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개 돌릴 줄 아는 시 [문학]

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기계적 운동성에 대한 시의 저항.
글 입력 2020.08.11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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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는 뒤를 돌아볼 줄 안다.

 

고개를 돌릴 줄 모르는 시는 도망치는 시다. 자신을 통렬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생에 가까운 시간이 걸리고 그 응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 환원되기도 한다. 몸이 비추고 통과하는 게 모두 세상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자신의 육체를 통해 ‘주체 중심의 증언과 선언’, ‘타자-되기의 연행과 제의’ 등으로 저항한다.

 

김혜순 시인은 ‘되기’와 ‘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 ‘시’는 동사가 되고 이는 단순한 시적 대상과의 동일시를 넘어선 일종의 ‘빙의’다. 『피어라 돼지』에서 살처분된 돼지를 얘기하는 것을 넘어 언어에 의탁한 돼지를 자신의 시로 발설한다. 말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신경한 사람들에게 약동하고 처절한 말을 선사한다.

 

이는 누구나 생각하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혜순 시인이 겪은 고투 속에서만 나오며, 여기에는 자신이 해체되는 통증이 동반된다.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

- 김혜순 「피어라 돼지」 부분

 

 

백무산 시인은 폐허에 폐허가 덧입혀지는 세상에서 노동의 몸부터 생명에 대한 가슴 떨리는 포착을 드러낸다. 그는 찰나의 순간을 증언하며 인간이 아닌 생명으로서 시를 말한다.

 

 

잠에서 깨어나 창을 열면 이곳이 별이라는 생각

벌거벗은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눈을 뜨기를

그래서 나는 습관처럼 인간의 가장자리 사회의 가장자리

그 모든 가장자리를 그리워한다네

한 십만 년을 소급해서 살고 싶다네

 

- 백무산 「그 모든 가장자리를」 부분

 

 

허수경 시인은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위계를 허물고 ‘–중심’의 태도에서 벗어나 세계와 약자의 시선으로 말한다.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대상과 묘사는 그것을 환유라는 수사의 연관과 관계없이 지극한 마음으로 얼룩진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것과 대화한다. 그 대화는 허수경의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대화의지를 부여한다. 이 의지를 감각하는 게 중요하다.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발신자: 고대의 여름

수신자: 현대의 겨울

안녕,

다시 가보지 못할 페허여

경적을 울려대며 사방팔방에서 밀려 나오던 낡은 차들이여

소리소리 지르며 혁대를 팔던 소년들이여

양의 피가 바닥에 흐르던 시장이여

초와 비누 대추야자와 강화 가루를 팔던 거리여

날아가던 총알에 아의 심장이 거꾸러져도

아무도 그 심장을 거두지 않던 오후여

 

- 허수경 「카프카 날씨 2」 부분

 

 

세 시인의 시가 추동하는 마음은 인과를 훑기도 아득해지는 생명의 시간을 돌아보는 의지다. 매일을 사는 사람들의 기계적 운동성에 대한 시의 저항은 항상 귀하다. 그 저항은 더 작은 움직임으로도 자기 외의 모든 세상을 생각할 수 있는 역동성을 담보한다. 그렇기에 시를 보기 위해, 세상을 보기 위해 멈추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 글의 모티브는 나희덕 시인의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에서 비롯됐다. 스웨덴 생태학자 안드레아스 말름 교수는 기후 변화에 대한 책임 주체를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는 이유로 환경 변화와 위기의 시대를 지칭하는 인류세(Anthropocene)가 아닌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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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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