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파과』를 접했을 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설정은 60대 여성 킬러라는 점이었다. 노인, 여성, 킬러. 좀 처럼 보기 어려운 조합을 구병모 작가는 하나의 인물 안에 담아냈다.
책장을 넘길수록 이 소설은 킬러의 삶을 이야기하기보다, 평생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않으려 했던 사람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겨나는 과정을 그려낸다.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순간
『파과』의 주인공 조각은 40여 년 동안 청부 살인을 해온 65세 여성 킬러이다. 한때는 완벽한 '방역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세월 앞에서 몸도 기억도 조금씩 예전 같지 않다. 사람들은 그녀를 '한 물 갔다'고 말하지만, 조각은 여전히 자신의 일을 묵묵히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순간, 조각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온다. 평생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않으려 했던 사람에게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존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버려진 늙은 개를 돌보고, 타인의 슬픔을 외면하지 못하며,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파과』는 그런 변화를 통해 평생 타인과 거리를 두며 살아온 한 사람이 어떻게 조금씩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가는지를 담아낸다.
『파과』 속 문장
매력적인 일이라고 생각 안 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한다는 핑계도 대지 않아. 개개인의 정의 실현이라면 그거야말로 웃다 숨넘어갈 소리지. 하지만 말이다. 쥐나 벌레를 잡아주는 대가로 모은 돈을, 나중에 내가 쥐나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그런대로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말했던 사람과, 함께 밥상을 나누고 머리카락에 싸락눈이 내려앉는 평범한 일을, 그녀는 잠시나마 그려본 적이 있었다. 상대방이 코웃음 칠까 입 밖으로 내보지 못한 소박한 풍경을, 바라선 안 되는 나날을.
p.34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그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에 논거를 깔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일찍 죽기 위해 몸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맥박이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것은 훌륭하게 부속이 조합된 기계의 속성이었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제 몸처럼 부리던 연장으로 인해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과도 같은 감각 외에는,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p.264~265
조각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미래를 기대하지도, 자신의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은 채 그저 하루를 반복하는 모습은 살아간다기보다 버텨낸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계절을 보내는 평범한 하루를 꿈꾸는 장면이 더욱 먹먹하게 다가왔다.
평생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 비로소 소소한 행복을 바라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고, 마지막의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보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시간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한다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스크린으로 옮겨진 『파과』
2025년, 『파과』는 영화로도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출간 이후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소설이 스크린으로 옮겨지며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한국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60대 여성 킬러라는 독특한 주인공이 영화에서는 어떻게 구현될지 개봉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영화는 소설이 담고 있던 액션과 긴장감을 살리면서도, 조각이라는 인물의 내면과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누군가를 제거하는 킬러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것을 갖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은 영화에서도 중요한 축으로 이어진다.
원작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 영화
영화를 보고 다시 『파과』를 찾는 독자들도 적지 않았다. 스크린을 통해 조각의 이야기를 먼저 접한 관객들은 원작 소설 속에 담긴 더 깊은 감정과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펼쳤고, 반대로 소설을 먼저 읽었던 독자들은 자신이 상상했던 조각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책과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각을 보여준다. 소설은 조각의 생각과 시간을 천천히 따라가며 변화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영화는 배우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액션을 통해 그 변화를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작가의 말
구병모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끝내 부서지지 않을 한 조각의 마음이 언제까지고 남아 있으리라는 걸 아는 것, 그 조각을 쥐고 저도 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려고 합니다."
소설 속 조각은 시간이 흐르며 몸은 늙고 삶도 변해가지만, 끝내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잃지 않는다. 작가가 말한 '부서지지 않을 한 조각의 마음'은 결국 조각이라는 인물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야 『파과』라는 제목이 다시 떠올랐다. 상처 입고 무르기 시작한 과일처럼, 우리 역시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사라지는 존재다. 그렇기에 가장 빛나는 순간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끝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파과』는 킬러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끝내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시간과 상실, 그리고 변화를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