센스 있고 쿨한 말투 역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일명 '휴먼여정체'라고 불린다. 윤여정은 구수하고 거침없는 말투를 구사하지만 거기에 사랑스러움과 재치가 묻어있다. 예능 <윤스테이>에서는 한참 어린 후배 배우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멋진 케미를 선사했다.

 

이러한 그의 매력은 외국인에게도 통하나 보다. <윤스테이>에서 그는 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주문을 받는 역할을 했는데, 센스 있는 응대로 손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윤식당>에서 주방 일을 맡아서 할 때보다 이번에 직접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면서 훨씬 그의 매력이 도드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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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윤스테이'의 한 장면 (출처: TVN 유튜브)

 

 

"오늘 밤에 저희를 독살하는 건 아니죠?"

"오늘은 아니야. 아마 내일? 체크아웃 후에는 장담 못 하지"

 

- <윤스테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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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FTA 수상소감 (출처: 연합뉴스 유튜브)


 

얼마 전 영국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말한 소감 역시 화제가 됐는데, 에든버러 공작에 대한 조의를 표한 후, '고상한 영국인들(snobbish people)에게 인정받아 영광이다'라는 유머를 구사해 현장을 뒤집어놨다.

 

문화가 다른 국가의 사람들을, 그것도 격식이 있는 자리에서 웃게 만든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윤여정이 해낸다. 현지에서는 '그는 사랑스럽고(adorable) 유쾌하고 당당한(savage) 사람이다.'라며 좋은 호응을 얻었다. 그는 '이전에 영국에 직접 방문했을 때 그렇게 느꼈는데, 나쁜 뜻은 아니다.'라며 재치있는 비하인드스토리를 밝히기도 했다. 솔직하고도 발칙한 수상소감, 이걸 그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그런 환경에서 있으면 나는 괴물이 될 수 있어요."



그에게도 이번 작품 <미나리>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50년 넘게 배우 생활을 했지만 높은 페이를 받지도 못하고, 머나먼 타지에 가서 하는 촬영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영화 출연을 만류하는 주변 스탭들의 말에 윤여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여기서 정착해서 TV에서 오는 역할만 하고 그러면,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감독도 나를 연출하려고 하질 않아요. '선생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라고 하지. 그런 환경에서 있으면 나는 괴물이 될 수 있어요. 그게 매너리즘이지 뭐야. 내가 환경을 바꿔서 털사 오클라호마 같은데 가서 미국 애들한테 "What?" 그런 소리 듣고. 그러면서 내가 '아 나는 진짜 여기서 Nobody구나. 연기를 잘 해서 보여주는 수밖에는 없다.' 이런 작품을 해야지. 그게 나에게 도전이지 다른 게 도전이 아니에요.

 

- <문명특급> 中

 

 

대사를 칠 수 있는 한 계속 연기하고 싶다는 그는 여전히 드라마, 영화, 예능을 종횡무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미 배우로서 충분한 성공을 거뒀다면 거둔 상황에서 편안하게 남은 생을 살아갈 수도 있을 텐데,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지난해 캐나다에서 촬영을 한 드라마 <파친코>도 곧 방영할 예정이고, 현재는 오스카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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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를 위해 연기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것이 본인이 누리는 가장 큰 사치라고. 실제로 <미나리>와 작년에 개봉한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출연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돈을 쓰면서 출연을 했다. 후배들에게 멋진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윤여정, 그에게 지금과 같은 찬사가 돌아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나는 지금껏 그가 활약한 작품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작품에 출연한 만큼, 자연스럽게 드라마나 영화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을 접한 적은 많지만, 극 중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그의 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곱씹어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라도 그에 대한 자료를 열심히 찾아보며 '사람 윤여정'을 만난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이제는 끊임없이 자신만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배우 윤여정'을 만날 차례이다. 그의 출연작 중 보고 싶은 작품이 많아져서 찬찬히 살펴볼 예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아직도 현역에서 활동하는 배우이기 때문에 생생한 연기를 볼 수 있는 날이 남았다는 것.

 

•••

 

나는 지금껏 막연하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고, 적당히 살다가 빨리 죽고 싶다."라고 말해왔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게 무서웠고, 쓸쓸하고 외로운 모습의 어르신들을 보면 괜히 울적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에서 자라 자신의 발로 세상을 누비다가, 다시 노인이 되어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는 상황을 마주할 날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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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튜브 문명특급)

 

 

지금은 안다. 늙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은 언제까지나 청춘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나이 든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멋과 지혜가 있고, 아직 최선을 다해 살아보지도 않아놓고 도망칠 다짐을 하는 것은 조금 비겁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윤여정이 걸어온 길을 보며, 그와 같이 좋은 어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다시 고민해 본다.



 

[박혜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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