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에 대하여 [사람]

"Goodbye"
글 입력 2021.02.05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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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죽음을 터부시하고 내 삶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매체에서 접하는 죽음은 절망과 슬픔뿐이다. 또한 불로장생을 위해 온갖 술수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야기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죽고 싶지 않기에 죽음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은 죽음을 더욱더 멀게 느껴지게 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멀리한다고 해서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어리석고 멍청해지곤 한다.


『삶, 죽음에게 길을 묻다』란 책을 읽어보면, 현 사회에서 죽음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문제 삼는다. 우리는 죽음을 의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다. “심정지 = 죽음” 이란 간단한 공식에 우리는 죽음을 가둔다. 이는 죽음을 육체 중심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죽음 정의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육체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오로지 산다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즉 잘 먹고 잘사는 것만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는 사람에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 집착이 극에 달하면 “돈이 없으니 살 가치가 없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니 살아갈 의미가 없다”란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주게 되며 생명 경시로 이어진다. 우리는 좀 더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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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존재를 믿는가? 영화 <21g>의 내용 중 영혼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죽으면 원래의 몸무게에서 21g이 빠진 상태가 되는데 이 21g이 영혼의 무게라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영혼에도 무게가 있다는 가설처럼 죽음은 영혼이라고 명명된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퀴블러 로스는 “우리 몸은 헝겊으로 만든 번데기와 마찬가지여서 죽으면 영혼은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나비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간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죽음을 단순히 육체적 소멸로 보기엔 우리 안에는 나를 움직이고 살아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불교와 티베트에서는 생명은 수명, 체온,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의식이 육신에서 벗어날 때를 죽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죽은 이후 시신으로 벗어나 영혼으로서 유지되고 윤회한다고 말한다. 붓다는 자신의 육체를 낡은 집에 비유했다. 세월이 지나면 집은 낡아 마침내 허물어지듯이 육신도 결국 낡아서 점차 바스러져 죽게 된다. 하지만 집을 받치는 대지는 변함이 없듯이 육신은 죽었지만, 마음은 대지처럼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어리석은 무명으로 인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일삼고 생사윤회를 반복한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누구도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그저 육체를 빌리는 것으로 인식한다.


티베트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티베트는 『티베트의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죽은 이후의 상황을 담은 책이다. 티베트인은 이 책을 죽어가는 사람 혹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읽어준다. 사후세계의 지침서를 읽어주면서 죽은 영혼이 방황하지 않고 사후세계에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욕심에 의한 강력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깨닫게 도와준다.


티베트인의 생사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르도(Bardo)이다. 바르도(Bardo)는 둘(do) 사이(bar)라는 뜻이다. 그것은 낮과 밤의 사이인 황혼 녘이며,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새다. 티베트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물게 되는 중간상태를 '바르도'라고 부른다. 그 상태에 머무는 기간은 49일로 알려져 있다. 즉 인간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과정적 존재이며 바르도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삶뿐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과 죽음 이후, 그리고 윤회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티베트인은 바르도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인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육신의 탈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들은 삶과 죽음 이후의 영혼까지 포용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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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good bye'는 납관 도우미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주인공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무명오케스트라의 첼리스트였다. 유일한 수입원이던 악단이 해체되고 실업자가 된 다이고는 '고소득, 무경험자 환영, 여행 도우미' 이란 파격적인 광고를 보게 된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알고 보니 납관 도우미(염장이)로 일할 신입사원을 뽑는 곳이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첼리스트에서 초보 납관도우미가 된 다이고는 모든 것이 낯설고 거북하다. 왜냐하면, 시체를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납관 도우미로 일을 하면서 다이고는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저 살아가는 것에만 집중하여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다이고 주변에서 죽어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 홀로 외롭게 생을 마감한 독거노인, 암에 걸려 죽게 된 사람 등등. 이들을 살아생전, 아니, 보다 더 생기있게 염해주는 선배 이쿠에이의 모습을 보면서 다이고는 죽음에 대한 예(禮)를 갖추게 된다.

 

처음에는 시체를 보며 토를 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은 자들의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준비를 도와주는 납관 도우미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생긴다. 영화의 한 장면 중 강가의 연어가 죽어서 떠내려가는 모습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했다. 영화는 죽음은 끝이 아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말하며 “Goodbye” 다음에 또 만나자고 말하며 끝이 난다.


다양한 관점에서 죽음에 대해 알아보았다. 죽음은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한다. 그 시기가 이르거나 늦거나의 차이일 뿐이다. 죽음에 관해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과학적, 비과학적으로 이야기되는 죽음 중 무엇이 진짜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죽음을 받아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늘 죽음과 가까이 살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죽음까지도 말이다. 바라는 것은 죽음이 다가왔을 때 무서워하기보다는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에 대해 많이 알아가고 생각하는 습관이 필요한 것 같다.


올바른 죽음, 바람직한 죽음, 행복한 죽음, 불행한 죽음, 슬픈 죽음… 죽음 앞에 붙은 수식어보다 죽음 그 자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 그 연습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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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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