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소모임에게는 룰이 필요하다

즐겁고 지속되는 소모임을 위하여
글 입력 2020.08.1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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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엘리베이터 앞에서 회사 동료와 인사를 나눈다. 엘리베이터가 오려면 한참 멀었다. 헛기침 두어번.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대화는 지난 주말에 대한 질문이다.


1주차


"나연님 주말에 뭐하셨어요?"

"아 저, 주말 내내 집에서 엄마 밥 먹고 하루에 90걸음 걸었어요^^"


2주차


"나연님 주말에 뭐하셨어요?

"아 저, 이번 주에는 배달음식 시켜먹고 계속 집에 있었죠^^"


3주차


"나연님 주말에 뭐하셨어요?"

"아 저 주말 ㄴ.."

"집에 계셨구나? 그럴 줄 알았어요^^" (실제 대화)

(아니 월화수목금 내내 빨빨거리는데 주말에 뭘 할 힘이 날 리가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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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 없는 실화)

 

 

주말마다 집에 콕 박혀서 애플 '건강'앱이 하루에 90걸음 정도 걸었다고 말해주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회사에 가지 않는 주말에도 사람을 만나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그리고 이걸 주기적으로 계속한다는 건 대단히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다. 회사를 가지 않는 날에도 굳이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에너지를 써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두 가지 소모임을 꾸준히 하고 있다. 1년 4개월 동안 지속해온 팟캐스트 [콘덕트]와 4개월에 접어드는 독서 소모임 트레바리다. 팟캐스트는 사회학과 여자 동기 세 명과 함께 각종 콘텐츠를 리뷰하는 방송을 만들고 있고, 트레바리는 전혀 모르던 사람들과 만나 기획과 제품에 대한 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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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문화'는 2018년의 트렌드였다. 18세기 프랑스 귀족들이 모여 대화하고 토론하던 '살롱'(방)이 2018년 한국에서 트렌드가 되었다. 더는 일로만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모여,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를 공유하며 맞는 사람들끼리 취미 소모임을 지속하는 것이다. 2018년에 비하면 살짝 시들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트레바리를 필두로 이런 모임들은 꽤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등산을 하고, 보드게임 카페에 가고, 책을 읽고, 유튜브 영상을 찍기도 한다. 동호회의 작은 버전이랄까?

 

그렇게 약 1년 넘게 네 명이 모여 팟캐스트를 제작했다고 이야기하자,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나연님, 팟캐스트할 때 서로 꼭 지켜야하는 룰은 없어요?' 이때부터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룰. 지속하기 위한 규칙. 아무도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암묵적으로 지속하게 되었던 것들.

 

그래서 정리해보니 대부분의 취미 소모임에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이어온 모임들에 적용되었던, 그 모임을 건강하게 지속하기 위한 룰은 크게 4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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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모두 비슷하게 노력해야한다

 

누군가 한 명만 애써서 하는 소모임은 지속될 수 없다. 네 명이 하는 팟캐스트는 말하는 사람 세 명과 편집하는 사람 한 명으로 이루어져있다. 나는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방송 준비를 한다. 항상 방송 전에 최소 30분 정도 온라인으로 모여 콘텐츠를 정하고, 간단한 콘티와 흐름을 정하며, 분량을 나눈다. 방송 중에도 다른 친구들이 편하게 끼어들 수 있도록 간단한 콘티와 대본을 공유 문서로 작성해서 올려놓기도 한다.

 

트레바리에서는 그 노력이 '독후감'이다. 모임에는 한 명 이상의 발제자가 늘 필요하지만, 발제자가 아니더라도 그 모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독후감을 써야 한다. 책을 다 읽는 것은 필수적이지만 시험을 보며 검사하는 내용은 아니므로, 적어도 400자 이상의 독후감을 쓰는 노력과 성의를 보여줘야 한다. 이 성의 없이는 아무리 책을 잘 이해하고 있더라도 모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모임에 참가하는 모두가 항상 동등한 노력을 붓기란 쉽지 않다. 때때로 각자의 사정에 따라 누군가가 그 노력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그걸 용인해주는 건 친목의 정도, 혹은 규율의 엄격함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예를 들어 친구들끼리 하는 팟캐스트에서 한 명이 일이 있어 방송 준비를 할 수 없다면, 나머지들이 좀 더 많이 하면 된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들이 모여 독서 소모임을, 그것도 회당 7만원씩 주며 할 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프리라이더에게 허락된 자리는 없다.

 

하지만 어떤 친목에 근거한 모임이더라도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해당 모임에 참여하는 멤버들에게 비슷한 수준의 노력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결국 더 많이 노력하는 사람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게 된다. 그렇게 다음주로, 다다음주로 미뤄지면서 모임은 눈사람처럼 스르르 녹아 자취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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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Freepik, jcomp)


 

두 번째. 어느 정도의 회비는 내야 한다

 

직장인에게 활동은 크게 두 가지다. 돈이 되는 활동, 돈이 드는 활동. 돈이 되는 활동의 구속력이 훨씬 강하긴 하지만 돈이 드는 활동도 그 지출이 미리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나를 어느 정도는 속박한다. 돈을 내지 않는 활동은 조금만 귀찮아도 '내가 왜 굳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돈을 미리 내는 활동은 '그래도 돈 냈는데...'하는 생각이 침대에서 나를 일으키는 것이다. 직장인의 경제적 레벨(연봉이나 씀씀이 같은 것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커피 몇 잔의 소액부터 월 7만원까지, 나를 속박하는 비용들은 나로 하여금 꾸준히 모임에 나가고 활동하게 만든다. 어느 정도의 회비는 모두에게 구속력을 작동시켜 사람들의 활발한 참여를 돕기도 한다.

 

금액의 설정이 어느 정도가 적당한 지는 모임 구성원의 경제적 수준과 모임에서 얻고자 하는 가치에 따라 다르다. 회비는 모임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부터, 해당 모임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자부심(pride)를 심어주는 것까지 역할에 따라서 구분된다. 이 직선 위에서 팟캐스트는 전자이고 트레바리는 중간 정도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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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revari)

 

 

세 번째. 적당한 분기별 구분, 혹은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

 

돈이 되는 일이든 돈이 드는 일이든 휴가는 필요하다. 하물며 돈을 버는 일에도 1년에 15일 휴가를 주는데 돈이 드는 일이라고 그렇지 않을 리 없다. 예를 들어 트레바리는 4개월마다 시즌을 구분하면서 회차를 분리한다. 이건 더 많은 사람들을 조금씩 친하게 만든다는 목표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너무 긴 활동에 지치지 않게 돕기도 한다. 또한, 함께하는 소모임의 사람들이 스스로와 맞지 않을 때 빠르게 다른 모임에 참여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팟캐스트는 트레바리처럼 분기별 구분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터닝포인트들은 있었다. 나름대로 구성을 바꿔가며 개편을 하기도 했고, 녹음 장소를 옮기면서 녹음 주기를 바꾸기도 했다. 연말에는 나름의 시상식 특집을 했고 여름에는 휴가철에 보기 좋은 것들에 대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소모임 내부에서 기간에 따라 나름대로의 '이름 짓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팟캐스트는 후에 '시즌제'로 운영하는 게 더 건강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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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freepik, stories)

 

 

네 번째. 즐거워야한다.

 

사실 제일 중요하다. 이 조건은 필수 조건이고 전제 조건이다. 취미 소모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재미가 필요하다. 그 소모임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좋고, 나누는 이야기가 즐거우며, 다시 모임에 나가 그들을 만나서 활동하고 싶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절대로 오래갈 수 없다. 돈이 되는 모임이 아니라 돈이 드는 모임인 만큼 이 모임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가 무척 중요한데, 취미 모임에서 얻을 수 있는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가치는 즐거움이다. 즐거움을 기반으로 한 자발적 동기로 다음 모임에 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자주 받는다. 얼마 전에는 회사 대표가 '나연님은 이 회사에서 제일 행복해 보여요'라고 해서 진심이냐고 되물은 정도다. 항상 회의실 앞 책상에 앉아서 인상 쓰고 일하는데 왜 그런 말을 한 건진 잘 모르겠다. (일 안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런 긍정적인 기운은 어느 정도는 타고났겠지만, 나 또한 맨바닥에서 끌어오는 에너지가 대부분이라 수시로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 하는 충전이 필요하다. 휴가나 주말엔 스스로의 잠의 양에 놀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모임을 꾸준히 이어온 건 내가 쓴 것보다 더 많이 돌아오는 에너지 때문이다. 좋은 대화와 웃음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들. 비가 쏟아지는 날 홍대입구 1번 출구로 나와 팟캐스트 녹음 스튜디오까지 걸어가는 일은 즐겁지 않지만 그 안에서 반짝이며 녹음에 몰입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 한 시간 반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솔직히 가기는 귀찮지만 가면 너무 즐겁다! 그렇게 3주에 한 번 정도, 귀찮다-준비-참석-즐겁다!를 반복하며 주말을 보내고 있다.

 

다음 주에 있을 녹음도. 다다음주에 있을 4번째 북클럽도. 아마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귀찮다-준비-참석-즐겁다!

 

 

[김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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