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보선의 시와, 욕망 중독 벗어나기

예술가가 가지는 짐과 자유
글 입력 2020.06.0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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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인과 나의 공통점은 사회학 전공이라는 것, 이명(異名) 집필에 진지하고 방대하게 임한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를 무척 좋아한다는 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프랑스의 귀족부터, 라틴어와 그리스 문화에 능통한 의사, 산업화와 현대 문명을 찬양하는 선박기술자, 시골의 목동, 그리고 곱사등이 여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페르소나들을 생성하여 글을 썼는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살아간 페소아가 다양한 계급·계층의 인물들을 내면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페소아 뿐 아니라, 다양한 역을 연기하는 배우부터 여러 캐릭터를 생성하고 내면화하는 작가까지. 예술가들은 예술 안에서 복잡한 계층들을 겪을 기회를 자발적으로 얻음으로써, 오히려 계급이론으로부터 초월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계급 논리’가 부추기는 보편적 욕망 속에 들어가 삶의 유한성을 잊는 것에 비해서, 예술가들은 더 자주 자유 속으로 들어가 죽음의 두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대신, 짐짓 마음만 먹으면 여러 계층을 페르소나 삼아 오갈 수 있는 특권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의 채무자지? 죽음은 누가 죽이지? 아마도 죽음은 종말과 함께 죽을 것이다. 그때 종말도 죽음과 함께 죽을 것이다. 그 누가 시간의 썩은 시체가 풍기는 악취를 견디며 영원히 홀로 지낼 수 있겠는가?
[복화술사의 구술사 中], 심보선

 

이 시에서도 화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독자는 화자와 함께 호기롭게 죽음을 ‘죽여’봄으로써 잠시나마 불멸성을 획득한 듯 통쾌한 기분을 느낀다. 뒤이어 이 생각을 ‘궤변’이라 이르지만, 어쩌면 들뢰즈의 말처럼 노예들이 다른 노예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회에 비하면 개인적이고 피해를 주지 않는 착한 궤변일지도 모르겠다.

 

심보선 시인은 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예술가의 계급 위치를 고민하는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마지막 파업 때 끝까지 싸운 이는/노조 간부가 아니라 연극반원이었다네요./그가 경찰에게 몽둥이로 얻어터질 때/세 명의 피 흘리는 인간이 나타났다네요./그중에 겨우 살아남은 이는 조합원이고 죽은 이는 햄릿이고/가장 멀쩡한 이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조차
못 외우는 초짜 배우였다네요.
...
고통에서 벗어나는 건 고통의 양을 줄이는 것이 아니에요./그건 뭔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거라고요./우리는 벤담의 공장에서 자발적으로 해고됐다고요.

[예술가들 中], 심보선

 

시인은 자본의 욕망에 편입된 모순적 노조 간부보다 ‘끝까지 싸운’ 연극반원에게 눈을 돌린다. 마비된 이성으로도 꼽히는 지배계급인 햄릿이 죽고, 그런 계급의 햄릿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하지는 못하는 배우가 살았다고 묘사하는 점에서도 어떤 시사점을 준다.

 

시인은 사회적 불평등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도 하고 있다.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말고.”
[갈색 가방이 있던 역 中], 심보선

 

이 시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의 대상자인 당시 열아홉 살 소년을 생각하며 쓴 시이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논리로 인한 인재이며, 시도 단순한 개인의 과실이 아닌 사회 구조가 낳은 것임을 지적하여 드러낸다.

 

심보선 시인이 계급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적어 넣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를 읽고 어렵지만 분석을 시도하면서, 계급의 틀이 생성한 욕망은 잠시의 두려움을 없애지만 심지어 중독되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중독적이어서 스마트폰이나 게임, 사유를 잃게 하는 미디어 못지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저 그 틀에 갇히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오늘 밤 집으로 돌아가는 많은 사람들도 시인이 아닙니다./우리는 시는 쓰지 않고/시 쓰는 생각도 않고/내일의 노동은 얼마나 고될까?/언제쯤 행복은 나에게 도달할까?/그저 그런 빤한 염려에 젖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이제 시인이 아니랍니다 中]

 

혹 이러한 ‘빤한 염려’를 구성하는 사회적 구조를 알고, 그 계급 논리에서 벗어나길 선택했다면 늘 새로운 공포를 감내한 채 자유를 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방법의 예는 사람마다 다양할 것이고 자신이 직접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명 집필을 한 페르난두 페소아도 있고, 이렇게 ‘사회학을 통해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시를 통해 주의력과 집중력을 배우는’ 심보선 시인도 있다. 어쩌면 찾아나가는 그 과정에서 살아있음을 느낄 수도 있겠다.

 


[곽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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