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1년 전 죽은 가해자의 고백, 그리고 사과 - 도서 '아버지의 사과 편지'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인 자신에게 보내는 사과 편지
글 입력 2020.09.21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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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시간을 견디고 진정한 사과를 기다리며 온몸을 다해 세상과 싸워온 엔슬러의 글은 잔혹한 폭력의 실상을 복원해낸 고통의 기록이자, 남성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폭력을 고발하는 증언이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무엇을 사과해야 하고, 어떻게 사죄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안내하는 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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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생존자이자 <버자이너 모놀로그> 작가인 이브 엔슬러. 아버지로부터 성폭행, 학대, 가스라이팅 등을 당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다. 생존자로서 여성의 몸에 대해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사회운동가로서 각종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선다.

 

엔슬러의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목소리로 전개되는 책이다. 그녀는 “이 편지는 탄원서이자 소환장이며 나의 의지와 그에 필요한 말을 아버지에게 부여하고 사과의 언어로 표현하게 해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만들려는 노력이다.”(p.15-16)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망가트렸던 주범인 아버지로부터 끝까지 사과받지 못한 그녀. 그녀는 현실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을 통해서야 그에게 사과받는다.

 

이는 편지 형식임에도 이야기 구성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다. 아서 엔슬러(이브 엔슬러의 아버지)는 먼저 폭력을 일삼게 된 가장 큰 이유인 ‘가부장적이었던 가정’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후 엔슬러가 태어난 이후 변화된 자신, 그러한 자신이 고통으로 몰아넣은 그녀의 삶에 대해 털어놓는다.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아서 엔슬러의 자기 합리화


 

내게 ‘사과’란 필수적인 것에 가깝다. 어떠한 잘못을 했든 간에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당연한 걸 못하는 사람도 많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음에도 사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능성이 있다. 단지 용기를 가지고 입 밖으로 내뱉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은?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하는 기능이 고장 나버린 것일까 아니면 자기합리화를 통해 끊임없이 부정하는 것일까? 후자의 경우, 정말로 답이 없다. 오로지 자기 입장만 생각하며 자신이 지은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기에 어찌 손 쓸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아서 엔슬러다.

 

그는 자신이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그가 저지른 짓들을 모두 정당화시킨다. 그가 성폭행한 이유조차 ‘순수와는 멀어진 내가 순수한 아이에게 욕정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며 어린 이브의 살결이 너무 부드러웠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에게 가장이란 건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따라서 법을 따르지 않으면 벌을 주었고, 그 대상이 바로 이브였다.

 

결국, 모든 게 이브의 잘못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생각한 그. 그렇기에 죽을 때까지 이브에게 사과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걸 그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이라면? 그것이 옳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면? 과연 이를 그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비극의 시작



 

어머니나 아버지 모두 나를 위한 자신들의 계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에게 커다란 희망을 가졌기에 다른 형제자매를 대할 때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나를 대했지. 나는 그들의 프로젝트였단다. 틀에 끼워져 완벽한 모습을 갖춰야 했지.

 

-p.40

  

 

어린 소년이었던 나의 진짜 모습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부모의 방식, 그들이 나를 이상화하고 왕처럼 대했던 그들의 방식 그대로, 나 역시 스스로를 대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신이 되었어.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었지. 그림자 인간은 그 이야기에서 차지할 자리가 없었다.

 

-p.50

 

 

이 끔찍한 비극은 아서 엔슬러의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지나치게 가부장제를 따르고 남성 권력의 힘을 믿는 그들 말이다. 끝없이 이어져 온 가부장제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된 아서. 그는 어린 나이부터 로봇처럼 입력된 대로만 행동해야 했다.

 

그는 그때부터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 진짜 ‘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바랐던 훌륭한 남자(권력과 힘을 갖춘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남자)가 된 것이다. 그들로부터 왕 취급을 받던 그는 어느새 자신을 이 세상의 신으로 여기게 된다. 자신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던 ‘그림자 인간’, 태초의 순수했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모든 것을 연기하게 되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한 남자가 존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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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너는 나의 아이였다. 나의 소유물이었지.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했어. 그러지 않을 때 규율과 처벌을 실행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었다. 바로 내가 키워진 방식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겪은 대로 너를 다루고 있었어. 내가 배운 대로 하는 것뿐이었지.

 

-p.113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들을 빼다 박은 남자가 탄생했다. 자신이 배운 그대로를 행한 아서. 앞서 말했듯이 이를 아서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물론 아서의 잘못도 있지만, 선조에게도 죄가 있다고 본다. 이를 끊어내고 더 이상 지속하지 말았어야지. 본받을 점이 도대체 어디 있다고 그대로 물려준 것일까?

 

현재야 가부장제가 많이 사라져서 다행이지만, 과거의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도 안 간다. 단지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권을 지닌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생물학적인 차이만 있을 뿐, 그 무엇도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마치 다른 계급인 것처럼 굴었다는 게 정말로 역겹다.

 

아서는 이브를 하나의 소유물로 취급하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을 행사했다. 과연 그가 그녀를 자신의 딸이자 사람으로 대했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정도면 노예 취급이 아닌가. 일생의 보금자리인 가족이 수직적인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니. 온 가족이 그의 의견을 따랐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가 그 안에서만큼은 신이 된 걸지도 모르지.

 

 

 

아픈 기억을 낱낱이 드러내다


 

 

"피자 가게. 대단치 않은 싸구려 음식점. 가족의 저녁 식사. 마티니가 없다. 짜증이 난다. 자리에 앉아 불안해하는 너. 부산스러운 움직임. 똑바로 앉아, 이브.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내가 잔소리를 하지만 너는 즉시 반항한다. 미련한 계집애 같으니. "아니, 싫어요." 퍽.

 

내 주먹이 너의 멍청한 얼굴 한가운데로 날아간다. 너의 코에서 피가 솟는다. 붉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테이블보에 선홍색 얼룩이 생긴다. 너는 얼어붙은 채 경멸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네 얼굴은 흘러내린 피로 가득하다. 가족들은 공포에 떤다.

 

-p.125-126

 

 

p.125-130까지는 아서가 이브에게 행했던 폭력에 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온다. 책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기는 처음이었다. 보통 책은 시간을 넉넉히 잡아두고 몰아보는 편인데, 이 책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읽다가 보기 힘든 순간이 종종 찾아와서 멈췄다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딱 이 페이지를 읽다가 찾아왔다. 실제로 겪은 일이 아님에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져 가슴이 울렁거렸다. 도저히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헛웃음만 나왔고 뒤이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이 과정을 적어냄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의연하게 마주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 아픈 기억들을 온전히 꺼내놓았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피해받은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가 같은 피해자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겠지. 더 나아가 생존자로 존재하게끔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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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는 이브의 말 한마디에 주먹을 날렸다. 이러한 사람이 어딜 봐서 훌륭한 남자란 말인가? 그것도 여러 사람이 있는 음식점에서 말이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음을 정말 인지하지 못했을까? 왕처럼 떠받들어 주니까 그래도 된다는 건가? 그러할 권리도 없으면서 자기만의 법칙을 세우고 이를 가족들에게 따르도록 강요한다. 이는 독재이자 횡포이다. 그녀에겐 맞아야 할 이유조차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나를 화나게 한 또 다른 대상, ‘가족들’. 누군가 피가 나면 “괜찮아?”가 먼저 아닌가? 그의 가족들은 공포에만 떨었고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끊임없는 폭력의 굴레를 끝내지 못했던 건 그의 가족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모두가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방조할 뿐이다. 아무리 무섭더라도 여러 명이 한 명에 대항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심지어 같은 가족이니 말이다. 방관자도 때로는 가해자와 동등한 죗값을 치러야 함을 알았으면 좋겠다.

 

 

 

피해자에게는 잘못이 없다


 

 

이 모든 것이 그냥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니?

기억하는 것만큼 정말로 끔찍했니?

왜 다른 사람들은 이 일에 신경 쓰지 않았을까?

왜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지?

너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왜 그 자리를 조용히 비켜가지 않았니?

왜 너 자신에게만 신경을 썼던 거지?

너무 유난을 떤 건 아니야?

 ...

(중략)

 ...

왜 받아들이지 못하니?

 

-p.143

 

 

이 대목에서 소름이 끼쳤다. 앞서 말했던 가해자의 자기 합리화가 여기서 등장했다. 사과 편지 안에서도 등장하는 그의 이기적인 생각들. 모든 걸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그 끔찍한 사고방식에 탄식이 나왔다.

 

가끔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성폭행 피해자의 경우는 더하다. 여성 성폭행 피해자들을 다룬 뉴스에서 “치마를 짧게 입었으니까 그러지.”, “밤늦게 다니지 말았어야지.”, “여자애가 처신을 잘했어야지.”라는 댓글을 접할 때가 있다. 그들은 왜 그러한 의견을 남기는 걸까? 피해자라는 단어 자체가 그들에게 잘못이 없음을 알려주지 않는가? 이것도 2차 가해임을 모르는 걸까? 엉뚱한 피해자에게서 이유를 찾는 어리석은 사람들. 그들에겐 배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

 

쉽게 접해볼 수 있는 책은 아니어서 그런지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가해자의 언어를 통해 보게 되니 더욱 쓰렸달까. 가해자가 되어 피해자인 자신에게 보내는 사과 편지를 쓰는 기분이 어땠을까. 나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이야기가 세상에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이브가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기를 빈다. 그들이 더 힘찬 날개를 펼치고 자유롭게 날아오르기를.

 

 


 

 

아버지의 사과 편지

딸아 미안하다. 그건 강간이었다.
 

지은이 : 이브 엔슬러
 
옮긴이 : 김은령

출판사 : 심심

분야
외국 에세이 / 여성학

규격
133*193

쪽 수 : 208쪽
 
발행일
2020년 08월 14일

정가 : 15,000원

ISBN
979-11-5675-835-8 (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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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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