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고추리반', 소녀 히어로는 도처에 있지 [드라마/예능]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 아냐
글 입력 2021.03.25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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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추리반'의 흥행을 보며, 소녀들의 강함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여고추리반'은 티빙 오리지널(Tving original)로 방영한 ‘미스터리 어드벤처 웹 예능’이다. 더 지니어스 시리즈와 소사이어티 게임, 대탈출을 만든 정종연 PD가 연출하였다. OTT플랫폼에서 서비스된다는 점과 주요 출연진을 전원 여성으로 한 점 등에서 젊은 세대를 저격한 고퀄리티 예능으로 방영 전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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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예정해둔 회차의 절반인 단 8화만에 정종연 PD의 최고 흥행 시리즈인 ‘대탈출 시즌3’의 VOD 시청자 수를 넘겼으며 티빙의 인기 방송 순위 톱10에 꾸준히 이름을 올린 채로 방영했다.

 

지난 3월 19일 시즌 1의 마지막 방영을 끝으로 '여고추리반'은 큰 호응에 힘입어 빠르게 시즌 2 제작을 확정했다. 티빙에서 단독으로 서비스된 것이기에 시청률의 절대적인 수치는 낮았으나 '여고추리반'을 통한 티빙 유료가입자가 유의미하게 많았으며 정주행 횟수 역시 높아 중요 데이터로 고려되었다. SNS 등지의 화제도도 높은 편이었기에 OTT라는 플랫폼 서비스를 선택하고 젊은 세대를 겨냥한 플롯을 설정했던 만큼의 결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고추리반'은 여성적 경험의 상징적 공간인 여고를 배경으로 설정하여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동시에 주요 출연진들 간의 끈끈한 연대를 주요한 재미 요소로 포함했다. 흥미로운 점은 ‘소녀’ 캐릭터의 안팎에서 응집되는 프로그램적 특성이다. '여고추리반'은 정극과 예능 사이의 경계에서 캐릭터의 레이어가 포개질 수밖에 없다.

 

박지윤, 장도연, 재재, 비비, 예나 모두 현재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성 청소년은 아니며 예능의 플롯이 헐겁기에 완전한 ‘여고생’의 몰입도, 연예인 개인도 아닌 상태로 프로그램을 이끌어간다. 출연진 중 일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여 년이 지난 상황이고 일부는 극 중의 캐릭터의 나이 18살과 가까운 나이이기도 하다. 총체적으로 흐려진 경계가 오히려 예능적으로 풀리는 지점도 있는 동시에 극적인 몰입감이 고조되는 순간에는 여성 청소년 캐릭터로서 움직이는 이들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출연진의 다양한 여성적 경험 중 하나인 ‘소녀 시절’의 경험이 여고추리반의 서사 속으로 호명되는 것이다. 소녀답다는 것은 그동안 여성 혐오적 멸시를 받아온 특성 중 하나였으며 납작하게 상상되고 짐작되는 분야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풍부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 무정형의 소녀다움을 얕보고 있는 세상을 향해, 여성 청소년 다섯 명은 그 연약하고도 파워풀한 면모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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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추리반에게 의뢰된 첫 사건과 다름없는 컨닝 사건을 해결한 뒤, 장도연은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어른들’이 쌓은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여고추리반은 최대한의 정의를 찾아보고자 노력한다. 둘 중 누군가가 괴롭힘을 받았으니 징계의 수위도 달라져야 한다는 자신들만의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사건 해결에 어른들의 도움은 없었지만, 기성세대의 손에 중대한 순간을 넘겨주어야 하는 억울한 심정들을 본다. 그 억울함과 분노, 정의를 향한 최선은 절대 헛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고추리반은 16회의 장정 끝에 알게 한다.

 

거대한 과오와 싸워나가는 젊은 행위들은 미끈하게 세공되지 않은 울퉁불퉁함으로 가득하다. 그런 단면들이 젊은 시청자들에게 여고추리반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 이유이기도 하다. 무서워하면서도 전진하는 ‘여고생’의 발걸음은 ‘여고생’을 단편화하며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에게 날리는 통쾌한 한 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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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나아가 자신들의 주장과 행위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확산적으로 생각한다. 컨닝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징계 수위 조정을 주장했던 자신들의 행위가 고인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 등이 그것이다. 눈이 소복이 내려 고인혜의 목도리 위에 쌓이는 모습을 보며 여고추리반의 5인방은 그 무게를 깊이 새기며 계단과 복도를 뛰어다닌다. 이 일이 두렵지 않아서도, 슬프지 않아서도 아니다. 충분히 두려워하고 미안해하며 움직이는 소녀들에게서 연약하기에 강할 수 있는 동력을 본다.

 

기성의 사회가 묘사하는 강자의 자질은 무엇이었던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은 좋은 경쟁 능력만이 강자의 요소로 꼽혔다.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감정과 시간, 타자를 향한 공감과 환대의 경험들은 결여되는 것을 종용하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이다.

 

그러나 여고 추리반은 강함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린다.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잠시 주저하더라도, 때론 자신 나름의 정의가 무거운 영향을 끌어낼지라도, 타인의 감정을 느끼며 ‘사사로운’ 일에 온몸을 던지더라도, 여고추리반의 다섯 소녀는 중요한 것을 향해 나아간다. 소녀다움이란 연약하기에 들불과도 같으며 유연하기에 걷잡을 수 없는 강력함을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쓸모 없는 모든 존재들의 반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청자들이 명장면이라고 꼽는 것은 12화 중, 비비가 자신들이 도전하고 있는 거대한 '어른들'의 음모를 추리하고 나서 추리반에게 나지막히 심정을 밝히는 부분이다. 비비는 "우리... 해낼 수 있을까? 이 진실을 밝히고 범인을 잡는 걸 우리가 해낼 수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적이면?"이라고 말한다. 소녀들이 '뭣 몰라서' 용기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무력한 두려움을 강하게 느끼지만 그럼에도 나아간다. 비명을 지르고 뛰어다니더라도 서로를 붙잡아주며 중요한 것을 잊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은 소녀들의 강함 앞에서 조금씩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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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윤은 입시 명문 고등학교라는 명성을 가진 새라 여자고등학교의 역사에 대해 읽고는 말한다. “하위 0.1%가 들어와서 이걸 밝힐 거라곤 생각 못 했겠지.”

 

쓸모의 단위로 돌아가는 기성의 부조리를 부술 힘은 가장 유약하고 무모하다고 여겨지던 이들에게서 피어오른다. 여고 추리반의 용기와 집념을 보며 느끼는 죄책감을 동반한 쾌감은 그렇기에 복합적이다. 여고추리반에 호응하는 젊은 여성 시청자들의 모습까지도 독해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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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성은 영원히 어리지 않고 강해져 돌아와 당신의 세상을 부순다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 완벽하게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린 여성들은 어린 채로도 강했다. 어림과 강함이 양립 불가능할 것이란 전제는 순전히 연령 주의적이며 빈약한 발전주의적 사고방식에 물든 마음일지도 모른다. 어리고 강한 ‘소녀들’의 순간들을 목도하고도 ‘어른’들은 보호자, 통제자, 강자의 지위를 놓으려 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여고추리반의 복합적인 레이어가 작용하는 것은 이것이 정극이 아닌 예능이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오히려 어른으로서의 참회와 여성·청소년 캐릭터로서의 분노가 융합되어 인물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여고추리반의 소녀 히어로 물적 속성은 소년물과는 또 다른 레이어를, 여성 형사물과도 다른 관점을 가진다.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파워풀함과 외재적인 흥행을 조명할 때, 떠오르는 두 가지의 작품이 있었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와 장혜영의 노래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 아냐”이다. 우리가 그려내는 소녀 히어로의 진면모들은 소년만화처럼 간단하지도, 할리우드의 여성히어로처럼 거대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많은 소녀들이 지닌 힘을 다룬 다양한 콘텐츠들이 있고 그들이 각광을 받았다는 사실은, 여고추리반의 흥행 원인을 짐작하게 한다. 소녀 히어로는 세상의 곳곳에서 매 순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벌새>는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중학생 은희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담고 있다. 은희가 느끼는 무력감과 분노, 허망함과 동시에 애틋하고도 소중한, 미시적인 정동이 담긴 영화이다. 은희는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것, 좋은 동지를 잃는 것, 너절하게 덮어두고 사는 어른들을 목격하는 것, 폭력에 반기를 드는 일을 담담히 지켜보고 배워간다. 영화는 많은 상을 받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많은 여성 관객들이 느낀 공명의 감정일 것이다. 은희는 햇빛이 관통하는 이파리처럼 여리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조용하고 강하게 생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은희를 꼭 안아주고 싶어 하는, 소녀 시절을 이미 잃어버린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은희는 결코 단순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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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의 노래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 아냐”는 작고 소중한 것들과 타인을 위한 순간에 온 마음을 내줄 수 있는 용기를 노래한다. 타자에게 쉽게 공감하고, 작은 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이들의 템포를 우리 사회는 약한 것으로 치부하지만 이 노래는 그렇지 않다고, 담담하게 반론을 펼친다.


연약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 아냐.

연약한 존재들은 비밀을 안고 있지.

귀 기울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그런 신비로운 비밀 그런 아름다운 비밀


아름다운 것들은 쉽게 부서지고

되돌리는 것은 너무 어렵다네


연약하다는 것은 용감하게 산다는 것

한 가닥 실바람에도 온 마음을 내주는 것

설명하려 할수록 외톨이가 되네

하지만 그 모든 몸짓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살며시 감싸네


여고추리반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알고 보니, 보다 거대한 세상의 견고함 중 하나였다는 것은 여러 문화적 레퍼런스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마침, 지금, 이 순간 주목 받는 서사로 꼽히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연약한 존재일 수 있는 ‘소녀’가 그저 약하지 않다는 주제 의식이 주류 방송 콘텐츠로 나오며 환영받게 된 것은 아닐까?

 

세상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느끼는 두려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그들이 두려워하며 내디딘 모든 몸짓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주제 의식이 곧 시대의 현실이자 이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지이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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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약한 이들이 지니고 있는 약하지 않음의 속성을 소녀들은 갖고 있다. 자신의 힘을 의심하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부조리에 움찔하고 굴복한 날에는 분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 강력한 연약함의 힘으로 우리는 더욱더 두텁고 풍부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여고추리반의 5인방은 각자 다른 강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해야 공평하다는 편협함을 대신하여 각자의 고유함으로 5인의 소녀 시절이 성큼성큼 나아간다.

 

자 이제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가? 여고추리반은 우리 모두에게 각기 다른 고유함으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불어넣는다. 어두움과 높은 곳이 무섭지만 데데한 선생님들 앞에선 쫄지 않는 사람. 무서워하는 친구를 끌어안고 함께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 혼자 갇힌 공간에서도 친구들의 존재를 믿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이겨내는 사람. 그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강력함은 단일하거나 깔끔하게 구성되진 않는다. 그렇기에 중요하고, 그렇기에 파급력 있게 여고추리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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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부분입니다.

 

 

“자신을 포함해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라.”

 

여고추리반이 마지막 등교 날 받은 미션이다. 세상 모든 연약함이 동지를 살려내고 자신을 살려내는 과정의 강한 생동감을 본다. 고인혜를 구해내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자신을 무시하던 동급생들을 구해낸다. 그리고 털털하게 서로를 껴안으며 ‘드디어 웃어주는구나 얘들아’, 하는 것이다. 진땀을 빼며 구르는 그들은 전지전능하지 않고 그렇기에 소중하게 세상을 바꾸고 생을 구해낸다. 그 능력을 의심하지 않고, 쓸모를 따지지 않는 생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을 구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살아가기에 힘든 세상일수록 우리는 연약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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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하며 나아가는 소녀 히어로들은 언제나 곁에서 자라고 있으며 우리들도 과거 어느 순간에는 소녀 히어로였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이제 '여고추리반'의 시즌2를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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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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