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언어의 범람, 역행적 연극성에 관하여 - 연극 "라 뮤지카(La Musica)"

독일의 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함께.
글 입력 2019.12.06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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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 박태양

 

 

 

1. 연극적인 것의 고정성


 

연극의 제작 방식이 작가를 위시한 텍스트에서 연출을 위시한 무대화의 과정으로 옮겨오는 동안 연극의 예술성을 둘러싼 논의도 자연스레 변화해왔다. 텍스트 중심에서 무대 중심으로 연극의 중심이 변해온 과정은 시학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론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아리스토텔레스식 전통 연극론에 반대하며 고정된 텍스트 중심의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공연이 진행되는 무대에 집중하는 제작 방식을 택함으로써 혁신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20세기부터는 무대 중심의 연극이 학적 논의와 실제 공연을 지배하기 시작하며 연극의 예술성을 텍스트에서가 아니라 관객과 실시간으로 대면하는 무대 자체로부터 찾으려는, 즉 무대장치를 중심으로 구현될 수 있는 연극의 특징들로부터 그것을 찾으려는 시도가 늘어났다.

 

현대적인 입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예술성을 “연극성”이라 명명하며 텍스트의 탈중심화에서 “연극적인 것”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출은 무대화 작업을 통해, 무대 위에서의 다양한 변형들과 기술적인 실험들을 통해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에게 시각적인 충격과 생소함을 선사하고, 무대 기술들을 통해 변칙적인 플롯을 전개해나가며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을 그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비아리스토텔레스 연극론을 옹호하며 서사극의 제작을 주장한 브레히트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텍스트 중심의 연극이 전형적이고 고정적인 서사 전개를 고집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현대 연극미학의 논의를 이끌어나가는 학자들은 연극의 본질이 무대에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예시로 든 브레히트 역시 텍스트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던 서구 연극을 비판하며, 카트린 노그레트에 의하면 “간접적 재현의 방식을 취하며” “모든 공연요소들이 기호가 되고, 그것들이 전부 거대한 이야기의 구성요소가 되는” 무대화 기법을 옹호한다. 이들에 의하면 연극적인 것, 연극성이란 텍스트가 아니라 무대 위 모든 요소들의 혼합에서 추출된다. 현대의 논의는 이렇듯 텍스트를 전통과 인습의 기호로 규정하고 그것을 무대의 기호들에서 배제하려는 양태를 띤다. 하지만 현장성을 바탕으로 무대를 변형과 실험의 장으로 간주하며 연극성을 창출하려는 행동은, 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론의 고정적인 텍스트성을 비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성의 근원을 단지 무대 요소들의 관계에 고정적으로 한정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연극이 무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더 이상 정형화된 서사 구조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 반례도 충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텍스트 중심의 연극일지라도 현대 연극미학이 강조하는 연극성이 발현할 수 있으며 반대로 현대적인 무대화의 작업이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형 연극에 가까운 메시지를 관객에게 신고전주의적으로 환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논의는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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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사진

 

 

 

2. 브레히트 서사극의 연극성: “생소화”의 기제와 텍스트의 후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서사극은 무대화의 기법을 독창적으로 이용하여 오롯이 연극의 시공간이라는 배경 안에서만 플롯을 전개해나가는 작품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형 연극론을 비판한 그는 전통적인 서구 연극이 관객으로 하여금 지나친 “감정이입”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미메시스와 카타르시스 등의 고전적인 원리를 통해 단일한 진리와 보편의 도덕을 있는 그대로 연극에서 재현하고자 했고, 이는 관객이 연극 속 상황을 실제 상황처럼 인식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원칙이 공포와 연민을 환기함으로써 감정을 정화하도록 관객을 종용했고 이는 관객에의 참여를 제한하고 관객의 지위를 객체에 국한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규칙은 헤겔의 드라마적 극 형식에서도 꾸준히 유지되었다며 말이다. 그는 이렇게 모든 외부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관객을 연극이라는 현실에 편입시켰던 전통 연극들을 비판하며 관객을 연극의 주체로 호명하기 위해 “생소화”의 기제를 활용하여, 연극과 현실을 분리시킴으로써 연극의 예술성을 규정하고자 했다.

 

“생소화”의 기제란 표현 그대로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끊임없이 생소한 경험을 제공하는 행위다. 기존의 전통 연극들이 이미 정해진, 보편적인 주제의식과 결말을 향해 극의 기승전결을 구성했다면 이 기제를 사용하여 만들어지는 연극은 그러한 고정성에서 벗어나 매 순간 관객이 무대 위의 사건을 연극으로서 바라볼 수 있도록 현실과 거리를 조정한다. 브레히트는 생소화의 기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소화란 무엇인가? 하나의 과정 혹은 하나의 성격을 생소화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아주 간단하게 이 과정을 혹은 이 특성에서 당연한 것, 기지의 것, 명백한 모든 것을 제거하는 일이며 이어 그 자리에 대신 놀라움과 호기심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카트린 노그레트의 <프랑스 연극미학> 중에서

 

 

관객은 이 기제의 발현을 통해 눈앞에 펼쳐지는 연극의 상황으로부터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하여 무대 위의 배우들과 소품들, 서사적 사건들을 “대면”하게 되며 더 나아가 서사 그 자체를 직면한다. 브레히트에 따르면 생소화의 기제가 발현되어야만 그가 역설하는 서사극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서사극은 기존 연극처럼 관객을 객체의 지위에 위치시키며 단일화된 주제의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세상을 문제 삼기 위해 영원한 자기부정에 착수한 말 그대로 변증법적으로 창조”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관객의 정치적인 집단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관객의 주체적인 해석을 요구함으로써 관객과 무대 사이의 쌍방향적인 소통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서사극의 발현은 생소화의 기제가 구체적으로 동원하는 “보여주기”식 기법을 통해 가능해진다. 보여주기 기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로 무대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분할적으로 명확하게 관객에게 제시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로는 이중의 관점을 취하는 배우를 생소화의 장치로 편입시킴으로써 그 자신의 몸짓과 발성, 그가 무대 위에서 소품을 활용하는 방식 등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방법이 있다. 브레히트는 관객에게 보이기 이전에 구상하는 텍스트보다 관객에게 실시간으로 보이는 무대 위의 과정들을 중시함으로써, 텍스트를 후퇴시키고 비텍스트적인 요소들로 연극의 서사성을 설명한다.

 

또한 무대 위에서의 서사성을 연극만이 표현할 수 있는 연극성으로 규정하며 연극의 예술성을 현대적으로 정립하고자 했다.브레히트 서사극은 현대 미학이 바라보는 연극의 절충적 입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조리극이나 잔혹극처럼 텍스트를 완전히 작품에서 추방시키는 현대 작품들은 오랫동안 연극의 핵심으로 자리해 온 텍스트의 권위를 급작스럽게 격하시킴으로써 관람객의 접근 장벽을 높이기 때문이다. 반면 서사극은 텍스트 중심에서 벗어난 무대화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나 여전히 텍스트에서 기인한 서사라는 요소를 통해 최소한의 문학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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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소품 구성이 정말 간단해서 놀랐다.

 

 

  

3. “생소화”의 역행적 작동:

텍스트 중심극의 비텍스트성과 비텍스트 중심 서사극의 텍스트성


 

브레히트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서사극이 중시하는 요소는 무대의 현장성이다. 정확히는 텍스트가 발휘할 수 없는, 무대 위에서의 현장성을 통해 관객을 무대의 사건들에 끌어들이는 동시에 생소화의 기제를 통해 관객에게 연극을 온전히 연극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비판적인 거리를 제공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생소화 기제의 구체적인 방법론인 보여주기식 기법은 상술했듯 무대의 공간적인 특징, 음향이나 조명, 소품 등 무대 구현에 동원된 기술적인 장치들,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 등을 의미전달의 기호들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구현된다.

 

텍스트가 아닌 무대 위의 기호들이 결국 브레히트가 강조했듯이 연극의 서사를 창조하고 관객이 해석의 주체로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場)을 제공한다. 이는 비텍스트 중심의 서사극에서 비텍스트적인 상호소통의 결과를 이끌어 낸다. 관객은 무대를 연출하기 위해 사전에 어떤 텍스트(대본)가 쓰였을지유추할 필요 없이 단지 무대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관망하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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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텍스트 중심극에서 비텍스트적인 서사성을 구현한 연극 <라 뮤지카(La Musica)>


 

하지만 현대 연극의 사례에서는 이 반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텍스트 중심의 연극에서도 브레히트가 주장했던 것처럼 관객이 주체로서 연극에 참여하는, 관객이 텍스트를 받아들이면서 눈앞의 상황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연극 <라 뮤지카(La Musica)>가 그 예시다. 본 작품에서는 이혼한 부부인 남주인공 ‘미셸’과 여주인공 ‘마리’ 단 두 명만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신혼 시절을 보냈던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남녀 모두 각자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옛날의 서로를 지배했던 사랑의 감정이 증오와 그리움, 미련 등과 같은 감정과 섞이며 오랜만에 재회한 그들 사이의 대화를 파고든다.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가볍게 묻는 것에서 시작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다가 어느 순간 연인으로 존재했던 과거를 들추는 지경에 이른다. 서로는 서로에게 왜 자신을 내버려두고 종종 혼자 외출을 감행했는지, 왜 서로가 겪고 있었던 현실적인 문제를 털어놓지 않았는지 원망하는 등 헤어진 지금으로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건들까지 들먹이며 감정의 골을 키워나간다. 이들은 함께 썼던 가구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등의 사소한 문제를 핑계거리로 삼아 서로의 내면에 남아 있는 감정의 응어리를 분출한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연극이 상연되는 내내 이렇듯 인물들 사이의 발화만 오갈 뿐 상징적인 의미를 제공하는 기호로서 기능하는 여타의 무대 장치들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대의 공간성을 구현하기 위한 만큼의 최소한의 장치와 소품만이 존재했고 이마저도 연극의 진행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단지 물리적인 차원에서 소품으로 “쓰일” 뿐이었다. 무대를 구성하는 동시에 무대에서 펼쳐지는 사건을 구성하고 진행시키는 요소는 두 배우의 연기뿐이었다.

 

배우들이 발화라는 언어적 텍스트를 통해 분출하는 사랑, 집착, 공허함, 욕망, 그리움 등과 같은 감정은 관객의 내면에서 공감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변혜훈 연출이 밝히고 있듯 본 연극은 두 배우의 발화를 통해서, 배우들이 분출하는 언어를 통해서 관객에게 극중 배우들이 체험하고 있는 감정들을 전이시킨다. 비록 극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경험을 하진 않았더라도 비슷한 감정은 삶을 살아가면서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기에, 관객은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며 극중 인물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러한 감정을 인생의 어떤 순간에서 경험했음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극론이 지향했던 동일시의 기제, 즉 관객이 연극 속 인물의 처지와 연극 바깥의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함으로써 어떤 보편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도록 종용하는 역할을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경험하는 감정의 고리들을 텍스트를 통해 서술하고, 이 서술을 배우들에게 연기하도록 요청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서사를 이끌어나갔기에 브레히트의 논의와 연결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다. 브레히트는 생소화의 기제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배우의 연기가 생소화되는 경우를 언급하며 자신이 할당받은 역할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배우가 역할과 배우 자신을 함께 보여주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그래서 배우는 ‘실연자’로서의 위치에서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게스투스를 실현하는 존재로 비추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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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거리 장면』을 사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의 연기를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담론과 연결 지어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여백을 제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에 의하면 먼저 실연가로서 배우는 예술가일 필요가 없으므로 자신이 무대 위에서 연기해야 할 상황을 그저 자신이 연기할 수 있는 한 연기하기만 하면 된다. 연기로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의 경우에는 상황을 설명하는 내러티브를 추가하면 되기에 연극에서의 환상성은 제거된다. <라 뮤지카>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남녀 인물은 과거에 자신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발화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간접적으로 첨언하며 감정을 격화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관객은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두 사람에게 과거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기에 서로의 감정이 극으로 치닫는지 유추해야 한다. 관객은 이때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식 연극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극을 관람하기만 하는 객체로 전락하지 않는다. 상황을 엄밀히 고찰하고 배우들의 사소한 언어 하나까지도 분석하며 어떠한 상황에서야 저런 종류의 감정이 폭발하는지 사유한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는 두 사람의 말싸움이 순전히 두 사람에게 국한된 것임을 암시하기에 관객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의 연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 때때로 배우의 연기가 해당 상황에 적절한지 아닌지까지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관객은 ‘미셸’이 ‘마리’에게 자신이 그녀의 뒤를 밟아 그녀를 살해할 생각이었다고 폭로하는 장면에서 감정을 더욱 격화시켰어야 했다고 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본 작품은 오로지 발화를 통해서만, 배우들의 텍스트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브레히트식 생소화 기법을 잘 구현함으로써 텍스트 중심의 연극으로부터 비텍스트적인 서사성, 즉 관객이 능동적으로 해석해 나가는 플롯을 실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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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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