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랑수아즈 사강의 매혹적인 문학 [문학]

슬픔이여 안녕
글 입력 2020.09.2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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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단의 매혹적인 작은 괴물, 프랑수아즈 사강이 열여덟의 나이에 쓴 소설 <슬픔이여 안녕>은 사강의 화려한 데뷔작이자 천재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내가 사강을 처음 만나게 된 건 그녀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통해서였는데, 첫 작품이 나온 지 5년 만이라 하여도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쓴 소설이었다.

 

마흔 살 언저리에 있는 두 남녀 주인공의 내면묘사는 24살의 작가가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디테일하고 완숙했으며, 여기에 스물다섯의 아름다운 청년 시몽이 나타나면서 생기는 삼각관계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하지만 삼각관계를 다룬 흔한 통속 연애소설과 달리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뻔하지 않은 전개와 현실적인 결말로 충격을 안겨준 매우 독특한 소설이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완성도 높은 소설들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한 사강은. 그녀의 요란했던 삶이 문학의 저평가를 받게 한 케이스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사강이 했던 이 유명한 말이 보여주듯 그녀의 삶은 속도, 도박, 마약, 섹스로 떠들썩한 불꽃같은 삶이었다. 실제로 이런 그녀의 가치관과 삶은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에서도 잘 드러나며 사랑을 믿지 않는 그녀의 모든 소설의 원형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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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은 작별 인사가 아닌 만남의 인사다. 현재는 나이를 더 먹은 여주인공 ‘세실’이 처음 슬픔을 마주했던 자신의 열일곱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세실은 매력적인 호색한인 그녀의 아버지 ‘레몽’과 아버지의 애인 ‘엘자’와 함께 바닷가의 한 별장으로 여름휴가를 떠난다. 세 사람의 평온했던 여름휴가는 어머니의 친구인 ‘안’인 등장하면서 깨지고 만다. ‘안’은 아름답고 지적이며 경박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지적인 여자다. 그런 ‘안’이 그녀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레몽’을 사랑하면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갈등을 다룬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어린 세실이 그녀의 아버지를 둘러싼 여인들 간의 사랑을 관찰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명백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실이다. 지적이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는 안은 세실과 레몽 부녀와는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세실도 그런 안이 ‘옳다’고 생각하고 선망하지만 본능적으로 안이 통제하려는 각 잡힌 삶을 거부한다. 세실은 자신 스스로가 안이 경멸하는 경박한 사람들, 자유로운 사상으로 행동까지 통제권을 잃어버린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에게서 매력과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세실에게 사랑이란 한 번의 입맞춤과 사랑의 속삭임 같은 부분적인 기억으로 완성된 단편적인 쾌락일 뿐, 그리움이나 진실함 같은 연속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 이런 세실의 생각은 안과 명백하게 대립을 세우며 곧 작가 자신의 생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랑을 믿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사강은 오직 열정만을 믿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대한 연속적인 이유로, <슬픔이여 안녕>에서 진실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고 그런 사랑을 믿었던 인물은 죽음을 맞이하며 작품에는 곧 사라질 가벼운 열정만이 남아있다.

 

<슬픔이여 안녕>이 이토록 매혹적인 이유는 자유분방한 사랑(사강의 표현대로라면 열정)을 그리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이 작품은 이제 막 성년으로 넘어가는 소녀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성에 눈을 뜨게 되는 성인식 같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디테일한 외부 묘사보다는 주인공의 내면 묘사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고 주변 인물들을 만들어낼 정도로 세실이 겪는 다양한 감정 변화가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다음은 안이 통제해 나갈 앞으로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깊은 고민에 빠진 세실의 고백이다.

 

 

“어쨌든 왜 나 자신을 그렇게 비판해야 하지? 나는 그냥 나야. 그러니 사태를 내 마음대로 느낄 자유가 있는 게 아닐까? 평생 처음으로 ‘자아’가 분열되는 듯했다. 나는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찾아내 나 자신에게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그런 내가 진실한 나라고 설득했다.”

 

 

세실은 그녀를 둘러싼 외부의 상황을 통해, 그리고 마주하게 되는 ‘슬픔’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이와 비슷한 부류의 소설이라고 느꼈는데, 와타나베가 죽음과 상실을 통해 성인식을 치른 것처럼 세실 역시 성장의 터널을 거쳐 성인으로 나아간 회상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은 작별의 인사가 아닌 만남의 인사라고 앞서 언급한 바가 있다.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슬픔을 만난 세실이 아릿한 죄책감을 가지고 처음 만난 그 낯선 감정에게, 그 시절의 나에게 건네는 인사다.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처럼 <슬픔이여 안녕>은 나이를 먹지 않는 작품, 성인이 되어 자라난 사랑니의 고통처럼 모두에게 보편적인 이야기다.

 

<슬픔이여 안녕>이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 또한 많은 이들이 이 공통의 고통을 통해 치유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위대한 문학이 오래도록 남는 이유와 문학이 주는 큰 힘이 세대를 초월해 작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러한 경험과 비슷한 치유를 받았기에, 시간이 훨씬 지나 아릿했던 스무 살을 추억할 때 이 책을 다시 집어 들 것 같다. 만남의 인사를 건네며 말이다. 슬픔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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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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