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도서]

글 입력 2020.05.23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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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TMI (Too Much Information)의 향연이었다. 마치 서번트 증후군의 머릿속을 텍스트로 나열하면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정말 비상하고 괴아하다. 머리가 좋은 사람의 머릿속을 급하게 따라가면 이렇게 체하지 않을가 생각도 든다. 책은 내내 내 머리를 과부화로 만들었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 <무엇이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 <수사학과 수학 멜로드라마> <결정자가 된다는 것: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


"뉴저지주 축제에 비해 일리노이주 축제가 특별히 공동체적인 이유에 대해 콕 집어 말하기는 힘들다. 메모장을 사기는 했는데 어젯밤에 자동차 창문을 내려놓아 비에 젖어 망가졌다. 그리고 토박이 친구가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를 기다리게 만들어서 새 메모장을 살 겨를이 없었다. 사실 알고 보면 펜도 없다. 반면 에드거 주지사는 니트 셔츠 주머니에 색이 다른 펜 세 자루나 가지고 잇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펜을 여러 자루 가진 사람은 늘 신뢰할 수 있는 법이다."


초반에는 재미가 없었다. 첫 에세이는 축제 이야기만 계속 나열을 했는데, 너무나 지극히 미국인 적이었다. 어느 주의 사람이 어떤 특징인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까. 모든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웬만하면 나는 책을 읽을 때 작가와 같은 시점으로 보고 느낀다. 하지만 데이비드 윌리스는 너무나 모든 것알 다 관찰하면서도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 있어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너무 동일시한 나머지 같이 멀미를 느끼고 있었다. 대체 숨은 언제 쉬고 휴식은 언제 하는 걸까. 숨쉴 틈 없는 묘사는 만연체로 가득찼다. 너무 깊게 본 나머지 고역을 치뤄, 나중에는 나도 '눈을 흐리게 뜨고 보는' 방법을 터득해서 천천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장면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나오고, 내 머릿속은 의식의 흐름대로 다 터져나오는 가운데, 많은 비유가 있어서 즐겁게 읽었다.


"나는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가 근본적으로 악에 관한 영화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이 악과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에 대한 린치의 탐구는 별나고 표현주의적일지언정 섬세하고 예리하며 진실하다. 내 생각에 많은 영화인들이 린치에게서 '도덕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진짜 이유는 우리가 린치의 진실을 도덕적으로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볼 때 불편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이 어떤 힘이라는 린치의 생각은 불편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선하거나 악할 수 있지만 힘은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리고 힘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어디든 있다. 따라서 린치에게 악은 움직이고 이동하며 모든 것에 스며든다. 어둠은 언제나 내제한다. '이면에 숨어' 있지도 않고 '누워서 기다리고' 있지도 '지평선 위를 맴돌고' 있지도 않다. 악은 바로 여기 지금 있다. 빛, 사랑, 속죄 등도 마찬가지다. 린치의 도덕 구도에서 어둠과 빛이 서로 고립된 것으로 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린치 영화 소개부터 흥미진진했다. 악은 어딘가 숨어있지 않고 같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걸 '자연스레 인식하기'가 불편할 뿐이라는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공감하고 늘 생각해오던 내용이다. 인간의 본성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이다. '선정성'과 '폭력성'. 인간의 가장 밑바닥 본성이기 때문에 이 두가지로 방송 심의 규정을 정한다. 나이가 어릴 수록 이성적으로, 도덕적인 잣대로 구분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린치 감독 영화 내의 사디즘, 관음증 부분까지도 이해가 됐다. 특히 광고에서도 이런 요소들을 살짝씩 티가 나지 않게라도 넣는다고 한다.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 악이 어느 곳에나 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문구이다. 나는 확실히 장면 서술에 파고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정신을 파고드는 것이 확실하게 좋다.


선정성과 폭력성에 사람이 극단적으로 거부하거나, 끌리는 것은 정말 순수한 본질이어서가 아닐까.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 되든. 이를 너무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것 조차도 눈총 받을 일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선정성,폭력성은 가장 강력한 요소임에 틀림 없다. 그런 의미에서 SM(sadism and masochism)은 정말 흥미롭다. 폭력성의 고통과 선정성의 쾌락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고통과 쾌락은 과연 종이 한 끗 차이일까. 신체적으로 너무 고통을 받으면 반대 작용으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고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러너스 하이도 이 방식으로 이해가 될까? 선과 악, 선정성과 폭력성도 함께 가지고 가서 생각을 더 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앞서 언급한 비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사실은 내가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에 대해서조차 그다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으며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차이'는 형식상의, 혹은 개념상의 차이를 말하며 '나'는 독자로서의 나를 의미한다. 작가로서 내가 알고 있으며 관심을 가지는 장르 간의 차이는 마침 존재한다. 그러나 픽션과 논픽션을 둘 다 쓰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차이를 설명하기는 힘이 든다. 설명하자면 촌스럽고 감상적으로 들릴까 우려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독자 자신의 삶의 풍부한 주변 소음에 따라 주된 차이점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을 쓸 때 픽션은 더 겁이 나지만 논픽션은 더 어렵다. 논픽션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오늘날 느껴지는 현실은 압도적으로, 회로가 터질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면 픽션은 무에서 나온다. 그런데 말하자면, 사실 두 장르 모두 겁이 난다. 둘 다 심연 위에 걸친 줄을 타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심연이 다르다. 픽션의 심연은 침묵, 허무다. 반면 논픽션의 심연은 '완전 소음', 즉 모든 개별 사물과 경험의 들끓는 잡음, 그리고 무엇을 선택저으로 돌보고 표현하고 연결할지 어떻게, 왜 할지 등에 대한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다."


나는 픽션 쓰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항상 논픽션만 쓴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왜 굳이 돌려서 말해야 해?'라는 생각이었는데, 이 글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무에서 유로 세상을 만드는 건 즐겁지만 귀찮고 번거롭다. 나는 그저 '내 주변의 소음'을 '선택해서 표현하는 자유'를 사랑할 뿐이었다. 소설 쓰는 친구는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었고. 나는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옮긴이의 말)"그럼에도 이즈음에서 내가 나에게,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사실은 윌리스가 글 속에서, 글 뒤에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윌리스의 글에는 성찰이 결여된, 때로는 병적인, 가끔은 비겁한 자기 중심적 남성으로서의 그의 모습이 숨김없이, 그대로, 반복해서 드러나있다."


너무 솔직해서 불편할 정도였다. 솔직한 모습은 특히나 이중적이고 확실하지 않은 복잡한 모습은 사람을 끈다. 진실할 수 있는 용기, 밑바닥 까지 보이는 것. 윌리스의 특징이었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 너무 과할 정도의 모든 정보를 다 쏟아 넣는 것. 작은 사소한 고민 하나까지도 다 적어서 어지러울 정도로. 지나친 자의식 과잉의 세계를 같이 느꼈다. 가식과 페르소나가 가득한 세상에서 이런 꾸밈 없는 모습을 보는 자체가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그래서 에세이가 인기가 있는 걸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겉으로 포장하는 건 잘 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관심도 없다. 사회생활에 독이 될 수 밖에 없는 성향인데. 포장할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할 마음도 없고. 엄마는 나보고 왜 순진하게 다 드러내냐고 한 소리 했다. 착하지도 않은게 숨기지도 않냐고. 하하, 정확하다. 나는 착하지도 약지도 않았다. 그냥 나만 알고 지내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일 뿐이다. 이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느냐 아닌 것처럼 보이느냐의 차이일 뿐 사람은 다 똑같다. 그래서 내 친구 참새 짹짹이의 모든 글을 좋아하나보다. 처음 진입 장벽이 조금 높긴 하지만- 과하게 인간적인, 데이비드 윌리스의 에세이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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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노트


무엇을 쓰든 "다시없을 장관"을 펼쳐놓는 "집요한 글쓰기" 다시 만나는 월리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돌아왔다. 2년 전 처음으로 월리스의 문학을 국내에 알린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그가 얼마나 독특한 재능을 지닌 작가였는지 단번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표면상 뻔해 보이는 것을 파고들어 심오한 것을 읽어내고 그러면서도 내내 재미있고 박식한 문장을 쓸 줄 아는 월리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는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잇는 또 한 번의 에세이 선집이다.


월리스는 세상 거의 온갖 것에 '어지러움'을 느꼈던 사람이다. '인생 멀미'를 달고 사는 통에 곧잘 창백한 얼굴이 되어 현기증을 호소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이 멀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 멀미를 유발하는 세상 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었다. 미치광이 같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지면서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려고 하는 태도, 그러면서도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월리스가 글쓰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일말의 '진실'인지도 모른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는 매번 그 불가능함에 도전하며 자기 글의 유일한 '결정자'가 되기 위해 분투했던 월리스의 심연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를

끝까지 바라보는 사람의 눈을 따라가면 마주하게 되는 진실


월리스의 글은 주제가 무엇이든 읽는 재미가 엄청나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에는 일리노이주 축제 취재기, 데이비드 린치 영화 촬영장 탐방기, 존 업다이크 소설 서평, 수학 장르 소설 서평, 그리고 월리스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에세이의 기준을 엿볼 수 있는 글까지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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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David Foster Wallace


미국 소설가. 1962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8년 46세에 사망했다.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졸업논문으로 쓴 장편소설 《시스템의 빗자루The Broom of the System》가 1987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그 후 1996년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 형식 과잉의 두 번째 장편소설 《무한한 재미Infinite Jest》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얻었다. 《무한한 재미》는 20세기 말 미국 문학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작으로, 《타임》은 이 소설을 '20세기 100대 걸작 영어 소설' 중 하나로 선정했다. 2011년 출간된 세 번째 소설 《창백한 왕The Pale King》은 월리스가 죽기 전까지 십여 년간 집필한 미완성 유작이다. 그는 죽기 마지막 날까지 원고를 정리하고 유서를 썼다. 


십대 때부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았고, 스무 살 무렵 첫 자살 충동을 겪은 후 평생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항우울제가 잘 듣지 않을 땐 전기충격요법을 받았고, 그로 인해 기억력 상실 등의 후유증을 겪다가 회복되고는 했다. 자살 충동을 동반한 우울증 외에도 술, 마리화나, 텔레비전, 섹스, 설탕 중독으로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냈으며, 병균이나 물, 비행기 등에 대한 공포증이 있었다. 2007년 오랫동안 복용해온 항우울제 나르딜의 극심한 부작용으로 약을 잠시 끊지만 곧 우울증 삽화가 재발했다. 새로 처방받은 약은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월리스는 소설로만 주목받은 작가는 아니었다. 문학비평, 글쓰기 창작 수업, 에세이로도 이목을 끌었다. 특히 현대적 실존의 단면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그걸 설명하려고 했던 에세이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가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토대이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시스템의 빗자루》 《무한한 재미》 《창백한 왕》, 소설집 《희한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추악한 남자들과의 짧은 인터뷰》 《오블리비언》, 산문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랍스터를 생각해봐》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 《끈이론》, 케니언 대학 졸업 축사를 바탕으로 꾸려진 《이것은 물이다》가 있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산문집 세 권에서 아홉 편의 글을 골라 엮은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아홉 편의 글 중 표제작으로 삼은 글로 국역본 제목을 정함. 같은 제목의 단독 산문집과 동일한 책 아님)과 《오블리비언》 《끈이론》 《이것은 물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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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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