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리송한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1) 미술이란? [시각예술]

글 입력 2020.04.1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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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니면서 늘 타과 전공 수업을 들어보고 싶었다. 다른 전공의 고등교육을 마음껏 수강할기회는 대학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장점이라고 생각했고 나와 같은 미술, 디자인 분야의 다른 전공들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컸기에 시간표의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도전하게 되었다.

 

한국화과 친구가 추천해준 한국화 전공 수업이었는데, 이미 미술학부 학생들 사이에선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한 이론 수업이었다. 해당 강의의 교수님은 저명한 미술 평론가로 교내에 팬덤마저 존재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그저 최고라길래 무엇을 배우는 수업인지, 커리큘럼은 어떻게 되는지 강의 계획서조차 살펴보지 않고 무작정 수강 신청 버튼을 클릭했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신세계였다. 아무도 내게, 미술은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 준 사람은 없었다. 현대미술은 이렇게 읽어내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 사람 또한 없었다.

 

나름대로 미술과 꽤 가까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꿈은 화가였고 한때는 시각 디자이너를 꿈꿨고 언제나 미술 선생님들께 각별히 예쁨받았고 고등학교 땐 미술반 학생이었고 미대 입시를 거쳐 대학에 왔으니 말이다. 대학에 와서 수없이 많은 미술 관련 수업을 들어왔기에 이제는 미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고 아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감명받았던 그 수업에서 ‘미술’과 ‘현대 미술’에 대해 배우고 깨달은 바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앞서 말하자면, 본인은 전문가가 아니기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심도까지, 보다 쉬운 언어로 이야기할 것이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이란 무엇인가? 꽤나 익숙하고 진부한 질문이지만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대개 우리는 미술이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 혹은 ‘감동을 주는 것’ 또는 ‘형식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단편적이고 평면적이며 부분적인 진실을 말하는 부분 정의로 대답하거나 개념의 광범위한 외연을 나열하곤 한다.

 

우리는 예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없이, ‘무엇’이 예술의 범주 안에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판단이 불가능한 와중에도 줄곧 예술을 그리고 미술을 평가하려 든다. 제대로 가치평가를 하고자 한다면 우선 제도가 만들어진 목적에 입각해야 한다. 제도란, 기존에 존재하거나,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일종의 게임의 룰과 같이 개인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끼리 합의하여 임의로 만들어진,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시시각각 피부로 자본주의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과도 같다.

 

미술 또한 사회적으로 쓸모 있고 유용한 것이라는 전제와 가치를 가지고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제도이다.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프로덕트는 생산적이지만 미술만은 생산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소비적이며 쓸모없는 방식으로 쓸모를 지닐 때 유용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술 혹은 미술은 어떠한 심미적 경험으로 자연스러운 것,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 인간과 태초부터 함께해온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술은 결코 자연스럽게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노력했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개념의 세계와 반대로 만들어진 세계



Contemporary art가 아닌 Art는 ‘근대’에 만들어졌다.


근대는 역사학 속에서 시간을 지칭하는 말로, 시간의 어떤 지점에서 그 이전과 다른 어떤 성질과 특징이 생겨났기에 만들어진 것인데, 이는 중세인과 구분되고 싶은 근대인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근대 이전의 중세는 어둠의 시기라 불렸기에 근대인들은 밝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였다. 인류의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유토피아를 찾아감으로써 이득을 극대화하고자 하였고 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생각하는 힘인 근대 이성으로 인해 본인들 스스로가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이득은 결국 나에 귀속되는 것이기에 근대 이성이라는 것도 결국 나의 이득을 위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 것이었으며 그들이 찾아낸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는 휴머니즘과는 배치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었다. 그리고 이는 근대 시스템의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

 

우리 인간이 함께 살아가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인류가 함께 살아가자고 사회적으로 집단을 형성하고 문명을 건설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강한 자만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함께 뭉쳐서 살아가는 순간 약자는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약자도 보호받을 수 있는 커다란 힘으로 작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근대 시스템의 원리는 인간다움과는 배치되는 문제를 야기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리는 인류의 생존 방식을 ‘강자만 살아남자’로 바꾸려 했고 이런 방식의 끝은 파멸뿐이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멸망하게 만드는 이런 시스템이 아닌 또 다른 시스템은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 시스템은 이득을 극대화하는 것을 멈추고 그 반대로 나아가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멈출 수 없는 이득의, 욕망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 그것이 결코 우리를 자유와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반대의 시스템, 다시 말하면 이득이라는 것은 구분과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니 그 반대의 통합과 무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만들어진, 개념의 세계와는 물구나무선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예술 시스템이었다.

 

그렇기에 예술가의 세계는 일반적인 욕망을 쫓아서 세계를 구성하려는 사람들의 삶과는 완벽하게 반대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사는 것을, 생존의 이득을 추구하지만 예술가는 이득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이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명예와 이득을 쫓아가지만 예술가는 그 반대로 명예와 이득을 버릴 때 그것들이 예술가를 쫓아가는 방식으로 그들의 세계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부정과 파괴로부터 시작하는 미술


 

탁자는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이다. 의자와 구분되고 칠판과 구분된다. 탁자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순간 구분과 질서가 부여된다. 이것이 보다 명확하게 인식되려면 더 자세하게 분화되어야 한다. 나무 탁자, 나무 상판이 있는 철제 구조를 가진 탁자, 나무 상판이 있는 철제 구조를 가진 플라스틱 바퀴가 있는 탁자와 같은 방법으로 말이다. 이처럼 개념은 분화되면 분화될수록 대상이 명확해지지만 예술 시스템은 이와 반대로 융화될수록 명확해진다. 어떤 이미지들끼리 붙을수록 세계가 명확해진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대상이 지닌 이미지와 어떤 이미지가 결합하면서 교집합이 생길 때, 겹쳐지는 부분이 좁아질수록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듯 쓸모없어 보이는 예술이 생겨나고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얼까.


바로 쓸모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쓸모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란, 나를 반성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에 대해 생각할 때에 있다. 학문이란 주위에 있는 모든 조건을 고려해서 계산해 놓은 것이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불안해하기 마련이다. 이럴 때 다시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 예술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비평, 반성을 이중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학문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예술은 이미지로 생각할 수 있다. 고로 예술가가 하는 일은, 그들에게 부여된 책무는,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산자들의 몫까지 전문적으로 생각하고 반성하는 것이다. 생각은 멈추어야만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을 하지 않고 멈추어 쉬면서 생각하고 그것을 일하는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

 

애초에 예술이란 발생 초기부터 제2의 반성 체제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구분과 질서의 학문과 달리 통합을 통해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다. 그렇기에 예술의 속성은 반성의 기반인 성찰과 성찰의 전제인 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과 파괴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괴가 없는 것은 예술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다시 말하면, 그림 조각 설치 판화와 같은 모든 양식이 근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을 우리는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림 혹은 회화라고 부를지언정 고전주의의 그림을 미술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그리려고 하는 자체가 미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과 미술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림은 대상을 유사하게 화폭에 옮기는 것이고 미술은 대상을 통해 주체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으로,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림이라는 것은 네가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이 같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미술이란 내가 봤을 때, 그것이 내게 어떻게 인식되었느냐를 화폭에 옮기는 것으로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며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의 그림은 근대에 처음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것을 미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나는 표현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조차 없다면?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그린 것은 아니지만 읽히긴 해야 하기에 공통된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그 공통된 언어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제도로서의 미술이며 그 공통된 언어와 형식과 제도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통해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만은 온전히 나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곧, 미술이라는 것은 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주관적인 것이 맞으나 그 주관이 형식과 제도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며 미술은 이렇게 어떤 특별한 생각 때문에, 어떤 특별한 방식 때문에 인류가 만들어 놓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성찰을 위한 것이기에 부정이란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찰이란, 당위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이상하고 뒤틀리고 불편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바로 그 무엇인가 뒤틀리고 불편한 것이 왜 그런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며 그것을 알아내는 순간, 그 원인을 이해할 때,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나를 괴롭혔던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질문이 있고 답이 있는 것이며 끊임없는 부정의 역사인 것이다.



[강안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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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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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소영
    • 그림과 미술을 구분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뭔가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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