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상념고갈

상념이 필요하다.
글 입력 2020.10.04 20:58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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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 Maltese, Madhouse


 

나는 생각을 멈추기 어려웠다. 질문이나 고민 따위가 내 머리를 집요하게 파고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끝낼 수 없었다. 어떠한 사건이나 외부로부터의 고민보다는 안에서부터 올라온 밀도 높은 생각들이었다. 계기는 특별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고민보다는 관념적인 고민에 가까웠다. 하루는 목욕을 하다 욕조에 몸이 전부 들어간 모습을 보며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라고 생각했다. 1평에 겨우 들어갈 크기의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가 되려 버둥대며 살고 있는가 물었다. 대략 이런 종류의 상념이었다.


나는 상념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습을 5시간 하면, 꼭 한두 시간은 두꺼운 일기장을 붙잡고 생각을 써 내려갔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일기장을 채워갈수록 나의 모습이 좀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상념은 나의 전부가 되었다. 나의 세계관을 찾아가는 과정은 남들의 입시나 진로 고민만큼 무거웠다. 당장 떠오른 상념이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일에 의미를 찾지 못했다. 당장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입시가 중요한가,라고.


철학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생각을 하다 보면 철학에 가까워짐을 느꼈다. 나의 상념의 결론은 대부분 ‘어차피 다 끝나고, 끝나면 아무 의미 없어’라는 일종의 허무주의였다. 허무주의라는 단어에 홀려 검색해보니 ‘한국의 허무주의 철학자 아무개 교수’라는 글이 나왔다. 교수는 ‘허무주의는 결론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허무주의는 긍정적 에너지를 향한다고 말했다. 나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허무에서 우울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애초에 우울과는 거리가 먼 밝은 청소년이었기에 아마도 나의 결론은 교수와 같은 긍정적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허무주의에 빠지고서 주변 친구들에게 사상을 설파했다.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 줄 아니’ 따위의 소재로 농담을 던졌다. 쿨해보이고 싶은 중2병의 지적 허영이었음에도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줬다. 반응은 대부분 ‘뭔 소리야’, 혹은 ‘미안 잘 모르겠어’였고, 가끔 ‘오 뭔지 알 것 같아’라는 대답이 나오기도 했다. 쓸데없는 말장난에 가까운 설파였다. 그래도 자기애가 흘러넘쳐 나의 전부였던 상념을 보여줄 때가 즐거웠다. 왜 그러고 다녔니.


그러다 보니 ‘생각이 많은 친구’가 되어있었다. 주변 친구들은 ‘너는 혼자만의 성을 높이 쌓아둔 느낌이야’라고 말했다.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 ‘생각 많음’은 확실한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좁은 고등학교 사회에서 공부 잘하는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웃긴 친구 따위의 인간군상에서 나는 생각 많은 사람이었다.


가끔은 새벽 감성을 이기지 못해 SNS를 통해 주저리주저리 상념을 배설하기도 했다. 이어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게시물을 칼같이 삭제해버렸지만, 나의 생각을 글로 써 공유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는 책을 내고 싶었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와 같은 그런 책 말이다.

 

*


생각 많은 어른이 되길 바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소중하게 아끼던 상념은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성인이 되었다. 술이나 게임에 정신이 붙잡혀 일기를 쓸 시간이 사라졌고, 나의 상념도 줄어들었다. 일기는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시간이 부족해 상념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기를 쓸 시간도 내보고, 펜과 노트를 붙들어 뭐라도 써보려 했다. 하지만 부족한 건 상념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과거의 상념은 내가 생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지금은 불안은 덮어버린 채 타성에 스며든 어른이 되어버리고, 상념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상념이 부족해지다 보니 사람은 회색이 되어갔다. 점점 무뎌지는 생각의 날은 주위의 유혹과 위협으로부터 날 지켜주지 못했다.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다. 남들과 같은 생각, 남들과 같은 행동. 당연한 생각들, 안정되고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일종의 신념이나 가치관은 환경에 따라갈 수 있는 사람들. 그렇게 나이를 먹게 되었다.


그렇게 살던 중 아트인사이트 전문 필진 모임에서 질문을 하나 받았다. ‘쓰고 싶은 주제들이 남아다고 하셨는데, 어떤 주제들인가요?’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자전적 에세이’ 정도로 대답했다. 옛날부터 일기를 자주 썼고, 그 글들을 엮어 세상에 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서 의심했다. 정말 일기 같은 에세이를 쓰고 싶었을까? 실용적인 글도 아니거니와  당장 써둔 원고용 일기도 없었다. 자전적 에세이를 쓸 이유에 대해 스스로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뭐가 대단하다고 날 보여주려고 할까?’라는 생각이었다. 나를 드러내기보단 글 뒤에 숨어있는 편이 좋았다. 나의 부족함이나 치부를 가릴 수 있기 때문에 남이나 세상의 이야기를 쓰는 게 편했다.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나의 생각을 작품으로 만들기보다 상념을 써 내려가는 행위에 목말라있었다. 일기는 상념의 부산물이었다. 타성에 스며드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고민에 해답을 찾고 싶었다. 시간은 지나는데 그대로인 나의 모습을 보며, 점점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고통받고 넘어지고 실수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회색이 되어버리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이미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타성에 젖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내가 재미없는 어른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상념이 고갈된 나의 모습은 딱 이 정도였다.


상념이 필요하다. 아직 생각할게 많이 남았고, 더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다. 아직도 상념이 숨 막힐 듯 몰려 들어오곤 한다. 그럴 때 덮어버리지 말고, 다시 일기장을 펼쳐 글을 써보자고 말하고 싶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돈을 얼마나 벌던, 누굴 만나고 어디서 살던 이 모든 고민을 상념으로 채우고 싶다. 고갈된 상념의 우물에 물을 채워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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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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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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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 최근 불안을 화두로 두고 글을 썼던 터라 김용준님의 글 속 ‘불안’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갔던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불안이 너무 많아서 고민하곤 했었거든요. 최근에 쓴 그 글에서는 제 자신을 불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생각, 상념에 대해 그것을 일으키는 것은 곧 ‘불안’이라는 글 속 내용이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제 불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요.

      더불어 “상념”이라는 것에 다시 주목하게 되었어요. 저로선 스스로에게 우스갯소리로 정리되지도 못할 상념을 너무 많이 가진 것 아닌가, 싶은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고 있었거든요. 김용준님의 글을 읽다 보니 그저 그렇고 개인적인 것만 같던 상념이 가진 어떤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 같아요. 글과 함꼐 저 역시 작은 성찰을 할 수 있던 것 같습니다.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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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melo
    • 2020.11.04 17: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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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상념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여도 훗날 생각으로 흔들리지 않게 막아주는 방파제라고 생각합니다.
      상념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도 흔들리고싶지 않은 마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요
      오히려 떠오르는 불안을 잘 흘려보내는게 자신만의 단단함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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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melo
    • 이 글을 쓰고 딱 한 달이 지났다.

      상념을 가져야지! 마음먹고 실행한 일은 블로그 글쓰기였다. ‘11월 4일의 보고 들은 콘텐츠’라는 제목으로 하루동안 접한 유튜브 영상이나 음악 따위의 감상 후기를 남겼다.
      생각이 글이 되니 앞으로 쓸 글에도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남길 수 있어서 좋았고, 내 감정이나 복잡한 상황들이 그때그때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꾸준한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생각을 남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도 했지만, 그럴 정신적 에너지를 쏟기 힘든 점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인스타그램의 콘텐츠 슬롯머신 속에서 좀비처럼 손가락을 넘기고 있는 행위가 좀 더 편했다. 공부니 뭐니 이런저런 핑계로 글쓰기와 생각을 동시에 멈춰버려 뒤늦게 밀린 원고와 일정들을 수습하고 있다. 상념이 떠올라서 상념의 소중함을 느끼기보다, 무언가 루틴이나 시스템을 만들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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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ongdong10912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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