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14일간의 몽골 여행기 [여행]

'여행의 이유'로 회상하는 몽골의 구석구석
글 입력 2021.04.1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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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생각과 내 지난날이 마주하게 되는 순간 글을 쓴다. 그것이 꼭 맞는 형태를 그리게 될 때가 있다. 그러면 시간을 들여 글을 쓴다. 그러고 나면 어딘가가 아물었다는 기분이 든다.

 

-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임진아

 

 

"진부하다... 지루하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텅 빈 방 안에 CD플레이어가 지직거리며 재생되었다. ‘우리 누운 침대보엔 사막이 배겨있나 봐’ 가사의 한 부분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노랫말과 같이 권태가 잔뜩 배겨있는 구겨진 이불 위에 멍하니 누워, 나는 위의 두 마디만 번갈아 가며 중얼거렸다. 침대에 배겨있는 모래알들이 혀끝까지 알알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도 지루했고 신물이 났다.

 

나는 지루한 것을 좀처럼 참지 못한다. 오죽하면 진로 선택을 할 때, 가장 염두에 두었었던 것이 그런 것이다. 반복적인 업무가 적고, 단타성이 부각이 되는 프로젝트성 업무, 새로운 것들과 마주할 기회가 존재하며, 제한된 틀에 갇히지 않고 무언가 변화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나갈 수 있는 일. 직무에서조차도 변화를 꿈꿀 만큼, 쓸데없이 자유로운 영혼이 바로 나였다. (물론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협조를 도모하고 방종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이런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쉬운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행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가 지속이 되었고 그럴수록 나는 활동과 활동에 대한 기대 속으로 도망쳤다. 막무가내로 비행기 표를 끊어 놓고는 학교 시간표를 이틀로 몰아넣고, 왕복 6시간 통학을 하며 돈을 벌었다.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그것을 꿈꾸며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만큼은 모든 고민거리들이 희미해졌다.

 

방학이면 50리터 여행 배낭에 불안감과 해방감 그 어딘가 즈음에서 헤매고 있는 마음을 구겨 넣고는 다른 나라로 향했다. 여행이 있기에 일상을 버틸 만한 힘이 생겼다. 물론 그 여행 또한 돌아올 곳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었겠지만, 그때는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친 곳이 낙원이 될 수 있단 사실에 기뻐하기 여념 없었을 뿐이었다.

 

코로나가 장기화가 된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나. 나를 이끄는 것은 무엇이었나. 허탈함이 느껴졌다. 여행을 위해 돈을 벌었기에 일하는 시간은 감소했지만, 그 비어있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다. 펜데믹 이전보다도 지루한 정적들을 어떻게든 끈질기게 기록하며 각종 콘텐츠로 간접 경험을 해 보아도 직접 경험이 주는 짜릿함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험 기간이 되었고, 써야 하는 글과 과제들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집어 들었다. 여행의 감각이 일깨워지며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가 원하는 생각과 지난날들이 눈을 맞췄다. 이 글은 책의 리뷰가 아니다. 책을 읽으며 회상한 지난날들을 막무가내로 뱉어낸 덩어리일 뿐이다. 일상에 지쳐 툭툭 터져 나오는, 마음 가는 대로 서술하는 쾌락적 글쓰기를 하고 싶었고, 지난 몽골 여행을 회상하는 동시에 키보드 위로 두 손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여행의 구석구석


 

 

“작가란 말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 김영하

 

 

김영하는 글 짓는 사람의 정체성을 ‘말 수집가’로 규정한다. '소설가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언어를 부여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시절에 학생들에게 “짜증 난다”라는 표현을 금지한 바 있다고 한다. 이유는 단순히 그 말로는 치환될 수 없는 다른 감정들(서운하다/황당하다/속상하다 등)을 뭉뚱그리는 적확 하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 어떤 구절을 기억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외우려고 외워지는 게 아니었다. 그 문장, 그 단어에서만 느껴지는 고유한 기미나 정취가 좋았다. 단어 하나, 접속사 하나만으로도 달라질 수 있는 표현을 기가 막히게, 직관적으로 그 사람에게 닿게 하는 것은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소설뿐만 아니라 노래 가사나 제품의 홍보 문구까지도. 그의 철학처럼 그의 문장들은 감각적이고 세밀한 표현이 돋보인다.

 

이런 그가 <여행의 이유>를 소개하며, 한 프로그램에서 여행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사진을 찍듯이, 그 풍경을 구석구석 묘사하며 글로 써서 나중에 자신이 읽었을 때 글로 그것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적확한 표현만이 그려낼 수 있는 풍경이 있을 테니까.

 

고등학생 때, 1분단의 맨 뒷줄 창가 자리에 앉아있을 때면, 그 시간이 하필 점심시간이 끝나고 늦여름의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면, 나는 시간이 가는 게 아까웠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교복을 입는 순간들이니까. 10대의 마지막이니까. 그래서 그런 순간들은 사진을 찍듯이 기억하려고 애썼다.

 

창밖에서 축구공을 차며 체육 수업을 듣는 학생들, 앞자리 친구의 볼펜 딸깍거림, 그 의자에 제멋대로 구겨져 걸린 교복 셔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몇몇 친구들과 어쩐지 점점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는 교탁 앞의 선생님. (그렇다. 나도 졸았다.)내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까지도. 그 순간을 다시 추억했을 때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그 시절이 그렇게 소중해질지 몰랐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중학교 졸업식 때 죽도록 울었기 때문인지 그때의 나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고, 이렇게 오감으로 기억하려는 노력 덕분에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나는 몇 개의 분위기와 추억들이 존재한다. 추억에 목숨 거는 나는 이 노력이 없었으면 정말 억울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인지 묘사에 관한 이야기가 더욱 뚜렷하게 와닿았다. 글로 사진을 찍듯이 표현한다니. 보통의 글은 묘사보다는 그날의 감정들을 기록하곤 하니까. 묘사로만 진행되는 글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깨달음을 나의 몽골 여행과 결부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과거의 일기장을 참고하여, 가늘게 붙잡고 있던 여행지에서의 귀중한 순간들을 묘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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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베개로 쓰일 강아지 인형을 들고, 대충 가방을 챙겼다. 감지 못한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고는 전날 밤에 비를 피해 정신없이 들어온 게르 밖으로 나섰다. 캐리어를 끌자, 바퀴에 드르륵 축축하게 젖은 땅의 흙이 묻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햇살에 눈이 부셨다. 광막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잔디들은 새벽이슬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늘이 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하늘을 무엇으로 알고 있었던 걸까.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치켜 올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몽골의 하늘은 평행하게 존재했다. 푸른 빛 하늘과 두 손에 잡힐 듯한 구름. 나는 초원이 끝나는 지점을 찾듯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시야를 멀리 보냈다. 눈부셨지만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꼿꼿하게 태양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춥고 건조한 가을 아침의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저 멀리 양 떼들이 보였다. 친화력 좋은 밤색 강아지가 내 앞에서 꼬리를 흔들었다. 많은 이들이 몽골 하늘 하면 쏟아질 듯한 별들을 떠올리지만 내게는 이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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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어딘지도 모를 초원의 한복판에 위치한 게르에 우리 여섯 명은 짐을 풀었다. 몽골엔 사계절이 다 있고, 깊은 밤은 늦가을의 쌀쌀함과 닮아있다. 추워진 날씨에 우리는 어설프게 모닥불을 지폈다.

 

각자 가져온 침낭 속에 들어앉은 애벌레들은 지친 몸을 아무렇게나 뉘었다. 원래였으면 칭기즈칸 보드카에 오렌지 주스를 섞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간단히라도 요기했겠지만, 이날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누웠다. 이곳도 역시나 샤워공간은 마련되어있지 않았기에 우리는 대충 물티슈로 얼굴을 두어 번 닦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 서서히 잠이 들었다.

 

-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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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사막, 그 안에서도 ‘홍고린엘스’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했다, 노래하는 사막이라는 뜻이다. 사막에 귀를 대고 기다리다 바람이 불면 우웅, 하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사막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았지만 샌들 사이로 사라락 흩어지는 모래의 입자가 고왔다. 역시 사막은 맨발이지. 나는 다시 차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 샌들을 벗어 던졌다.

 

본격적으로 맨발로 사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나는 이름이 왜 고비사막인지 깨닫게 되었다. 올라가는 것이 일단 엄청난 고비였다. 고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졌고, 도착했나 싶으면 그 위에 지나간 이들의 발자국이 파여 있었다. 일몰을 보러 간 것이었는데 해가 지고 있었다. 우리는 저물어가는 해의 끝자락을 간신히 붙잡고 사진을 찍었다.

 

- 저물어가는 해의 끝자락을 붙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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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 아니 10시간인가.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 있지만, 창밖의 풍경은 그대로다. 드넓은 초원과 푸르른 하늘, 키 작은 침엽수들이 반복적으로 펼쳐진다. 오늘도 가위바위보에서 진 내 자리는 덜컹거리는 스타렉스 맨 뒷자리의 가장자리 보조 의자이다. 고비사막을 다녀온 뒤라 차의 바닥과 의자에는 거칠거칠한 모래알들이 한창이다. 트렁크에 가득 찬 짐 가방들이 경사진 곳을 내려갈 때마다 머리 위로 와장창 쏟아진다.

 

여행한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고, 이미 해탈한 우리는 쟁반노래방이라며 머리로 가방들을 받치고 힘없이 낄낄댄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듯 하루가 지나간다.

 

- 아무도 끝을 알 수 없는 쟁반노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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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할 때부터 차창 넘어 반짝이는 별들이 쏟아졌고 자연이 나를 압도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이게 진짜 다 별이야?”라며 동행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몽골에 별을 보러 왔으면서, 우습게도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카메라는 미러리스 카메라였다. 카메라의 감도와 조리개, 타이머 등을 조절하여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사진을 건지는 것에는 꽤 시간이 들었다. 어렵게 사진을 찍고, 우리는 돗자리를 펴고 나란히 드러누웠다.

 

맥주를 한 잔씩 들고 홀짝였고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종일 밤하늘을 닮은 음악들이 줄을 이었다. 술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당시 체력적으로 지쳐있었기에 남들이 시작할 때 즈음 눈앞이 흐려졌다. 흐린 눈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는데 별똥별이 떨어졌다. 소원, 소원을 빌어야 했다. 두 손을 모으고 재빨리 소원을 읊조리느라 술이 확 깼다. 연속적으로 별들이 졌고, 비현실적인 장면에 눕힌 몸은 별들 사이를 부유하는 듯했다.

 

군대에서 선임이 천문학과였다며, 일행 중 하나가 듣도 보도 못한 별자리들을 알려주었다. 맥주 때문인지, 뜬금없는 별자리 찾기 대회 때문인지, 잔잔하게 깔린 배경음악 덕분인지, 얼마 안 된 사이에 가까워진 우리 덕분인지, 긴장을 풀고 누워있는 동안 계속해서 희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별 볼 일 있는 어느 밤

 

 

묘사 표현이 많아 다소 감상적이고 민망한 구석들이 있지만, 당시 이십 대 초반이었던 나는 일행들 앞에서 호기롭게 시를 읊기도 했으니, 이 정도는 약과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장면은 음주와 함께했다. 이 밖에도 선연히 아로새겨진 기억들이 꽤나 많다.

 

홉스골 호수 위에서 찬란하게 부서지는 윤슬.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던 물소 떼들. 건조한 날씨에 양 볼이 발갛게 터서는 말 타는 법을 전수해주던 꼬마 아이. 시골 게르의 에스닉한 카펫 위에서 기지개를 켜던 아기 고양이. 그늘진 침엽수림 사이에 스며든 볕뉘... 새벽이슬을 머금은 축축한 초원 위의 캐리어 자국과 같은, 14일간의 오래된 나의 오감의 궤적들.

 

일기장이 존재했기에 당장이라도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그림 같은 순간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쉽게 휘발되지 않는 기록들과 오래 함께하고자, 다시금 기민하게 기록하고 묘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오늘이다.

 

 

 

여행의 이유


 

 

-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단숨에 그 대답을 할 수 있었다면 김영하 작가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에서 얻는 입체적인 환희를 비등하게 표현할만한 글이 과연 존재할까.

 

확실한 것은 여행은 카르페디엠. 현재를 살 수밖에 없게 하는 수단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현재시제로 서술되고, ‘나’라는 주체를 초월한 현실과 마주한다. 과거의 후회와 미련, 미래의 불안함은 원경으로 밀려난다. 언제나 그랬기에 현재를 살고 싶어지면 나는 미련 없이 비행기 표를 끊는다. 비겁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시원하게 그 비겁함을 인정하겠다. 그리고 그럼에도 행할 것이다. 주체적인 삶, 그것에서 나아가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커다랗게 육박해오는 의미를 느끼기에 아직 여행보다 확실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언가를 얻으려고 떠나기보다는, 비워두기 위해 떠났다.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그만 확인하고 싶어서 떠났다. 그런 내가 여행을 통해 무언가 영감을 얻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과거가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경험을 하는 순간에 생기는 감정은 잘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기에,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오직 과거에 대해서만 완성된 감정을 지니게 된다. 길 위의 날들이 쌓여 과거가 되었을 때, 경험과 감정을 추억할 수 있을 때, 오래된 길 위의 내가, 길 위의 궤적들이 나도 모르는 나를 만들 것이다. 그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몽골 여행을 했던 동행 중 한 분은 몽골 말고도 남미와 호주, 네팔 등등의 여행기를 모아 얼마 전 여행 에세이를 출간했고, 한 살 어린 동생은 군대에 가기 전 세계여행을 다녀왔으며, 나를 포함한 그 나머지도 코로나 이전에는 언제든 떠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극단적인 물음이지만, 한번 시작한 여행을 우리가 멈출 수 있을까? 무언가를 내던지고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다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발견했을 때.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보다 시작의 그 짜릿함과 설렘 사이에서 유랑했을 때. 여행자들은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사실 없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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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해서 글을 쓰는 동안 황홀함을 느꼈다. 밤에 쓰기 시작한 글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오랜 정적의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어두운 방에서 혼자서도 광막한 대지 위에 열기 가득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이것이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직접 그 대지 위에 다시 내가 주체로 존재하는 순간을, 또, 그것을 넘어서는 현재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나의 등을 떠밀 그 날을 바라본다. 직접적인 경험과 여행이 나의 길 위에 다채롭게 자수로 수놓아지는 순간들을, 다시 손꼽아 기다리면서 바라본다.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고스란히 그것을 느끼기를,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의 감각들도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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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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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7
  •  
  • 오드리
    • 에디터님의 몽골여행기(?)글 잘읽었습니다.  초원.하늘.사막.노을.별.  가보지않아도 눈에 보이는듯해요.  여행의이유 불안감 해방감 그어딘가 헤매고있는마음을 50리터 배낭에 구겨넣고 떠난여행에 이런 황홀한(?) 경험과 추억과 또 이런 훌륭한 여행기를 남길수 있다니 멋지세요. 코로나19가 빨리 물러가 더 많은 여행기  쓰기를 바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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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나
    • 오드리코로나19가 물러가 어서 여행길이 열리고, 더욱 풍성히 문화 향유의 기회가 생기기를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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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남기
    • 글이 참 좋네요. 다른 이의 여행기를 들여다본다는 게 이렇게 재밌을지 몰랐습니다. 현실을 마주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여행을 바라보는 관점도 마음에 들어요. 저도 에디터님의 견해에 마음 깊이 공감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요즘 바쁜 일상에만 갇혀 살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해 잠시 몽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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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나
    • 이남기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플랫폼에 글을 적으며 불특정 다수가 본다는 생각에 스스로 감상적이라고 여기던 표현을 지양하게 되었는데요, 그 때 이 댓글을 써주셔서 힘이 되었어요. 저도 차별적 시선에 관한 에디터님의 칼럼을 우연히 보고, 깊이 동감하며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기분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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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렌지헤어
    • 저도 몽골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요,, 에디터님의 글을 보니 다시한번 다녀오는 것 말고 여행으로써 다시 가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굳이 몽골이 아니더라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해보고 싶은 글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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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세나
    • 오렌지헤어어서 여행길이 넓게 열리고, 댓글작성자 분이 잠시라도 일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행의 즐거움', 제가 글을 쓰게 된 목적이었습니다. 알아주시고 귀한 댓글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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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자
    • 우연히 읽었는데 생동감있는 표현이 정말 좋았습니다. 글에서 생동성이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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