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실에 환상 입히기 [드라마]

글 입력 2021.04.1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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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최소 10화 이상인 드라마 특성상 하나의 이야기의 결말을 보기 위해 적어도 10시간을 허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드라마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같은 이유로 재밌게 봤던 몇 안 되는 드라마도 다시 시청하기가 겁이 나 한 번 완결 지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마는 편이었다.

 

그런 내가 딱 하나, 여러 번 다시 봤던 드라마가 하나 있다. 2017년에 방영했던 KBS 드라마 <김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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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과장>은 코믹형 오피스 드라마로, 회계를 중점으로 다루며 기업의 비리와 맞서 싸우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군산에서 조폭과 함께 일하며 장부 세탁을 전문으로 하던 소위 ‘김과장’이라고 불리는 주인공 김성룡은 극 중 대한민국의 최고 기업 TQ 회사의 경리부 과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멀쩡한 직업도, 학력도 전무한 김성룡이 덥석 들어가게 된 경리부 과장은 사실 회사의 장부 조작을 맡는 자리였다. 이전 과장은 비리를 폭로하려다가 입막음을 당하고 모든 비리를 떠안은 채 식물인간이 되었고, 제대로 된 연고도 인맥도 없는 김성룡은 그 자리를 대신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김과장은 적당히 힘에 굴복하고 비리에 동참하며 본인 몫도 챙겨 얼른 자리를 뜰 생각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일들로 번번이 일이 틀어지게 된다. 식물인간이 된 전 과장의 아내는 남편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이가 보기 싫었던 회사 측에서 고의적인 차 사고를 내려 하지만 바나나 껍질을 밟고 미끄러진 김과장이 아내를 밀쳐 구하면서 김과장은 의인으로 불리게 된다.

 

 


클리셰에 섞인 김과장만의 비범함



그 일로 선함의 아이콘이 된 김과장은 자의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해낸 좋은 일과 이로 인한 주변의 칭찬들을 처음에는 어색해 하지만 점차 일생 동안 해오던 나쁜 짓들을 등지고 기업의 권력과 맞서 싸우게 된다. 이렇듯 이 드라마는 숫자 계산에 한해서는 비상한 머리를 가진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가장 밑바닥 취급을 받던 경리부와 함께 거대한 권력과 맞서는 영웅 서사 구조를 가졌다.


진부한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클리셰와 참신한 설정을 적절히 섞어 <김과장>만의 영웅 서사를 완성시켰다. 회계부의 하위 부서로 매번 찬밥 취급을 받고 무시를 당하며 회계 잡일을 도맡는 경리부, 청소 미화원, 그리고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가진 김과장. 이 힘없고 돈없는 사람들이 최고 권력자들을 상대하는 과정은 그다지 멋들어진 모양새는 아니다. 정의롭고 깨끗한 생수보다는 온갖 꼼수와 잔머리 같은 불순물이 섞인 오염수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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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금씩 독기로 이뤄낸 승부수가 권력의 손가락질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 때도 있고, 내부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정신을 다잡고 다시 일어나 거대한 적과 맞서 싸우게 하는 계기는 그들의 투철한 정의감이나 도덕의식이 아닌 짓밟힌 자존심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지 않나. 그들은 밟히면 악을 쓰고 성질을 냈다. 그런 부분들이 시청자의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주었다. 드라마를 보는 많은 시청자들의 대부분이 그들과 같은 회사원일 것이기에, 그들의 발악과 독기는 어떤 멋진 액션 신보다 더 몰입하고 응원하게 만든다.




본질에 가장 집중한 드라마


 

<김과장>을 둘러싼 장점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지점은 드라마에 너무 많은 요소를 집어넣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피스 드라마답게 그들은 기업 내에서의 일들에만 집중한다. 코미디 특성상 다른 오피스 물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회사 내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보여주고 기업의 꼭대기에서부터 흘러내린 썩은 물이 어떻게 회사를 더럽히는가를 분명하게 꼬집어 준다. 더불어 등장인물들 각각이 가진 서사도 기업과 관련한 내용에 한해서만 설명된다. 그래서 우리는 TQ 회사를 둘러싼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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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드라마답게 그들은 한순간도 웃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를 겪는 과정 속에서도 드라마는 특유의 웃음 코드를 잃지 않았다. 일부 코미디 드라마나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웃음을 잃고 감동이나 교훈을 주기 위해 분위기가 점차 무거워져 갈 때가 있다. 매번 그 부분이 아쉬웠는데 <김과장>은 심각한 순간이 반드시 무겁고 좌절만이 가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교훈적인 부분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잘잘못을 심판받거나 다른 의협심으로 대신 용서받기도 한다. 극 중 대척점에 서 있던 두 인물, 김과장과 서율 이사의 변화 과정도 흥미롭다. 본디 악의 편에 기생하며 콩고물을 받아먹던 김과장이 선함의 대표주자로 우뚝 서기 시작할 즈음, 유능한 검사로 비리를 척결하던 서율은 그럼에도 세상을 지배하는 부조리에 환멸을 느끼며 점차 악의 편으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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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이 아끼는 부하였던 김성룡과 검찰 내에서도 손꼽히는 검사였던 서율, 전혀 다른 삶을 살던 그들이 TQ 회사에서 만나고 대립하게 되면서 서로를 닮아가고, 끝에는 서율이 끝내 포기하려 했던 정의감을 되살리며 근본적인 악의 축과 함께 싸우고 무너뜨린다.

 

그들이 승리하는 과정과 서율이 다시 정의의 편에 서게 되는 계기를 올바르고 떳떳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선을 위해 소소한 악행을 오용하며 진정한 악을 굴복시키는 이 드라마는 권선징악의 플롯을 따르고 있으며, 악행을 눈 감고 동조하던 그들이 점차 잘못을 깨닫고 옳은 길로 간다는 점에서 이들의 성장 드라마로 볼 수 있다.

 

 


현실에 입혀진 판타지


 

서두에 이 드라마를 오피스 물로 설명했지만 나는 사실 판타지 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의 기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풍자하며 현실을 비판하고 있지만, 극 중 인물들의 행적은 현실에서 절대 불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암묵적으로 퇴사를 권유하는 징벌의 자리로, 하는 일도 없이 출근 내내 책상에 앉아있어야 하는 징계를 받은 김과장이 그 자리에서 족욕을 하며 VR 플레잉을 한다거나, 살해를 당하려다 극적으로 탈출한 김과장이 자신을 절대 자살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회장의 짓일 것이라는 경고장을 회장과 회사 사원들에게 뿌리는 등의 행동은 통쾌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싹하기도 하다.


그러나 회사에서 자존심을 짓밟히고 상처를 입는 순간에는 한 번씩 짜릿한 복수를 꿈꿔보지 않나. 누구나 한 번쯤 상사에게 욕을 퍼붓는다거나, 앞뒤 안 가리고 사직서를 내던진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회사를 벙찌게 만드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김과장>은 그런 마음들을 대변하고 위로한다. 다소 경악스럽지만 사람들이 마음속 한편에만 품었던 욕망을 실현하고 대리 만족하게 만드는 시원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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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현실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삶을 투영해 웃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드라마 <김과장>을 팍팍하고 웃을 일 없는 요즘 조금이라도 웃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오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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