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별은 레몬차와 같다, 레몬청 만드는 법 [도서]

단 맛 뒤에 그 씁쓸함
글 입력 2020.07.2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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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라임_표지.jpg

 

 

보통 앞면에 책의 제목과 작가 이름, 그림이 있다면 뒷면에는 내용 요약이나 추천사가 적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한 쪽 면에는 「레몬청 만드는 법」이라는 제목과 레몬색으로 뒤덮인 표지가, 다른 쪽 면에는 「핑거라임」이라는 제목과 라임색으로 뒤덮인 표지가 있다.

 

앞과 뒤가 구별이 가지 않아 마음에 드는 쪽으로 펼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재밌었다. 이런 구성과 표지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는데 각각의 표지에 레몬 모양과 라임 모양으로 음각된 것이 한몫 톡톡히 했다. 내부의 삽화는 <레몬청 만드는 법>에는 레몬색과 검정색, <핑거라임>에는 라임색과 검정색만 사용했는데 레몬과 라임 특유의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레몬라임책_내지50-51.jpg

 

 

레몬과 라임은 새콤하다고 말하기에는 혀가 아릴 정도로 시다는 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과일의 속성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각의 소설은 '고통'이라는 공통의 주제를 담고 있다.

 

<레몬청 만드는 법>은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의 시선에서 손님에게 레몬차를 건네 주는 걸 통해 타인의 고통을 가만히 바라보고 <핑거라임>은 상담사의 시선에서 환자에게 고통을 줄 정도로 신 핑거라임을 건네 주는 충격요법을 통해 타인의 고통이 다른 고통으로 덮이는 것을 돕는다.

 

나는 두 이야기 중 「레몬청 만드는 법」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이별은 레몬차와 같다.

 

 
레몬을 얇게 썬다. 유리병 속에 레몬 조각을 한 층 깐다. 그 위에 설탕을 얇게 덮는다. 다시 레몬 조각을 한 층 깐다. 설탕으로 덮는다. 레몬 조각 한 층, 설탕 한 층, 레몬 조각 한 층, 설탕 한 층. p.7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얼굴을 익힐 만큼 가게에 자주 오던 커플이 더이상 오지 않게 되는 이야기. 그러다 어느날 여자 혼자 와서 늘 마시던 레몬차를 한 잔이 아니라 레몬청 한 병을 시켜 앉은 자리에서 열세 잔을 마시고 갔다는 이야기. 이를 지켜보던 화자가 레몬청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로 끝난다.

 

둘 사이의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늘 같이 오던 곳에 혼자만 왔다는 것만으로 상황을 짐작게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여자가 레몬청 한 병을 통째로 살 수 있냐고 하니까 점원은 그 자리에서 마시고 나오는 잔 수대로 계산을 하자고 한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한 잔으로 충분한 레몬차를 그 자리에서 열세 잔이나 마실 리가 없다. 그런데 여자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의 서사를 읽고 이해의 발끝이라도 가닿아 보는 것이다. 여자는 한동안 좋아하던 레스토랑에 못 왔을 것이다. 디테일이 하는 일 때문이다.

 

디테일은 타인의 습관을 뇌리에 박히게 해 이따금 기분 좋게 벅차오르게 하는 일을 하고 끝없이 복기하고 고통을 주는 일을 한다. 우리가 늘 있었던 그 자리를 기억하게 하고 그곳에서 나눴던 대화를 들려준다. 부재의 존재를 세세하게 알려 준다. 여자는 그곳에서 우연을 위해 한 잔 기다림을 위해 한 잔 희망과 고문의 이름을 한 여러 잔의 레몬차를 마신다.

 

 
나는 레몬을 썰다 말고 사분의 일쯤 되는 조각을 그대로 입에 넣었다. 시고 씁쓸한 과즙이 혀에 닿았다. 코를 막고 레몬 조각에 이를 깊이 박아 보았다. 강렬한 신맛에 입 안이 아렸다. 시큼한 향이 피부에서 스며 나오는 기분이었다. 레몬차를 마실 때에는 달달한 설탕이 레몬의 신맛을 가린다. 그렇지만 음미하다 보면 문득 날카로운 신맛이 혀를 찌른다. p.23
 

 

행복하고 달콤했던 기억은 관계가 끝나는 순간 날카로울 정도로 신 것으로 탈바꿈한다. 단 맛이 그리워 차를 다 마시고도 바닥에 깔린 레몬을 씹어보지만 단 맛이 쪽 빠진 레몬차의 레몬은 씁쓸하기만 하다.

 

레몬청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마지막 말을 이해해 보기 위해 책에서 시키는 대로 레몬청을 만들었다. 책 속의 설명은 레몬과 설탕 쌓는 것부터 시작했지만 그전에 해야 할 단계가 있었다. 레몬을 세척해야 했다. 레몬을 냄비에 팔팔 끓인 다음 굵은 소금으로 레몬의 겉면을 닦았다. 거칠었던 레몬 껍질이 반들반들 말랑해지자 레몬을 적당한 두께로 썬 다음 안에 있던 씨를 다 빼주었다. 그다음 책속의 설명과 같이 레몬 한 층, 설탕 한 층, 레몬 한 층, 설탕 한 층 겹겹이 쌓았다.

 

레몬청 만드는 법은 친구에게 슬쩍 건네는 위로처럼 간단했다. 일주일 뒤 레몬이 설탕에 적당히 뱄고 비가 오는 날 레몬차를 마셨다. 씁쓸함 위에 겹겹이 쌓인 단맛이 주는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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