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멋지지 않은 현세계에 관한 - 멋진 신세계 [도서]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해석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글 입력 2020.11.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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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시간,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을 완전히 의심하게 하는 경험이 있었다.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에 대해 배우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기능론적 시각에서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랍니다. 그러니까 교사인 저나 학생인 여러분들은 ‘사회’라는 유기체의 손가락이나 발가락 정도를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기능론적 시각에 따르면 우리는 다 같이 사회를 유지해야하기에 개개인의 의견이나 목소리보단 사회 전체가 더 중요합니다. 갈등론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사회구조는 소수의 권력자(부르주아)를 위해서 많은 노동자나 하층계급(프롤레타리아)들이 희생하는 모형인거에요. 그래서 갈등론자들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켜 브루주아와 싸우려합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소름이 끼쳤다. 어쩌면 내가 자아의 실현이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꿈, 내가 받아온 교육, 또 종교 등의 것들이 어쩌면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날 길들여온 과정일지도 몰라. 나, 그리고 각각 존엄하다고 여겨진 개인들은 사실 사회의 부품 정도였던 것이다. 망가진다면 교체하거나 버리면 그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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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자라왔던 관념이나 가치관, 종국에는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 존재 자체에도. 헉슬리의 책 <멋진 신세계> 역시 앞서 내 시각을 넓혀준 그 가르침처럼 당대 사람들에겐 그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하나의 사건적인 작품이었다.
 
작품은 분명 미래에 관한, 여러 기능을 주입시킨 복제인간으로 이루어진 ‘멋진 신세계’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꼭 앞서 말한 ‘기능론자’들이 꾸려놓은 멋지지 않은 구세계를 비판하는 이야기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우선 사회를 유지시키려는 목적을 위해 인간을 수단화 하는 것이 기능주의적으로 구성한 사회모습 같았다. 그 목적을 위해 인공 수정으로 태어난 복제인간들은 날 때부터 그 계급이 나뉘어 ‘부품으로서의’ 삶을 위해 ‘생산’된다. 갈등론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 사회는 완전히 잔인한 ‘계급 사회’인 것이다.
 
자율성을 가지고 개성을 가진 몇 명 되지 않는 ‘알파’ 계급을 위해 그 밑의 델타나 압실론 등의 계급들은 더 획일화 되고 반복적인 일을 하도록, 심지어는 자신의 기능과 쓸모에 만족하기까지 하도록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위 계급일수록 그 수가 많아지는 피라미드식 사회 구성을 전제한 것 역시 갈등주의가 비판하는 기능주의적인 사회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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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멋진 신세계를 이야기하는 척 하며 사실은 당시 사회를 비꼬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재미의 요소마저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기능론이니 갈등론이니 하는 이론적인 이야기보다도 훨씬 충격적이고 쉽게 당대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혀주었으리라.
 
*
 
다시 나의 고등학교 사회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선생님은 기능론과 갈등론의 설명 뒤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하셨다. “이렇게 기능론과 갈등론이 사회 구조 자체를 바라보고 분석하는 ‘거시적 관점’을 가지고 한창 치고 박고 싸우고 있을 때 이번에는 사회 자체가 아니라 개개인의 심리나 행동에 초점을 맞춘 ‘미시적 관점’이 등장하게 됩니다.”
 
소설에서도 기능론적으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멋진 신세계에 야만인 ‘존’이 등장하게 된다. 그는 (그 사회에서는 당연한) 자유로운 성관계라든가 각자 기능에 맞춰 만족하며 살고 있는 복제인간들, 또 감정을 조절해주는 약-이 대목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쾌락을 극대화 해주는 촉각영화 등을 보며 혐오감에 구역질을 하게 된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그’라는 인물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자면, 그는 아마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이 무너져 내려 혼란스러워 하는 심리상태였을 것이다.
 
그는 기능주의 혹은 갈등주의에서 보자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의 무너진 가치관을 세우려하는데 바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자학하며 셰익스피어의 여러 명문을 외우거나 하늘에 기도를 드려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행동을 하는 방법이었다. 즉 미시적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존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분명 각자 기능에 맞춰 사는 복제인간이 득실대는 ‘신세계’가 어딘가 기형적이고 비윤리적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옛 가치를 지키려 가학적인 모습을 보이는 원시인의 행동도 이상하긴 매한가지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영화 <더 랍스터>를 떠올렸는데 이 영화에선 세계가 ‘짝을 못 찾으면 동물이 되는 커플 세계’ 아니면 ‘짝을 지으면 벌을 받는 솔로 세계’로 이분화 된다.
 
<멋진 신세계> 역시 쾌락이 극대화된 -복제인간들로 대표되는- 세계, 절제와 억압이 주된 -야만인으로 대표되는- 세계로 나뉘게 된다. 극단적인 두 세계의 공존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이 닮아있다. 사실 두 세계 중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닌데 말이다. 아마 작가는 이런 부분에서 흑백논리로 이분화 된 사회를 꼬집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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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이야기였지만 <멋진 신세계>는 아주 영리하게 현세계, 혹은 구세계를 꼬집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로인해 이 책의 독자들은 세계를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 본연의 가치를 잊고 그저 그때의 쾌락에 만족하는 세계와 남은 ‘인간성’에 집착하여 도리어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세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아직 오지 않은 ‘멋진 신세계-미래-’를 꾸려갈 때 무엇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하는지 그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가르침 많은 고전이라고 평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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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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